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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13화)
제4장 수련 (3)


얼마의 시간이 지났고, 이지문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마무강이 조운비에게 술을 따라 주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꼬맹이치고는 술을 좀 하는구나.”
조운비가 게슴츠레한 풀린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 이 자느을 바드으면 다, 다시이는 꼬매이라고 아 하기로 해쓰읍니다.”
조운비가 내밀고 있는 잔은 쉬지 않고 흔들리고 있었고, 혀가 꼬여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으나 정신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조운비의 말마따나 마지막 잔이었다.
곧 쓰러질 듯 정신을 잃을 듯하면서도 조운비는 버텨 내고 있었다.
마지막 잔을 받은 조운비의 손이 흔들거리며 입가로 올라갔다.
잔이 입가에 부딪히며 잔 주위로 술이 이리저리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지문이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질끈 눈을 감았다.
‘술을 흘리면서 마셨으니 무효라고 해 볼까? 휴우, 내가 생각해도 추접하군.’
다시 눈을 뜬 이지문의 시선에 마지막 잔을 내려놓으며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몸이 기울어지고 있는 조운비의 모습이 보였다.
‘술 먹는 것도 독한 놈이로구나.’
“하하하핫! 지문, 자네의 조 공자님을 방으로 모시도록 하게.”
좌세량이 웃음을 터뜨리며 이지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제5장 혈귀 (1)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키를 넘어서는 수풀과 하늘을 뒤덮듯 솟아오른 나무들에 가려 태양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우거진 나무 사이로 힘겹게 스며든 몇 줄기 빛조차 칙칙하게 감겨드는 안개에 흩어지고 있었다.
조운비는 눈 밑으로 몇 겹의 천을 휘감은 채 힘겨운 걸음으로 이지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끈적거리며 몸에 들러붙는 열기와 습기에 그저 숨을 쉬기도 힘든 상황에서 두꺼운 천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으니 힘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사방을 뒤덮고 있는 검게 썩어 가는 낙엽에서 피어오르는 장독을 피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밤이 되면 장독이 밑으로 가라앉아 이동하는 것이 수월하기는 하겠지만, 우거진 숲은 한낮에도 주변을 살피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고 날이 저물면 한 치 앞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보고도 피하기 어려운 위험이 산재해 있는 밀림을 장독을 피하기 위해 눈앞도 구분하기 힘든 야간에 이동한다는 것은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나마 장독이 피어오르는 낮에 이동을 하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지옥 같은 곳이라는 이지문의 말을 가볍게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밀림으로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조운비는 말로 들은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이 얼마만큼의 차이가 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이 밀림에 혼자 들어섰더라면 벌써 몇 번은 목숨을 잃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우거진 숲 속을 희미하게 비추던 햇살조차 사라져 갈 무렵에 이지문의 발걸음이 조금 늦춰졌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한 번 훑어본 이지문이 얼굴을 감싸고 있던 천을 풀었다.
“장독 지대는 벗어났으니 천은 풀어도 되오, 조 공자.”
조 공자라는 말을 꺼내며 이지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조운비는 천을 풀어내며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강행군에 힘들기도 했지만 찌는 더위와 온몸을 휘감는 끈적임은 조운비를 더욱 빨리 지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조운비는 머릿속이 윙윙거리는 어지러움에 몸을 휘청거렸다.
“조금씩 들이마신 장독 때문이니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오.”
어지럼증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조운비가 조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전처럼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갑자기 그러시니 조금 어색합니다.”
이지문은 다시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괜한 소리에 괜한 내기만 하지 않았다면 이지문이라고 꼬맹이한테 조 공자니 하며 반 공대를 하고 싶겠는가.
하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주군인 좌세량과 약속을 한 일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이게 편하니 그런가 보다 하시오, 조 공자.”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낸 이지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걸음을 재촉하면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요.”
불만이라도 있는 이지문의 말투였지만, 뒤를 따르는 조운비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좌세량과 헤어져 따로 움직인 시기부터 무슨 이유인지 조 공자라 부르며 퉁명스럽게 대하기 시작한 이지문이었지만, 조운비를 챙기는 것에는 한 점의 소홀함도 없었고 밀림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를 가르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말이야 어떻든 그러한 이지문의 행동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조운비였다.
문뜩 조운비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밀림만 해도 이지문에게 듣고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끔찍했는데, 등천관이라는 곳은 어느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조운비가 생각을 떨치기라도 하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곳 또한 사람이 있는 곳이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면 나 또한 할 수 있는 것이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나 이지문이 걸음을 멈추었다.
걸음을 멈춘 이지문의 앞쪽으로 소로가 보였다.
인적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그동안의 길과는 달리 적지 않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길이었다.
걸음을 멈춘 이지문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조 공자, 이제 등천관의 초입이오. 내가 그동안 해 주었던 얘기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조운비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잠시라도 주의를 게을리 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오. 지금까지 밀림을 헤쳐 오면서 겪은 위험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오.”
이지문은 말을 끊고 잠시 조운비를 바라보았다.
단호하고 자신감 어린 표정의 조운비였으나 이지문의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조운비를 높게 평가한다고 해도 무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고심하던 이지문이 고개를 몇 번 젓다가 문뜩 무엇인가 떠오른 듯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품속에서 나온 이지문의 손에는 화려한 모양의 노리개 하나가 들려 있었다.
“등천관에 들어가거든 백리연이라는 아이를 찾아 이것을 전해 주시오.”
이지문은 노리개를 조운비에게 건넸다.
조운비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노리개를 받아 들었다.
이지문은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노리개는 자신의 외 조카 백리연이 등천관에 들기 전에 자신에게 맡겼던 것이다.
조운비의 자존심이 상할까 싶어 그저 전해 주라 했지만 자신의 외 조카인 백리연이 노리개를 받는다면 자신의 의도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백리연의 재질과 성품이라면 지금쯤 등천관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수준일 것이고 조운비에게 노리개를 들려 보낸 뜻을 짐작한다면 충분히 조운비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로에 접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패를 보이시오.”
걸음을 멈춘 이지문이 품속에서 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것만 한 은색의 패를 꺼내 들자, 흑의인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내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천마대 부대주를 뵙습니다.”
“관주께 안내하게.”
이지문의 말에 흑의인 한 명이 앞장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조운비는 왠지 모를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이지문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긴지 반각이 채 못 되어 조운비의 시선에 몇몇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수의 건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밀림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진 건물들이 전면의 평지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다.
이지문이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곳이 바로 등천관이오. 저 건물들이 있는 곳은 등천관의 관주와 교관들이 생활하며 등천관의 아이들을 관리하는 곳이고 저 건물들의 뒤쪽으로 펼쳐진 검은색으로 보이는 광활한 숲이 실제 등천관이라 할 수 있소.”
이지문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적지 않은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다시 보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지만 이지문이 어린 나이부터 이십 년을 생활했던 곳이니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건물들의 주변에는 몇 개의 화톳불들이 은은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고, 적지 않은 수의 흑의인들이 눈을 빛내며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빛을 빨아들이는 듯 느껴지는 검은색 숲의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들의 모습들은 무척이나 음산하게 보였다.
흑의인이 조운비와 이지문을 데리고 간 곳은 건물들의 중앙에 위치한 가장 넓은 건물이었다.
“안에 전갈을 하고 오겠습니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흑의인은 조운비와 이지문을 남겨 놓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지문은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조운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주님의 생각처럼 잘 견뎌 낼 것이라 믿소, 조 공자.”
말로는 잘될 것이라 하면서도 이지문의 얼굴에는 적지 않은 우려가 섞여 있었다.
솔직히 이지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좌세량의 이러한 처사를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조운비가 십중팔구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지금까지도 이지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연아를 만날 수만 있다면 살아날 확률이 삼 할 정도는 늘어나겠지만, 등천관 안에서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이지문은 조금은 안타까움이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곳까지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제가 그다지 미덥지 않아 부대주님께 심려를 끼쳐 드린 듯합니다.”
조운비가 정중히 포권을 하며 이지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지문은 조금은 당혹스러운 기분이 되어 그러한 조운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운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지문과 시선을 맞췄다.
입을 굳게 다물고 강렬함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운비의 시선에 이지문은 왠지 조금은 안도감이 드는 듯했다.
“제가 모자라기는 하지만 형님과 부대주님을 실망시켜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차분하고 진중한 조운비의 말에 이지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건물 안으로 혼자 들어갔던 흑의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관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조운비와 이지문은 흑의인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고, 잠시 걸음을 옮겨 관주의 집무실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섰다.
그리 크지 않은 방 안은 단순했지만 정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사각형의 탁자 뒤편에는 무인보다는 학자에 가깝게 느껴지는 백염백발의 노인이 붓을 들고 난을 치고 있었다.
일행이 방으로 들어선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노인은 여전히 붓을 놀리는 데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노인이 붓을 놓고 고개를 들자, 이지문이 고개를 숙였다.
“관주님을 뵙습니다.”
정중한 이지문의 인사에 노인이 가볍게 미소를 떠올렸다.
부드럽게 느껴지는 미소였으나 조운비는 노인의 웃음이 왠지 차갑게 느껴졌다.
기묘한 이질감에 노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본 조운비는 그러한 느낌의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노인의 눈빛이 너무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여전히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웃음을 지은 채 이지문을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이군. 천마대의 부대주가 되었다고 들었지. 그래, 이곳은 어쩐 일인가? 다시 오고 싶지는 않았을 터인데.”
“대주님의 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왠지 떨떠름한 느낌이 드는 이지문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공자가 무슨 일로?”
노인이 시선을 돌려 조운비를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혹 저 녀석하고 관련이 있는 일인가?”
조운비는 노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왠지 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볍게 움츠렸다가 곧 머릿속을 파고드는 반발심에 노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았다.
“허허, 꽤 대가 센 녀석이로군그래.”
노인은 잠시 이채롭다는 눈빛을 띠었으나 곧 차분한 표정이 되어 이지문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주님께서 이 아이를 등천관의 과정에 넣으라 하셨습니다.”
노인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말인가?”
“네, 그러합니다.”
노인은 여전히 의문스럽다는 기색으로 걸음을 옮겨 조운비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야, 이름이 무어냐?”
조운비는 노인이 다가서자 자꾸 뒤로 물러서고 싶어지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조운비라 합니다.”
노인은 그러한 조운비의 모습에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잠시 네 몸을 만져 볼 것이니 가만히 있도록 하여라.”
노인은 말과 함께 양손으로 조운비의 몸을 한동안 더듬듯 만져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빼어난 자질이기는 하지만 상승의 무공을 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싶은데. 이 아이가 이공자에게 무슨 죄라도 지은 것인가?”
이지문은 노인의 물음에 난감한 기색이 되었다.
노인의 말은 현 상태로 등천관에 들어가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에 불과했다.
이지문 또한 노인의 생각과 다를 바 없어 좌세량의 처사를 납득하기 어려웠으니 무어라 말을 하기도 애매했다.
“조 공자는 대주님을 형님이라 부릅니다.”
이지문의 대답에 노인은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이 정도 자질의 아이가 이공자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등천관에 들지 않아도 그 성취가 등천관을 나온 아이들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인데, 십중팔구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등천관으로 보낸다? 이공자는 대체 이 아이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
노인은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노인이 고개를 돌려 이지문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원래 그 아이의 자질이 아까워 아무리 이공자의 부탁이라 하여도 등천관에 넣어 주지 않으려 했는데 이러한 상황이고 보니 궁금증이 생기는군그래. 그저 운을 보자는 것인지, 그 아이에게 나는 찾지 못했으나 이공자는 찾아낸 무엇인가 특별한 점이 있는 것인지 말일세. 좋네, 그 아이를 등천관의 과정에 넣도록 하지.”
노인은 걸음을 옮겨 탁자 옆에 늘어져 있는 붉은색 줄을 가볍게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