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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12화)
제4장 수련 (2)
조운비는 방 한편을 뒤적거리더니 계곡에 뛰어들 당시 입고 있던 찢어진 옷을 꺼내어 짐 꾸러미에 끼워 넣었다.
입을 만한 상태도 아니었고 굳이 챙겨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버릴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옥화와 헤어지기 전까지 입고 있던 옷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유라 하기도 우스웠지만 이옥화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리 사소한 것도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었다.
조금은 울적한 기분이 된 조운비가 이를 악물었다.
‘살아 있을 것이다. 어느 하늘 아래, 어떤 상황에 있건 언젠가는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운비는 문뜩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이 들자, 가볍게 고개를 들며 눈을 감았다.
* * *
기껏해야 한 달이 채 안 되게 머물렀던 곳이지만, 막상 문밖을 벗어나니 왠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천리표국을 떠난다는 데서 오는 서운함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살아왔던 성도를 떠난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살문이 있었고 이옥화가 있던 곳, 조운비가 일곱 살 때부터 육 년을 살아온 곳이었다.
지금 떠나면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씁쓸한 기분이 드는 조운비였으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접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희비와 감회가 엇갈리는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는 조운비를 마무강이 재촉했다.
“어디 금덩이라도 묻어 뒀냐? 빨리 안 따라와?”
조운비는 뿌리치듯 고개를 돌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마무강의 뒤를 따랐다.
* * *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싸늘한 기운이 대지를 뒤덮었다.
아직은 늦은 가을이었지만 곧 겨울임을 알리기 위해 시위라도 하는지 바람은 얼음이라도 얼릴 듯 매서웠다.
그러한 매서운 바람을 헤치며 인적이 보이지 않는 관도를 나는 듯이 달리고 있는 네 사람이 있었다.
좌세량을 선두로 하여 좌우로 이지문과 마무강의 모습이 보였고, 조운비가 조금 처져서 뒤따르고 있었다.
묵묵히 몸을 날리는 앞의 세 사람과 달리 뒤따라가는 조운비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벌써 보름간 반복되는 모습이었다.
원래는 말을 탈 예정이었으나 조운비가 말을 탈 줄 모른다고 하자 좌세량은 신법을 사용하여 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 기회에 조운비의 신법을 익숙하게 해 준다는 이유였는데 좌세량의 그러한 결정 덕분에 조운비는 며칠간 이지문과 마무강의 곱지 않은 눈초리에 시달려야 했다.
말도 못 타는 황당한 녀석은 처음 보았다는 표정에서 곧 너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한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는데, 조운비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무슨 명문가나 세가의 공자도 아닌 조운비가 열셋의 나이에 말 타는 것을 배울 기회가 어디 있었겠는가.
문뜩 좌세량이 몸을 세웠고, 그에 따라 일행의 걸음이 멈췄다.
좌세량이 몸을 돌리며 조운비에게 시선을 던졌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힘겨운 숨을 악다문 입술 사이로 조금씩 내뱉고 있는 조운비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좌세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 힘들면 말을 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 아직은 괘, 괜찮습니다.”
“쯧쯧, 이러다가 애 하나 잡겠습니다.”
이지문이 가볍게 혀를 차며 말하자, 마무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가 아직 괜찮다고 하잖아.”
마무강이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좌세량을 바라보았다.
“한 삼십 리 정도만 더 가면 곤명인데 빨리 가서 쉬죠.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겠습니다.”
혹시라도 좌세량이 쉬어 가자고 하면 큰일이 나기라도 하는 듯 마무강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지문이 그런 마무강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낮에 그렇게 처먹고도 뱃가죽이 등에 붙는다는 말이 나와?”
이지문은 시선을 좌세량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
“저 자식은 혹시라도 적에게 잡히면 고문도 필요 없이 밥 몇 끼만 굶기면 아는 건 다 털어놓을 놈입니다. 제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십니까?”
“맞아.”
좌세량의 긍정에 이지문은 입가에 웃음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런 놈이 저와 같은 부대주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아닙니까?”
“괜찮아.”
이지문의 얼굴이 구겨졌다.
“밥 몇 끼에 적에게 아는 걸 다 털어놓을 놈이 부대주라는 직위에 있다는 것이 걱정스럽지도 않으십니까?”
“저놈이 아는 것이 뭐가 있는데?”
퉁명스러운 좌세량의 말에 이지문은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적당히 쉰 것 같으니까 출발하자.”
가슴의 기복이 조금 가라앉은 조운비의 모습을 확인한 좌세량이 다시 몸을 날렸다.
일다경 정도의 시간이 흘러 나지막한 언덕을 하나 넘자 멀리 도시의 모습이 일행의 눈에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서창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어디 묵을 만한 곳을 찾아봐. 술도 한잔할 만한 곳으로. 오늘은 좀 푹 쉬자.”
“푸하하핫! 알겠습니다.”
좌세량이 술이라는 말을 꺼내자, 마무강은 찢어질 듯 입을 벌리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무강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일행은 곧 화풍루라는 꽤 큰 규모의 객잔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주님, 여기가 괜찮을 것 같은데요.”
몸을 돌린 마무강의 말에 좌세량이 고개를 끄덕였고, 일행은 화풍루로 걸음을 옮겼다.
늦은 시간 탓인지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화풍루는 꽤 많은 식탁이 있음에도 대부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조금 간사해 보이는 인상의 점소이가 굽실거리며 일행을 맞았다.
점소이는 피곤한 듯 눈가에 졸음을 가득 담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식사를 하실 겁니까, 숙박을 하실 겁니까?”
“둘 다. 일단 자리부터 안내해라.”
마무강의 다급함 섞인 우렁찬 목소리에 점소이는 정신이 번쩍 드는지 잰걸음으로 일행을 안내했고, 마무강은 자리에 앉자마자 점소이가 말도 꺼내기 전에 거의 십 인분에 이르는 음식과 소홍주 두 단지를 주문하고는 엽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조운비는 아직까지도 가슴을 들썩이며 입을 열지 못했다.
타는 듯한 갈증이 들었으나 쉽게 물을 들이켤 수가 없었다.
음식이 나올 때쯤 되서야 조운비는 숨 쉬는 것이 조금 편안해짐을 느꼈다.
팔짱을 낀 채 찬찬히 그런 조운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좌세량이 가볍게 미간을 찡그리며 나직한 목소리를 내었다.
“적당히 몸을 혹사시키는 것은 빠른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도 너무 심하면 독이 된다. 무조건 참고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조금의 걱정이 섞여 있는 좌세량의 말에 조운비는 힘들어 보이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참을 만해서 참은 것입니다.”
조운비의 목소리는 지친 탓인지 나직하고 메마르게 들렸으나 말투는 단호하기만 했다.
좌세량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볍게 돌렸다.
“누가 네 녀석을 걱정한다는 말이냐.”
오리 구이를 통째로 들고 뜯던 마무강이 목이 마른지 소홍주를 단지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카, 좋구나!”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마무강이 문뜩 생각났다는 듯이 술을 한잔 따라 조운비에게 내밀었다.
“꼬맹이, 너도 한잔해라.”
마무강이 조운비에게 술을 권하는 모습에 이지문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제 열셋인 아이한테 뭐 하는 짓거리냐?”
마무강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지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술 마시는데 열셋이 뭐가 어떻다는 건데?”
이지문은 마무강의 말에 무어라 대답을 하려는 듯 입 꼬리를 움찔거렸으나 곧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막상 설명을 하려니 어리다고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이유라는 것이 그다지 마땅치가 않았다.
‘저 자식은 개념이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 명확하고 타당한 이유를 말해 줘야 할 것인데…….’
이지문이 자신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할 때, 조운비는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술잔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좌세량에게 돌렸다.
좌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운비도 한잔하도록 해라. 오늘이 지나면 오랜 시간이 지나야 다시 보게 될 것이니 이별주 한 잔 정도는 해야겠지.”
평소와 달리 차분한 느낌을 주는 좌세량의 목소리에 조운비는 왠지 가슴이 조금 갑갑해져 왔다.
형이라 부르고 꽤나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깊은 정을 가지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다지 애절한 기분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아쉬움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뜩 조운비는 목이 말라 오는 듯 심한 갈증을 느끼고 마무강이 내민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쿨럭, 쿨럭.”
목이 타는 듯한 느낌에 조운비는 사레라도 걸린 듯 마른 기침을 토해 냈다.
“푸하핫! 사내자식이 겨우 술 한 잔에 콜록거리기나 하다니, 꼬맹이라서 어쩔 수가 없구나.”
마무강이 재미있다는 듯 대소를 터트렸다.
“급하게 마셔서 사레들렸을 뿐입니다. 한 잔 더 주십시오.”
기침을 멈춘 조운비가 이를 악문 표정으로 잔을 내밀었다.
처음 마셔 보는 술에 배 속부터 후끈거리는 열기가 치밀어 오르며 머릿속이 윙윙거렸지만, 마무강의 비웃는 말을 듣자 오기가 생겼다.
마무강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원래 술은 최소 삼배가 기본이고 사내라면 최소한 한 동이 정도의 술은 거뜬히 마셔야 하는 것이다. 너는 사내냐, 꼬맹이냐? 네 녀석이 스스로 꼬맹이라고 한다면 세 잔만 주도록 하마.”
마무강의 말에 조운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어이없는 도발이었지만, 조운비는 왠지 호기가 솟아올랐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저는 분명 사내대장부입니다. 삼배를 받고도 한 동이 정도는 충분히 마실 수 있습니다.”
호기가 치민 탓인지 조운비의 목소리는 객잔을 울릴 정도로 우렁찼다.
“푸하하핫! 그래, 사내자식이 그 정도 배포는 돼야지. 마음에 들었다, 꼬맹이.”
신이 난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리는 마무강의 모습에 조운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신 제가 삼배를 마시고 한 동이를 더 마신다면 다시는 꼬맹이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웃음을 터뜨리고 있던 마무강이 조운비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뭐라고 부르든 그건 내 마음 아니냐?”
“한 동이를 마시면 사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 입으로 두말을 하실 셈입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분명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었다.
마무강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사, 사내 이, 일언은 천만금이라고 했는데 사내 중에 사내인 이 마무강이 한 입으로 두말을 할 리가 있겠느냐.”
그저 생각이 나는 대로 떠든 말이기는 했지만 약간 다르게 기억하고는 있어도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있는 마무강이 뱉은 말을 어찌 아니라고 하겠는가.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이지문이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쯧쯧. 대주님, 꼬맹이가 술 한 잔에 벌써 맛이 간 모양입니다.”
술이라고는 처음 마셔 본 것이 분명한 어린 녀석이 세 잔도 아니고 한 동이를 더 마시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벌써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 서너 잔이면 꼬꾸라질 것이 뻔해 보였다.
“운비가 한 동이를 다 마시면 어쩔 테냐?”
좌세량의 말에 이지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소홍주 한 동이면 장정 두 명은 쓰러뜨릴 양입니다. 말이 됩니까? 저 꼬맹이가 지금 한 잔에 취해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안 보이십니까?”
“운비가 세 잔에 한 동이를 더 마시고도 정신을 잃지 않으면 네 녀석은 운비를 조 공자님이라고 불러라.”
“하하하핫!”
이지문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자신이 없느냐?”
비웃는 듯한 좌세량의 말에 이지문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너무 빤한 내기이니 달리 조건도 걸지 않겠습니다.”
자신만만한 이지문의 말이었다.
좌세량과 이지문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조운비는 어느새 세 번째 잔을 받고 있었다.
지쳐서인지 술기운은 순식간에 조운비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세상이 빙글거리며 도는 것 같은 기분에 조운비는 눈을 몇 번 껌벅거렸다.
술을 따르는 마무강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옥화.’
어째서인지 갑자기 옥화가 떠올랐다.
잠시 눈을 감자, 흐릿하게 옥화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운비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보십시오. 벌써 맛이 가지 않았습니까. 두어 잔이면 뒤로 넘어갈 겁니다, 하하핫!”
이지문이 손끝을 들어 조운비를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른하고 포근한 기분에 잠시 몸을 맡겼던 조운비는 문뜩 귓가에 파고드는 웃음소리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조운비는 깊은 아쉬움을 느끼며 눈을 뜨고 마무강을 향해 잔을 내밀었다.
몇 잔을 더 마신 조운비의 상체가 가볍게 휘청거리자, 마무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저는 꼬맹이입니다’라고 해 봐, 푸하하핫!”
조운비가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이를 악물며 다시 잔을 내밀었다.
조운비의 팔이 경련을 하듯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마무강이 히죽거리며 재빨리 잔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