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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14화)
제5장 혈귀 (2)


얼마 지나지 않아 흑의인이 방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진 교관을 이리로 오라 이르게.”
노인의 차분한 말에 흑의인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벗어났다.
이지문은 문뜩 무엇인가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관주님, 혹시 진 교관이라는 자가 진충 아닙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아는 진충이 맞을 것이네. 아마 자네하고 동기였지.”
노인은 말을 하며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띠웠다.
이지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며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순간, 방문이 열리며 얼굴의 반이 커다란 검상으로 뒤덮여 있는 중년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방으로 들어서며 관주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말을 꺼냈던 중년인이 방 안에 있는 이지문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게 누군가? 잘나가는 천마대의 부대주가 이곳까지 무슨 일로 발걸음을 하신 것인가?”
중년인은 싸늘한 목소리를 내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지문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노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진 교관, 동기와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고 그 아이에게 간단히 등천관의 생활에 대해 설명해 주고 수련 지역으로 보내도록 하게.”
진충은 노인의 말에 솟아오르는 분기를 억누르며 이지문을 향해 강렬한 살기를 한 번 쏘아 내고는 몸을 돌렸다.
“조운비라 했느냐? 너는 진 교관의 뒤를 따르도록 해라.”
진충이 들어선 후 묘해진 분위기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던 조운비는 노인의 말에 이지문을 향해 한번 시선을 옮겼다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진충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운비가 방을 벗어나자, 이지문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관주님, 무슨 의도로 진충을 부르신 겁니까? 진충이 지금도 제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지문이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자, 노인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감히 나한테 따지기라도 하는 것이냐?”
가라앉은 노인의 목소리에 이지문은 어깨를 가볍게 떨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충은 그 아이가 저와 같이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아이를 곱게 보지 않을 겁니다. 관주님도 그러한 것을 모르지 않으실 것인데 왜 하필 진충이냐는 것이지요.”
노인은 몸을 돌려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쉽게 죽을 녀석이라면 조금 더 버틴다고 해도 어차피 죽는다. 살 만한 녀석이면 어찌하든 살겠지.”

진충은 이지문을 보고 난 후에 솟아오르기 시작한 분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검상이 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오는 것 같은 기분에 진충은 손을 들어 검상을 어루만졌다.
문뜩 진충의 붉게 충혈된 눈에 살기가 솟아올랐다.
‘언젠가는 기필코 이 검상의 대가를 받아 내고야 말 것이다, 이지문.’
간신히 살아남기는 했으나 거의 죽을 뻔했고, 한쪽 눈을 영원히 사용할 수 없게 만든 검상이었다.
구 년 전 이지문이 자신에게 만들어 준 상처였고, 자신이 신교로 가지 못하고 이 구석지고 음습한 곳에 처박혀 있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한동안 분기에 사로잡혀 있던 진충의 머릿속에 문뜩 뒤따르는 조운비가 떠올랐다.
“너는 이지문과 무슨 관계냐?”
갑작스러운 진충의 물음에 조운비는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언뜻 상황을 생각해 봐도 진충이라는 교관은 이지문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니 쉽게 입을 열기가 망설여졌던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조운비가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데려다 주신 분입니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고 명확한 답변 또한 아니었다.
진충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을 꺼낼까 하다 고개를 저었다.
‘제 녀석이 뭐라고 하든 같이 오지 않았는가.’
굳이 이지문과의 관계에 대해서 더 캐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이지문과 같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놈과 같은 자리에서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조운비에 대한 진충의 감정은 충분히 나빠져 있었다.
“너는 지금 바로 수련 지역으로 가게 될 것이다. 열흘마다 무공 수업이 있으니 그때만 이곳으로 오면 되고 다른 것들은 알아서 하면 된다.”
진충의 뒤를 따르던 조운비의 시야에 검은빛을 띠고 있는 음산한 분위기의 숲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무공 수업을 한 것이 언제입니까?”
“오늘. 조금 전에 끝났다.”
진충은 귀찮다는 기색으로 말을 내뱉었다.
숲의 바로 앞까지 걸음을 옮긴 진충이 손을 들어 숲을 가리켰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진충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는 진충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조운비는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진충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숲으로 시선을 향했다.
‘진충이라는 자가 부대주님에 대해 악감정이 큰 듯하구나. 알려 주어야 할 것을 거의 알려 주지 않은 듯한데.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부딪혀 보는 수밖에.’
한동안 난감한 표정으로 숲을 바라보던 조운비는 이내 결심을 한 듯 숲을 향해 단호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운비가 숲으로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세 명의 여자 아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못 보던 아이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입고 있던 옷도 이곳의 옷이 아니었어.”
가장 작은 몸집에 커다란 눈이 귀엽게 보이는 여자 아이가 먼저 말을 꺼내자, 뒤쪽에 서 있던 눈썹이 가늘고 눈이 날카롭게 생긴 여자 아이가 말을 받았다.
“등천관에 중도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은데. 특이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곧 죽을 녀석이니 상관할 바는 아니겠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진 교관이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이 아니면 혈귀의 구역으로 들여보냈을 리가 없어.”
몸집이 작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뭣 때문에 진 교관에게 그렇게 밉보였을까? 아까 보니 빈손에 기본적인 물품들도 없는 것 같던데. 연 언니, 한번 따라가 보면 안 될까?”
아이의 말에 무표정하게 숲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던 여자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옥으로 조각하기라도 한 듯 아름다운 얼굴에 얼음을 덧씌우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운 표정의 여자 아이였다.
“영령, 너는 언젠가 그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크게 당하는 날이 있을 거야. 가현이 말 못 들었어? 저곳은 혈귀의 구역이야.”
진영령은 백리연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알아. 아니까 따라가 보자고 한 거야. 우리 매영단에서도 혈귀한테 당한 아이들이 꽤 되잖아. 아까 그 아이를 미끼삼아서 우리가 혈귀를 잡는 거야. 어때?”
진영령의 말에 이가현은 고개를 돌리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백리연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너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는구나. 매영단이 혈귀를 상대할 힘이 없어서 지금까지 혈귀를 내버려 두었다고 알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겠지?”
백리연의 추궁 섞인 목소리에 진영령은 큰 눈을 몇 번 껌벅거리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조운비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푹푹 빠져 드는 수렁 같은 길은 조운비에게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조운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찡그렸다.
‘원래 숲 자체가 이러한 수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가?’
조운비는 신경을 집중하여 최대한 주변을 살폈다.
검은빛이 감도는 울창한 나무들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었고 숲의 바닥은 썩어 가는 나뭇잎들로 마치 늪처럼 보였다.
바닥에는 날이 저문 탓에 가라앉은 듯 보이는 뿌연 장독이 깔려 있었다.
‘이런 곳에서 어찌 사람이 산단 말인가?’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안전한 곳을 찾아야겠군.’
조운비는 등천관에 이르기까지 이지문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되새기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등천관의 수련 지역이라 칭하는 숲은 태반이 늪과 수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늪과 장독만으로도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 상식을 초월하는 독충들과 독물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 바로 등천관의 수련 지역인 것이다.
울창한 수림 사이를 간헐적으로 비추어 주변을 어렴풋이 밝히고 있는 석양마저 사라진다면 이 검은 숲은 본격적으로 조운비의 생명을 노릴 것이 분명했다.
조운비는 조금 다급해진 심정으로 안전해 보이는 지역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울창한 검은 숲은 곧 무엇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스산함과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기이할 정도의 고요 속에서 걸음을 옮기던 조운비는 문뜩 머릿속을 스치는 이질적인 감각에 몸을 세웠다.
‘근처에 무엇인가가 있다.’
조운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해심결을 익히기 전이라면 느끼기 힘들 정도의 미미한 기척이었으나 분명 착각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한 조운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자가 보았다면 주변을 살피기 위해 잠시 머뭇거린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모습이었다.
다시 몸을 움직이는 조운비의 모습에서는 길을 찾기 위한 조심스러움 이외에 다른 긴장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조운비는 온몸의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조금 전에 느꼈던 기척을 감각에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오른쪽 후방 오 장 정도.’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자신을 뒤따르고 있었다.
감각적으로는 느껴지고 있었지만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두리번거리는 척하며 시선을 돌려도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겉으로 표시를 내고 있지는 않지만 신경을 있는 대로 곤두세우고 있는 조운비의 미간에 한 줄기 땀방울이 맺혔다.
‘사람이다. 맹수가 저러한 은신술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니.’
조운비의 머릿속은 쉬지 않고 회전하고 있었다.
등천관의 아이들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적아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떠한 대처를 해야 할 것인지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운비는 다시 주변을 한번 둘러보며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적으로 판단하고 싸움에 유리한 지형을 찾는다.’
짧은 고민 끝에 내린 조운비의 결론이었다.
혹시 자신에 대한 악의가 없다고 해도 명확하지 않은 그러한 기대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상대의 수준을 짐작하기 어려우니 제압을 시도한다는 것도 모험이었다.
‘유리한 위치를 찾아서 일격에 치명상을 입혀야 한다.’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피던 조운비의 눈동자가 가볍게 번뜩였다.
찾고 있던 형태의 지형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기형적인 모양으로 기울어진 거목이 시선에 들어왔다.
거대한 뿌리 한쪽이 바닥을 뚫고 조운비의 허리 정도의 높이까지 솟아올라 있었고 나무의 뒤편은 급한 내리막을 이루고 있었다.
천천히 나무뿌리 앞까지 다가선 조운비가 나무뿌리를 넘으려는 듯 손을 짚었다.
그리고 나무뿌리를 가볍게 타넘은 듯하던 조운비의 몸이 갑자기 사라졌다.
나무뿌리를 넘으며 몸을 숙이고 구르듯 옆의 거목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조운비는 거목에 등을 붙인 채 숨소리마저 죽이고 소리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뒤따르던 자의 움직임이 멈춘 것이 조운비의 감각에 잡혔다.
‘뒤따르지 않고 멈추다니 눈치를 챈 것인가, 그저 주의를 하는 것인가?’
조운비는 긴장된 표정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그리고 일각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내가 숨은 것은 알아챘으나 어디에 숨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상대방이 움직이지 않는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조운비가 그저 내리막으로 내려갔다고 생각했다면 상대는 곧 뒤를 따랐을 것이고, 조운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면 어떠한 행동이라도 했을 것이다.
‘끈기의 싸움이다. 먼저 움직이면 당할 위험이 크다.’
조운비는 몸의 근육을 조금씩 이완시키며 긴장을 약간 늦췄다.
적지 않은 시간을 소모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지나친 긴장감은 몸을 굳게 하고 심력을 낭비하게 만든다.
느긋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던 조운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상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저 움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명확한 기척까지 느껴졌다.
‘사 장, 삼 장……. 은신을 하지 않고 그냥 걸어오고 있다.’
이제는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까지 분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어이, 처음 보는 친구. 그만 나오지 그래? 등천관에 누군가 새로 들어오는 경우는 처음이라 호기심에 뒤따랐던 거야. 쓸데없이 서로 심력 낭비할 필요 없잖아.”
웃음기 어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운비의 얼굴에 잠시 갈등의 기색이 떠올랐으나 곧 사라졌다.
이지문에게 들은 등천관은 그다지 사람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등천관에 대해서 안 좋은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나? 이봐,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야. 너무 의심만 하지 말고 잠깐 나와 봐. 내가 뒤로 좀 물러설게. 그러면 같은 조건이잖아. 공격하려고 했으면 뒤쫓을 때 벌써 덮쳤을 거야.”
말과 함께 상대가 삼 장 정도 뒤로 물러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하하! 너무 소심한 거 아니야? 간이 콩알만 해지기라도 한 건가?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떻게 등천관에 온 거야?”
조운비는 상대의 도발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상대의 말마따나 지금 밖으로 나선다면 같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계속 몸을 숨기고 있으면 상대의 소심하다는 말에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잠시 고민에 휩싸인 조운비에게 다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나는 그저 바깥소식이 궁금한 것뿐이야. 칠 년간이나 이곳에 틀어박혀 있어서 밖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다고. 얼굴 좀 보면서 얘기하지? 너도 등천관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적지는 않을 거 아냐. 서로 정보 교환이나 좀 하자고.”
묘한 울림을 가진 설득하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간절하게 조운비의 귓속으로 파고들었고, 조운비는 잠시 멍한 기분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나서려다 섬뜩한 느낌에 간신히 몸을 세웠다.
조운비의 심장은 놀람과 당혹감으로 쿵쾅거리고 있었고,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사술이다. 음공을 이용한 사술.’
묘한 울림이 섞인 목소리에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려 하던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자, 조운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망친 건가? 하하하핫! 정말 재미있는 사냥감이 아닌가? 제 스스로 내 영역으로 들어온 것을 귀엽게 여겨서 쉽게 죽여 주려 했더니 감히 나를 놀려? 하하하핫! 곧 잡아서 자근자근 저며서 죽여 주도록 하마.”
서릿발처럼 차갑고 광기 어린 목소리가 조운비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