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현월비화 1권 (16화)
제5장 혈귀 (4)


‘내상이 생각보다 심하다 생각했더니 단검에 독이 있었던 것인가?’
조운비는 세상이 도는 듯 심한 어지러움을 간신히 견뎌 내며 지나온 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렴풋이 혈귀로 보이는 흑의인의 모습이 보였다.
‘숨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에 혹 숨는다고 해도 저자의 눈을 속일 정도의 은신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인가?’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조운비가 힘겹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어찌 살아났는데……. 아직 옥화를 찾지도 못했는데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해심결을 익혀서인지 고통은 견딜 만했지만 굳어 가는 몸과 사라져 가는 의식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조운비의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끊어지려는 의식의 끝자락을 간신히 잡으며 조운비는 고해심결을 떠올렸다.
‘고해심결이라면 어쩌면 독 기운을 조금은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사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냥 죽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을 바닥에 완전히 떨어뜨린 조운비의 눈에서 잠시 진한 살기가 번뜩였으나 곧 내려진 눈꺼풀 속으로 사라졌다.

혈귀는 하얀 치아를 내보이는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던 혈귀의 눈동자에 잔인해 보이는 혈광이 번뜩였다.
쓰러지고 있는 조운비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던 것이다.
“큭큭큭! 네 녀석은 특별히 내 보금자리까지 데리고 가도록 하지. 아, 혈망사의 독에 중독되었으니 곧 죽는다고? 아니지, 아니야. 내가 네 녀석에게는 특별히 해약을 주도록 하마. 하하하핫!”
혈귀는 두 팔을 가볍게 옆으로 벌리며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아아, 이렇게나 자비로울 수가! 절대로 죽지는 않게 해 줄 것이니 마치 부처와 같은 마음이 아닌가.”
혈귀는 광기 어린 목소리로 계속 무어라 지껄이며 조운비를 향해 다가갔다.
혈귀는 쓰러져 있는 조운비의 삼 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보게, 당나귀 친구. 정말 정신을 잃은 것인가? 혹시 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혈귀는 영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아, 쉽지 않아. 정말 쉽지가 않아. 조금 전에 말했듯이 나는 원래 부처와 같이 자비로운 사람인데 자네가 나를 자꾸 악하게 만들고 있다네. 당나귀 친구, 자네가 나를 계속 속이고 기만하지 않았다면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을 것이 아닌가? 정말 서글픈 생각이 드는군.”
혈귀는 안타깝다는 듯이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혈귀의 손에서 하얀빛이 섬전처럼 조운비를 향해 날아갔다.
퍼억!
조운비의 왼쪽 어깨에 하나의 단검이 박혔고, 곧 붉은 핏물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정말 괴롭기 그지없군. 하지만 당나귀 친구, 자네는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네. 이것은 자네가 나를 속이려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자네는 오히려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네. 혹시 깨어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게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것이 어떤가?”
조운비는 대답은커녕 어깨에 단검이 자루만 남긴 채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꿈틀거리는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혈귀가 다시 광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귀는 조운비에 대한 의심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아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속을 썩이는 상대였던 것이다.
심각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자신의 성격이 아니었다면 적지 않은 손해를 보았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순간적인 임기응변이 뛰어났고 독하기까지 한 놈이었다.
‘혈망사의 독에 당한 상태에서 내상까지 입고도 백 장 가까이 도주를 하다니 상식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운 놈이 아닌가.’
혈망사의 독이 촌각에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절대적인 독은 아니지만 시야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어지러움과 상상을 초월한 고통, 심각한 마비 증상은 순식간에 독에 당한 사람을 쓰러뜨린다.
누군가를 그냥 죽이는 것보다 잔인한 고문으로 정신을 망가뜨린 후 죽이는 취미가 있는 혈귀가 상대를 생포하기 위해 애용하는 독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고 독한 녀석이라고 해도 혈망사의 독에 당하면 이십 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 정상인데, 저놈은 도대체…….’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던 혈귀가 씩 웃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조운비의 오른쪽 무릎에 또다시 한 자루의 단검이 파고들었다.
‘뭐,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잖아. 혹시 깨어 있다고 해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지.’
혈귀의 손이 다시 움직이자 조운비의 왼쪽 무릎에 단검이 박혔다.
순식간에 조운비의 온몸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혈귀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단검을 하나 꺼내어 손 위로 돌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단전에는 내가 직접 박아 주도록 하지.’
혈귀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조운비의 옆으로 다가서며 역수로 단검을 잡아 조운비의 단전을 향해 내려찍었다.
챙!
혈귀는 갑작스럽게 날아든 비도를 쥐고 있던 단검으로 후려치며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어떤 놈이 감히 내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냐?”
혈귀는 눈동자에 혈광을 피워 올리며 분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날아든 비도로 인해 혈귀의 시선이 잠시 돌아간 순간,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조운비의 상체가 튕기듯 일어서며 섬전처럼 검을 휘둘렀다.
“커, 허억!”
혈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며 턱이 떨어지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혈귀가 조운비를 보려는 듯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거의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혈귀의 상체가 서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상체가 기울어지고 있음에도 혈귀의 두 다리는 바닥을 굳건히 밟고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혈귀의 상체가 자신의 다리 옆으로 떨어지며 잘려진 상체와 하체에서 동시에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회색빛이 감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러한 모습을 힘겹게 바라보던 조운비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큭, 쿨럭!”
밭은기침과 함께 조운비의 입에서 선홍색 피가 쏟아져 나왔다.
적지 않은 내상에 독에 중독까지 된 상황에서 최소한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진원의 손상까지 감수하며 검을 휘두른지라 심각한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조운비는 온몸의 기운이 급격히 쇠잔해 가는 감각을 느끼며 힘겹게 눈을 껌벅거렸다.
‘이제 죽는 건가? 안 돼.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해.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조운비는 자꾸만 늘어지려고 하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데 온몸의 힘을 다 쏟아 부었다.
그러한 조운비의 눈앞에 검은색의 무엇인가가 아른거렸다.
“아까 네가 사용한 검식이 혈삼성이 맞느냐?”
싸늘하면서 조금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조운비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조운비는 멍한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안개에 가로막힌 듯 뿌연 조운비의 시선에서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며 조운비의 명문혈을 통해 따스한 기운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너는 숙부와 무슨 관계지? 아니, 이지문이라는 사람과 무슨 관계지?”
백리연은 목숨이 경각에 이른 듯한 조운비의 모습에 다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백리연의 도움에 잠시나마 정신이 드는지 조운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수, 숙부? 다, 당신이 백리……. 크, 쿨럭! 내, 내 품속에, 쿨럭!”
말 몇 마디와 함께 몇 번의 밭은기침을 하던 조운비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백리연은 서슴없이 정신을 놓은 조운비의 품속을 뒤적거렸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백리연의 손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노리개 하나가 들려 나왔다.
“이건 내가 숙부님께 드린 노리개인데…….”
노리개를 보며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떠올리던 백리연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정신을 잃은 조운비를 바라보고 있던 백리연이 복잡한 심사가 드러나는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재미있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진영령과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가현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설마 데려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이가현의 싸늘한 목소리에 백리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가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너와 무슨 연관이 있는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혈귀를 죽였어.”
이가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진영령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 사람은 우리밖에 없잖아. 우리만 모른 척하면 되는 거 아냐?”
이가현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 꼬리를 말았다.
“어차피 곧 드러날 일이야. 혈귀가 사라진 것은 며칠 지나기 전에 알려질 테고 곧 귀무단에서 저 녀석을 찾기 시작할 거야. 진 교관이 저 녀석을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사실도 곧 알게 될 테니까.”
“이 아이를 살려야겠어.”
단호하고 냉정한 목소리에 진영령과 이가현은 시선을 돌렸다.
백리연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제정신이야? 당장 그 녀석을 죽이고 흔적을 지워야 해.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귀무단 녀석들이 알기라도 하면 매영단과 귀무단의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어.”
이가현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분기 어린 표정으로 백리연을 쏘아봤다.
말이야 흔적을 지우자고 했지만 귀무단이 아닌 누구라 해도 혈귀가 등 뒤에서 검을 맞아서 죽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백리연이 비도를 날리지 않았으면 저 녀석이 암습을 했다고 해도 혈귀는 죽지 않았어.’
혈귀는 현재 등천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귀무단의 단주인 사무린의 친동생이었다.
사무린이 가볍게 넘어가려고 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숨기고 흔적을 지운다고 해도 집요하게 추적할 것이고, 도와준 사람이 없으면 만들어 내기라도 할 인간이었다.
자존심 강한 사무린이 자신의 동생이 일대일의 상황에서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할 리 없었다.
‘혈귀의 시신이 발견되면 분명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계속 탐문을 한다면 저 녀석이 이곳으로 들어설 때쯤에 우리가 무각에 들른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가현이 입술을 깨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사무린이 우리를 재물로 삼으려 한다면 단주는 귀무단에 우리를 내주고서라도 충돌을 피하려고 할 거야.’
매영단의 단주인 소은령의 모습을 떠올린 이가현은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돌아가서 단주에게 백리연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고 하면 될 거야.’
이가현은 눈빛을 가볍게 빛내며 조심스럽게 검 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네 마음대로 해. 나는 그만 가겠어.”
이가현은 조금씩 뒷걸음을 하며 시선을 돌려 진영령을 바라보았다.
“백리연이 저지른 일 때문에 우리까지 죽을 필요는 없잖아. 너도 같이 돌아가자.”
동조를 바라는 이가현의 말투에 진영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진영령이 고개를 돌려 백리연에게 시선을 주었다.
백리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개인적인 일이야. 영령, 너는 가현이와 함께 가도록 해.”
백리연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해 보던 진영령이 쓸쓸한 표정으로 백리연을 바라보다 이가현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영령이 자신과 행동을 같이하려는 듯 보이자, 이가현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어렸다.
매영단에서 단주를 제외하면 최고의 무위를 가지고 있는 백리연이었다.
혹시라도 살인멸구라도 하려 할까 봐 불안감이 적지 않았는데 진영령이 자신과 행동을 같이한다면 이기지는 못해도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가현이 다가서는 진영령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자, 걸음을 옮기던 진영령이 천진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잘 가!”
“잘 가?”
이가현의 눈빛에 의문이 어림과 동시에 진영령의 허리춤에서 섬뜩한 섬광이 솟구쳤다.
“크, 흐윽!”
어느 틈엔가 진영령의 검은 이가현의 목에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이가현은 눈에 당혹감을 가득 담은 채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듯 힘겹게 입술을 뻐끔거렸으나 입에서는 그륵거리는 피거품만이 흘러나왔다.
진영령은 검 자루를 잡은 채 여전히 천진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넌 처음 볼 때부터 재수가 없었어.”
진영령은 말을 끝내며 이가현의 목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았다.
이가현의 몸이 서서히 옆으로 기울더니 곧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호호홋! 잘 가!”
진영령은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 몸을 눕힌 이가현의 옷에 검날에 묻어 있는 피를 쓰윽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백리연이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진영령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며칠이면 알려질 텐데 굳이 죽일 필요는 없잖아.”
괜한 짓을 했다는 어투이기는 했지만 이가현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진영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 언니는 매일 나보고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고 뭐라고 하는데, 나보다는 오히려 될 수 있으면 피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연 언니 성격이 더 문제가 많아. 연 언니가 무공이 조금만 더 약했으면 그 성격 때문에 몇 번은 죽었을 거라는 걸 알아?”
진영령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느긋하게 백리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며칠이 아니라 한 시진이라도 벌 수 있다면 저 재수 없는 계집애를 죽였어. 저 계집애를 그냥 보내 줬으면 아마 채 한 시진도 되기 전에 귀무단과 매영단이 우리 뒤를 쫓았을 거야. 재수 없는 데다 입도 싼 계집애잖아.”
진영령의 말에 백리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는 조운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