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현월비화 1권 (11화)
제3장 등천관 (4)
놀람과 당황이 겹쳐 얼떨결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좌세량은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 보였다.
조운비는 이 나이 든 의형이 성격이 변화무쌍하여 상대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꽤나 집요하기까지 하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법의 특징이 빠르다? 느린? 느린 신법? 정말 묘한 일이로군. 묘한 일이야.”
서성거리듯이 조운비의 앞에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 중얼거리는 좌세량이었다.
조운비의 고개는 깊숙이 숙여진 채 올라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핫! 그만 하자. 사실 네 말도 그다지 틀리지는 않다. 뇌전비는 무림의 수많은 신법들 중에서도 꽤나 빠른 편에 속하는 신법이다. 속도만을 보자면 기초 신법이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정도지. 그러함에도 뇌전비를 기초적인 신법이라고 한 것은 그 빠름이 신법 자체의 묘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력의 깊이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법은 적은 공력을 사용하여 빠르게 먼 거리를 움직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고급 신법의 경우에는 운신의 자유로움과 다양한 변화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곤륜파의 운룡대구식 같은 경우는 그 운신의 자유로움과 화려한 변화로 인해 신법 자체가 강력한 공격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한 것이 고급의 신법이다. 허나 뇌전비의 경우는 직선을 빠르게 움직이는 요결 말고는 다른 운신 요결이 없다. 그 속도라는 것도 가지고 있는 공력에 비례하지. 신법 자체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몸을 가볍게 하고 발끝에 진기를 담아 땅을 박차는 것. 그것이 운용요결의 전부이다. 그러니 기초 신법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초 신법이라고 무시하지는 말아라. 공력이 깊어지면 이형환위나 궁신탄영, 일학충천도 가능한 신법이다.”
좌세량의 마지막 말에 조운비가 약간의 놀람을 떠올리며 꽤나 대단한 신법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에 좌세량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사실 어떤 신법이든 공력만 되면 다 가능하다는 점이 조금 아쉬운 일이기는 하다.”
멀뚱히 서 있는 조운비를 바라보며 한동안 히죽거리던 좌세량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뇌전비와 풍운보를 수련하도록 하자. 기초적인 대신에 그다지 어려운 요결은 없으니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팔로세를 먼저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깜박하고 네 검을 안 가지고 왔지 뭐냐, 하하하!”
제4장 수련 (1)
어느덧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가을에 접어든 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탓에 밤공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조운비는 연무장에서 느릿한 움직임으로 차근차근 팔로세를 펼치고 있었다.
느릿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조운비의 온몸은 목욕이라도 한 듯 땀으로 젖어 있었고, 이마에도 송골송골한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땀으로 젖어 들러붙은 얇은 무복 위로 언뜻 보이는 조운비의 몸은 열세 살 소년의 몸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균형이 잡혀 있었다.
꽤나 오랜 시간 검을 움직였을 법함에도 조운비의 자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운비가 보법을 밟아 나가는 소리와 검이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가볍게 스치는 듯한 바람 소리 외에는 적막하게까지 느껴지는 연무장이었으나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의 그림자 한편에선 세 사람이 조운비가 연무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시가 안 돼서 나왔다고 했으니 여덟 시진 동안 저러고 있는 거 아냐?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독한 놈이네. 아니, 조 공자라고 해야 되나?”
마무강이 눈치를 보듯 좌세량을 힐끔거렸다.
“눈치 볼 것 없으니까 편한 대로 불러. 네 녀석들한테 조 공자로 보이면 조 공자고, 놈으로 보이면 놈인 게지. 나중 일이겠지만 저 녀석한테 내가 말을 할 거야. 아랫놈들이 맞먹으려고 하면 질근질근 밟아 놓으라고.”
“푸하하하! 대주님도 참. 그냥 편하게 부르라는 말이잖아요. 저 꼬맹이가 언제 커서 저희를 밟아요, 푸하하하! 농담 참 재미있게 하시네요.”
재미있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마무강의 모습에 이지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은 당장 눈에 뵈는 것 말고는 어떻게 저렇게 아무 생각이 없을 수가 있는 건지. 저놈이 등천관에서 살아 나온 건 정말 기적이야, 기적.’
좌세량은 마무강의 말에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열흘인데 거의 틀이 잡혔어. 하여간 자질이나 성격이나 정말 대단한 녀석이 아닌가.”
조운비에게 시선을 돌린 좌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기초만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까? 상승 무공을 배우는 데 큰 보탬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 녀석 등천관에 보내신다면서요. 혈성마검, 패왕도, 청마수 같은 걸 휘두르는 놈들한테 팔로세가 가당키나 합니까? 몇 초식 오고 가기도 전에 피떡이 될 겁니다.”
이지문이 미간을 찡그리고는 투덜거리듯 입을 열었다.
좌세량이 턱을 괴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흠, 그것까지는 생각을 못했군.”
좌세량의 말에 이지문은 어이가 없는 듯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저걸 가르쳤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르치실 때 뭔가 생각을 하기는 하셨을 게 아닙니까?”
쏘아붙이는 듯한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이 인상을 찌푸리며 삿대질을 했다.
“지금 감히 나한테 엉기는 거냐? 앙!”
이지문은 말문이 막힌 듯 힘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그래, 대주님한테 엉기는 건 좀 너무 심했어. 안 그러냐?”
마무강이 달래는 듯한 표정으로 이지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놈이 말을 꺼냈으니까 네놈이 해결해.”
좌세량의 짜증스럽다는 듯한 말에 이지문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내가 말을 꺼냈으니까 내가 해결을 해야 한다고? 그건 도대체 무슨 사고방식이야?’
마무강이 다시 이지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래, 사내자식이 자기가 꺼낸 말은 책임을 져야지. 그 뭐? 뭐래더라? 사내 일, 일언은 처, 천만금! 그런 말도 있잖아.”
문자를 쓰기 위해 고심했는지 마무강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런 마무강을 바라보며 이지문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굳이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 교정해 주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말을 해서 뭐 하나. 나만 갑갑할 것을.’
* * *
“검을 들어 보아라.”
평소와는 달리 싸늘하게 느껴지는 이지문의 목소리였다.
조운비는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차분한 자세로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어 자세를 잡았다.
평소에 꾸준히 수련하던 팔로세의 기수식이었다.
잠시 조운비의 자세를 살피던 이지문이 미간을 가볍게 찡그렸다.
확실히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팔로세가 상승의 검을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검법이기는 했지만, 법에 치중하여 술이 없는 반쪽짜리 검법이었다.
달리 말하면 재료만 많고 사용하는 요령이 없는 셈이니 실전에 활용하기는 힘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유였고 당혹스러운 지시였지만 명은 명이었다.
좌세량이 가르치라 했으니 그리하기는 해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도 많이 늦은 상황이니 길어도 며칠 이내에는 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등천관까지 가는 시간을 감안해도 채 한 달이 못 될 것인데.’
이지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대로 된 검법을 가르치려면 몇 년의 시간이라도 모자랄 것이고 등천관에서 쉽게 죽지 않을 만큼만 가르치려 하여도 반년은 필요할 것인데 가르칠 시간은 채 한 달이 안 되는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구나. 발검술을 포함한 쾌검의 요결과 구명절초나 한 가지 가르치는 수밖에.’
이지문은 결정을 내린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겨 조운비의 앞으로 다가섰다.
검을 든 조운비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이지문이 느닷없이 손등으로 조운비가 쥐고 있는 검의 검면을 후려쳤다.
챙!
가볍게 친 듯 보였으나 조운비가 쥐고 있던 검은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용틀임을 했고 조운비는 검 자루에서부터 밀려드는 충격에 순간적으로 검을 놓치고 말았다.
조운비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땅에 떨어진 검을 향해 몸을 돌리자, 이지문이 손을 저어 조운비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흔히 검을 만병지왕이라 한다. 그만큼 많은 자들이 검을 무기로 삼고, 어떤 자들은 검을 도에 이르는 수단으로 생각하기도 하지.”
이지문이 나직한 목소리를 내며 거닐듯이 조운비의 앞을 지나 땅에 떨어져 있는 검으로 다가섰다.
허리를 숙여 검을 집으며 이지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한 검을 다루는 자들에게 검은 수단이자 목적이다. 그런 만큼 검에 두는 의미가 적지 않다. 한 예로 남해검문이라는 곳은 검을 자신의 생명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남해검문의 인물이 너처럼 검을 놓쳤다면 어찌할 것 같으냐?”
검을 한 손에 들고 몸을 일으킨 이지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수치심을 못 이기고 자결을 한다. 그러한 자들과 비할 수는 없겠지만 검을 쓰는 자라면 검을 손에서 놓치는 것을 수치라 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검을 놓치는 순간부터 적지 않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던 조운비는 이어지는 이지문의 이야기에 점점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는 왜 검을 놓쳤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보다 강해서? 생각하지 못한 일이라서?”
조운비의 가라앉은 눈빛에 시선을 맞추며 이지문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도 이유가 될 수는 있을 것이나 가장 큰 이유는 네가 검과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 보거라. 내가 똑같은 힘으로 네 녀석의 팔을 쳤다면 팔이 떨어져 나갔을 것 같으냐?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 말의 의미를 알겠느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조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 것 같습니다.”
이지문이 조운비를 향해 검 자루를 내밀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검을 손에서 떼지 마라. 잠잘 때도 검을 쥐고 자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검과 일체감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지문은 말을 이어가며 검 자루를 잡고 있는 조운비의 손 모양을 고쳐 주었다.
“지금의 모양을 기억하고 앞으로는 그렇게 검을 쥐도록 해라. 원래 네가 검을 쥐는 방법도 그르진 않지만 지금의 방식이 쾌검을 사용하는 데 더욱 낫다.”
“검을 쥐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습니까?”
조운비의 물음에 이지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나무를 할 때 도끼를 잡던 방식으로 장작을 팰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말이 나왔으니 간단하게 설명해 주마. 검법의 종류는 무수히 많지만 기본이 되는 원류는 쾌, 중, 환의 세 가지이다. 속도를 중시하는 쾌검과 힘을 중시하는 중검, 변화를 중시하는 환검을 말하는 것이지. 셋 중 무엇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검을 쥐는 법도 차이가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검을 쥐고 있던 방식은 중검에 쓰이는 것이고 지금의 방식은 쾌검을 사용하는 데 유리한 방식이다.”
“쾌검을 배우는 것입니까?”
“그러하다. 쾌검류의 검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나 검을 빠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 검을 다루는 방법이다. 그 시작은 검이라는 무기 자체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다. 무공이 높아질수록 그 가림이 적기는 하지만 어떤 고수라 해도 평소 자신이 사용하던 검이 아닌 다른 검을 사용한다면 실력의 전부를 발휘하기 힘들다. 어째서인지 아느냐?”
이지문의 물음에 조운비는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익숙하지 않아서가 아니겠습니까?”
이지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심리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자신의 손과 몸에 익숙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익숙하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일체감의 차이인 듯 생각됩니다.”
곧바로 나오는 조운비의 대답에 이지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손이나 발처럼 느껴질 정도의 일체감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지. 일체감이 없으면 검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휘두르게 된다. 불필요한 힘과 심력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검의 특성과 성질을 이해하고 검을 자신의 손발처럼 느낄 수 있게 되면 검이 원하는 움직임을 알고 조종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을 검을 다룬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검법이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쾌검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분이 특히 중요하다.”
* * *
조운비는 근래의 일과대로 새벽 수련을 마치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대청으로 향했던 조운비는 탁자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조운비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좌세량이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에는 길을 나서야겠구나.”
근처에 놀러 가기라도 하는 듯 가벼운 말투였다.
“천마신교로 가는 것입니까?”
“흠, 내가 말을 안 했던가? 하긴 묻는 것을 보니 안 했나 보구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좌세량의 모습에 옆자리의 이지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무강은 천마신교로 돌아가는 것이고, 너는 지문과 함께 등천관으로 간다. 곤명까지는 같이 가게 될 것이다.”
조운비가 의문 섞인 시선을 좌세량에게 향했다.
“등천관이 무엇입니까?”
“등천관은 달리 수라등천관이라 하는 곳으로, 천마신교의 정예 무인들을 키워 내는 곳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문이 따로 해 줄 것이니 우선은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고개를 끄덕이는 조운비를 잠시 바라보던 좌세량이 조금 안타깝다는 듯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얼마 정도 더 있으면서 네 기초를 잡아 주려고 했는데 교에서 최대한 빨리 복귀하라는 전갈이 왔구나. 별다른 짐은 없겠지만 식사 후에 옷가지라도 챙겨 놓도록 해라.”
“그리하겠습니다.”
조운비는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곧바로 옷가지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여 챙기기 시작했다.
좌세량의 말마따나 정말 별다른 것이 없었다.
이옥화와 함께 몸만 빠져나왔으니 소지품이라고 해 봐야 몸에 지니고 있던 몇 가지뿐이었고 옷들은 천리표국의 하인이 사다 준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