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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15화)
제5장 혈귀 (3)


조운비는 상대의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은 웃음소리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웃음소리에 음공이 섞여 있다. 도망쳤다고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의심에 음공을 사용하여 기척을 유도하는 것인가.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전부 저 녀석 같은 건가?’
상대의 기척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대는 조운비가 근처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은 버린 듯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나무뿌리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조운비의 얼굴에 다시 갈등의 기색이 어렸다.
상대는 조운비가 도주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조심스럽게 은신하고 있으면 그냥 지나쳐 갈 수도 있었다.
기척이 나무뿌리 있는 곳까지 다가오자, 조운비는 입술을 깨물며 눈빛을 번뜩였다.
‘당장은 눈을 피한다고 해도 곧 속은 것을 알고 되돌아올 것이다. 기회가 생겼을 때 잡는 것이 낫다.’
조운비는 검을 쥔 손에 가볍게 힘을 주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검은 그림자가 스치듯 나무뿌리를 넘는 것이 조운비의 시선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조운비의 몸이 튕기듯 검은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고, 번뜩이는 검 끝이 그림자의 등을 파고드는 듯 보였다.
채앵!
그림자의 등을 파고드는 듯하던 조운비의 검이 튕기듯 옆으로 밀려났다.
조운비는 거의 완벽한 기회를 노린 암습을 막아 내는 상대의 모습에 일순 당혹감을 느꼈으나 재차 상대를 향해 검을 찔러 갔다.
채쟁! 챙챙!
연속적으로 찔러 가는 조운비의 쾌검을 상대방은 어느새 빼 든 두 자루의 단검으로 가볍게 쳐 내고 있었다.
몇 번 더 조운비의 검을 쳐 낸 검은 그림자가 튕기듯 이 장 정도 뒤로 물러섰고, 조운비도 몸을 세웠다.
뒤따라가며 공격을 한다고 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긴장된 자세로 검 끝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조운비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대다. 어찌해야 하는가? 도주하기도 이미 늦었다. 몸을 날리는 순간 등 뒤로 검을 받게 될 것이다.’
조운비의 삼 장 정도 앞에 서 있는 상대의 얼굴에서 문뜩 하얀빛이 떠올랐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음을 짓고 있는 상대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번뜩이는 눈빛의 소년은 조운비보다는 한두 살 정도 많은 나이로 보였다.
소년은 길고 얄팍하여 냉혹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눈매에 싸늘한 웃음을 띠고 조운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큭큭, 감히 나를 암습했다는 말이지?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내가 뒤쫓는 것을 알아챌 정도의 감각에 내 눈을 속일 정도의 은신술을 가지고 그렇게 허술한 검법이라니. 풋,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네 녀석의 신법과 검법이 조금만 더 뛰어났다면 내가 죽었을 것이 아닌가?”
얄팍한 눈매의 소년이 문뜩 눈을 크게 뜨며 손등으로 이마를 가볍게 쓸었다.
“오호, 이게 뭐야? 식은땀 아니야? 하하하핫! 정말 대단해.”
소년은 아랫배를 손으로 감싸며 대소를 터뜨렸다.
“식은땀이라니, 이 혈귀가 식은땀이라니. 푸하하핫!”
한동안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던 혈귀라는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혈귀의 충혈된 눈동자에 붉은빛이 떠올랐다.
광기 어린 눈빛을 한 혈귀는 입가에 잔인한 느낌이 들 정도의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어둠 속에서 혈귀의 하얀 치아가 번뜩였다.
“크큭.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잊지 못할 만큼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뱀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단검을 들고 혀를 내밀어 검날을 핥는 혈귀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혈귀는 양손에 든 단검을 장난하듯 손 위로 돌리며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내공에 있어서도 모자라지는 않지만 낫다고 볼 수는 없는 데다 초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크다.’
고심을 해 봐도 대책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천마신단과 고해심결의 덕으로 내공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등천관에서 처음 부딪친 혈귀라는 아이는 기연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자신과 비교해도 거의 손색이 없을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무공의 수준에 있어서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차이가 느껴졌다.
조운비가 염두를 굴리는 와중에도 혈귀는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와 여유 있어 보이는 걸음걸이는 조운비를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조운비는 긴장된 표정으로 물러서려는 듯 오른발을 뒤로 뺐다.
겁을 먹었다고 느낀 듯 혈귀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지자, 조운비는 뒤로 뺀 오른발에 진기를 싣고 땅을 박차며 튕겨 나가듯 몸을 날렸다.
‘선기를 잃는다면 실낱같은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조운비는 전력을 다한 뇌전비를 펼치며 섬전처럼 검을 찔러 갔다.
이지문에게 배워 등천관에 들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연마하던 쾌검이었다.
번뜩이는 검날이 혈귀의 얼굴을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얼굴을 향한 공세가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생각하여 혈귀의 다급한 대응을 유도하려는 의도를 지닌 허초였다.
검을 찔러 가던 조운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검 끝이 얼굴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혈귀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발견했던 것이다.
‘오히려 유인을 당한 것인가?’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조운비는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써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에 쓰러지듯 몸을 비틀었다.
“크윽!”
조운비의 오른쪽 어깨에는 어느 틈엔가 혈귀가 들고 있던 단검이 자루만을 밖으로 내민 채 박혀 있었다.
조운비는 몸을 비틀던 채로 쓰러지며 두 번 연속으로 바닥을 굴러 몸을 일으켰다.
어깨의 통증을 견뎌 내며 두 손으로 간신히 검을 들어 자세를 잡고 있는 조운비의 눈에 원래의 자리에 서서 히죽거리며 단검을 돌리고 있는 혈귀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하핫! 멋진 나려타곤이 아닌가. 네 녀석은 아무래도 대단한 기인의 가르침을 받은 듯하구나. 검법보다 굴러다니는 법에 더욱 심혈을 기울인 가르침이라니, 정말 독특하지 않은가. 푸하하핫!”
조운비는 혈귀의 조롱에 분노가 일었으나 머릿속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검을 보고 비도술을 익힌 것을 짐작했어야 했는데.’
처음 암습을 막을 때 두 개의 단검을 사용한 쌍검술이 너무 빼어났던 탓에 판단을 잘못했던 것이다.
혈귀는 조운비를 조롱하며 가지고 놀 생각인지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히죽거리고 있었다.
실상 지금까지 보여 준 혈귀의 능력으로 조운비가 몸을 굴릴 때 단검을 날렸거나 연속으로 공격을 했다면 조운비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네 녀석이 굴러다니는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더구나. 그 멋진 나려타곤을 다시 한 번 보여 준다면 살만 저며 내고 힘줄은 뽑지 않도록 하마. 어떠냐? 정말 괜찮은 조건이 아니냐?”
혈귀는 무척이나 진지하다는 듯이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문지르며 물었다.
조운비의 대답이 없자, 혈귀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혹시 너는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아니지, 아니야. 바닥이나 굴러다니는 놈 따위가 감히 내말을 믿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혈귀는 잠시 기분이 상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저으며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은 양심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냐? 첫 거래에서부터 그렇게 욕심을 부려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힘줄을 뽑지 않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나는 정말 많이 양보를 한 것이다.”
조운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내 욕심이 과했다 싶소. 내가 당신의 조건을 따른다면 몇 번을 굴러야 하는 거요?”
조운비의 말에 혈귀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조롱에 조운비가 그런 식으로 대응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혈귀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 조운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라고 했으니 조금 전과 같이 두 번을 구르면 될 듯하구려.”
조운비는 혈귀가 무어라 대응을 하기도 전에 몸을 굴렸다.
혈귀가 단검을 날리면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신을 쉽게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려고 한다는 생각에 조운비는 모험을 걸었다.
‘최대한 거리를 좁혀 이 부대주님께 배운 구명절초를 사용하고 결과에 상관없이 도주한다. 큰 상처를 입히지는 못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거리만 벌리고 은신한다면 쉽게 잡히지는 않으리라.’
조금 전에도 숨어 있는 자신을 찾지 못했으니 당장 지금의 자리만 모면할 수 있다면 자신의 감각과 은신술로 숨어 다니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었다.
몸을 굴리자 조운비의 등이 적나라하게 혈귀의 시야에 노출됐다.
혈귀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서넛의 단검을 조운비의 등에 박아 넣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혈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슈욱!
몸을 굴리던 조운비에게서 섬전 같은 흰빛이 혈귀를 향해 날아갔다.
조운비가 몸을 굴리며 혈귀의 시선을 피해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을 뽑아서 날린 것이다.
혈귀는 손에 들고 있던 단검으로 어렵지 않게 조운비가 날린 단검을 쳐 냈으나 곧 뒤따르는 검광에 뒷걸음을 하며 양손에 쥐고 있는 단검을 휘둘렀다.
혈귀를 뒤쫓는 조운비의 검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떠오르며 검세가 셋으로 갈라졌다.
이지문이 구명절초로 사용하라고 가르친 혈삼성이라는 초식으로 원래 검에서 붉은빛이 나지만 태허심공의 영향으로 조운비가 시전할 때는 청광이 떠올랐다.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혈귀의 눈빛에 당혹감이 떠오르며 두 개의 단검이 그물처럼 혈귀의 전면을 뒤덮었다.
파팡팡!
철로 만든 두 가지 무기의 충돌임에도 쇳소리가 아닌 가죽으로 만든 북이 터지는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크윽!”
“큭!”
두 마디 신음 소리가 들리고 조운비의 몸이 뒤로 튕겨 나오며 그대로 땅을 박차고 숲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두 걸음 정도 밀려나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혈귀의 입가에는 가는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큭큭큭, 푸하하핫!”
잠시 가슴을 잡고 있던 혈귀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곧 웃음을 멈춘 혈귀가 손등으로 입가를 한 번 쓸고는 손등을 바라보며 광기 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피, 피잖아! 푸하하핫! 벌레 같은 놈이 감히…….”
혈귀는 손등을 들어 묻어 있는 피를 혀로 핥으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벌레 같은 놈이 주제를 모르고 살아 보겠다고 내 피를 보게 만들어? 그래, 네놈이 원하는 대로 살려 주도록 하마. 팔다리를 잘라 몸통으로 굴러다니면서 등천관이 끝날 때까지 매일매일 지옥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도록 해 주겠다, 하하하핫!”
혈귀는 눈에서 붉게 물든 살기를 뿜어내며 천천히 조운비가 몸을 날린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혈귀의 모습이 수풀에 가려 사라지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장내에 세 명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그 녀석 제대로 배운 무공도 없는 것 같은데 혈귀를 저 정도로 상대하고 도주까지 하다니 꽤 대단한 녀석 아냐! 그치? 따라오기를 잘한 것 같지?”
진영령이 놀랍지 않느냐는 듯이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백리연과 이가현을 번갈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이가현이 웃기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너는 정말 생각이라는 걸 하는지 모르겠다.”
이가현의 말에 진영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기분 나쁘다는 듯 뾰족한 목소리를 냈다.
“왜 또 그러는데? 본 거 그대로잖아. 뭘 또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혈귀가 일방적으로 그 녀석을 가지고 논 거야. 뭐, 마지막에 한 공격이 의외이기는 했지만.”
이가현의 말에 진영령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만 굴렸다.
“휴. 너, 혈귀가 단검에 언제나 혈망사의 독을 바르고 다닌다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거니? 혈귀는 처음에 그 녀석에게 상처를 입히고 조롱하는 척하면서 독이 퍼질 때까지 기다린 거야. 독이 퍼져서 쓰러지면 그 잔악한 취미를 즐기려고.”
한심하다는 투의 이가현의 말에 진영령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쳇, 그래도 어쨌든 내 의견대로 따라와서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잖아. 연 언니, 내 말대로 하길 잘했지?”
진영령은 이가현과 더 이상 말을 하기가 싫은지 백리연을 향해 말을 건넸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때부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리연은 여전히 골몰히 생각에 잠겨 진영령의 물음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연 언니!”
진영령이 언성을 조금 높이자, 백리연이 시선을 돌렸다.
“뒤쫓아 가자.”
고개를 돌려 진영령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던 백리연이 몸을 돌려 신법을 펼쳤다.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숙부님의 혈삼성과 비슷했어. 푸른빛이 나는 것이 조금 의아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확인을 해 보는 것이 좋겠어.’
진영령과 이가현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진영령이 우겨서 이곳으로 들어오기까지 계속 돌아갈 것을 종용하던 백리연이 갑자기 뒤를 따르자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영령과 이가현은 곧 백리연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조운비는 숲으로 뛰어들어 채 백 장을 가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세웠다.
초식이나 운용의 차이는 컸지만 내공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생각에 내상을 입을 정도로 전력을 다해 검을 부딪쳤던 조운비였다.
자신의 예상과 그리 어긋나지 않는 상황에 어느 정도 안도감을 가졌던 조운비는 갑작스럽게 온몸을 죄어 오는 고통과 뇌가 흔들리는 듯한 심한 어지럼증에 당혹감을 느끼며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