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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17화)
제5장 혈귀 (5)
“응급조치를 하고 내상약을 먹이기는 했는데 살아날 수 있을까? 내상도 너무 심하고 이미 독 기운이 온몸에 퍼졌어.”
어느새 백리연의 옆으로 다가선 진영령이 예의 천진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하던 걸로 봐서는 그리 쉽게 죽을 녀석은 아니던걸. 어디로 갈 건지부터 생각해 봐.”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백리연이 고개를 들었다.
“사망지로 들어가야겠어. 그곳이라면 당분간은 안전할 거야.”
백리연의 단호한 말에 진영령의 눈이 커졌다.
“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사망지? 사망지라고 한 것이 맞아?”
진영령의 당혹감 어린 물음에 백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망지는 이름 그대로 죽음의 땅이었다. 아니, 땅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부분적으로 땅이 있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늪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바닥에 깔려 있는 썩은 낙엽 때문에 늪과 땅을 구분할 수도 없었다.
설혹 길을 찾아낸다고 해도 비가 한 번 내릴 때마다 늪과 땅의 위치가 바뀌는 일이 흔하다 보니 한 걸음의 실수가 곧바로 죽음으로 연결되는 곳이 바로 사망지였던 것이다.
이곳의 극악에 가까운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는 등천관의 아이들도 접근하지 않는 장소였다.
등천관에서는 아이들의 생존 감각이나 위기 감지 능력을 키우기 위해 지형이나 주변 상황에 대해서 전혀 설명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초반에는 사망지 인근에 자리를 잡으려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죽었거나 혹은 죽을 위험을 몇 번 겪은 후 생활 지역을 바꿨던 것이다.
진영령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동안 백리연은 어느새 조운비를 등에 들쳐 업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연 언니, 진심이야? 상황이 나쁘기는 하지만 다른 장소가 없지는 않잖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사망지는 너무 위험해.”
걸음을 옮기려는 백리연을 향해 진영령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망지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었어. 난 혼자서 수련하는 데 한계를 느껴서 나온 것이지, 위험해서 나온 것이 아니야.”
백리연의 대답에 진영령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진영령이 품에서 끈을 꺼내 조운비의 몸을 백리연에게 고정시키자, 백리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출발할게. 최대한 흔적을 지우고 사망지 초입에 있는 거목 앞으로 와.”
진영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연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제6장 귀무단 (1)
조운비는 온몸이 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의식이 허공을 유영하는 것 같은 몽롱함을 느끼며 애써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은 천근 암석이라도 되는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인가?’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조운비는 조금씩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돈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자는 죽은 것이 분명하고 의식을 잃기 전에 이 부대주님의 조카로 생각되는 이가 나타났었다. 그녀가 나를 구한 것인가?’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점점 의식이 분명해지기 시작하자, 조운비는 조금씩 자신의 상태를 인식할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정신은 깨어났으나 몸은 조금도 말을 듣지 않았다.
돌덩이처럼 굳어진 몸은 조운비의 쉴 새 없는 노력에도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끊임없는 고통만을 안겨 주었다.
‘독 기운과 내상 때문인가?’
조운비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몸을 움직여 보려던 생각을 포기했다.
‘고통이 느껴지니 신경이 죽은 것은 아닐 것인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조운비는 혈귀의 독에 쓰러지기 전에 고해심결을 운기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고해심결이 독을 몰아내는 효과가 있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억제력이 있는 것만은 명확하다.’
백리연이 자신을 구했다면 치료를 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었지만 해독이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조운비는 서서히 고해심결의 운기를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진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윽!’
입을 열어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내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처음 깨어나면서 느꼈던 고통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끔찍한 고통이 조운비의 온몸을 휩싸고 있었다.
우드득! 우드득!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조운비의 몸에서 쉴 새 없이 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연 언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갑작스러운 소음에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온 진영령이 조운비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며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뒤이어 들어온 백리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뭔가 특이한 무공을 익힌 것 같다는 짐작 정도밖에……. 사실 혈망사의 독에 당하고 해독을 못한 상황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
실상 백리연은 조운비를 데려오기는 했으나 살려 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없었다.
내상도 너무 심각한 상황이었고 흘린 피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혈망사의 독까지 온몸에 퍼져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기본적인 치료를 하기는 했지만 혈망사의 독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혈귀의 품에서 몇 개의 약병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무 표시가 없는 약병을 보고 무엇이 독이고 무엇이 약인지 구분할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무턱대고 먹이고 볼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백리연은 기본적인 치료를 한 후 독에 어느 정도 효험이 있는 몇 가지 약초를 즙을 내어 먹이는 것으로 치료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백리연은 조금은 묘한 표정으로 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리고 있는 조운비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가지로 이해하기 힘든 자로구나. 혈망사의 독에 당하고도 백여 장을 움직이고 혈귀를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독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해도 지금 저러한 모습은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백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영령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영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조운비를 주시하고 있느라 백리연이 다가서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네가 무공 이외의 것에 그렇게 집중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구나.”
백리연의 나직한 목소리에 진영령은 어깨를 가볍게 움찔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재미있는 녀석이잖아.”
진영령은 말을 꺼내며 겸연쩍은 듯이 조금 어색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백리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을 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백리연의 물음에 진영령은 생각을 떠올려 보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음, 뭐라고 할까?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흠, 그러니까 뭐라고 하지? 맞다! 끈질겨. 으음,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네.”
진영령은 고민스러운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 맞다! 독해. 아니다, 그것도 이상하네. 흠……. 뭐라고 해야 하지?”
“포기할 줄 모르는 집념과 투지.”
백리연의 나직한 말에 진영령은 이제 알았다는 듯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바로 그거야.”
개운한 표정으로 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던 진영령이 문뜩 의아하다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어? 그런데 연 언니가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어?”
진영령의 신기하다는 물음에 백리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너와 비슷한 것을 느꼈으니까.”
진영령은 다시 시선을 돌려 꿈틀거리는 조운비를 바라보았다.
“살아날까?”
“네가 그랬잖아. 쉽게 죽을 녀석 같지는 않다고. 지금 저런 모습도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일부분이라면 아마 살 수 있을 거야.”
백리연은 스스로 다짐이라도 하듯이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쉽게 죽어서는 안 될 녀석 같아. 죽을 것 같지도 않고.’
조운비를 바라보다 문뜩 떠오르는 감정적인 생각에 백리연은 왠지 흠칫하는 기분이 되어 시선을 돌렸다.
조운비의 의식은 온몸이 터지고 으스러지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 속을 망령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고통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지금 겪는 고통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고해심결을 최초로 운기했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 온몸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그 끔찍한 고통에 조운비의 의식은 점점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크윽. 나는 죽지 않아.’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조운비는 이 한 가지 생각만은 결코 놓지 않고 있었다.
이미 제어력을 상실한 고해심결의 기운은 이제 스스로 길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히 미미하게나마 의식이 남아 있어 폭주를 하지는 않았지만 통제가 되지 않는 기운들은 혈맥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고 있었다.
온몸이 내부로부터 찢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 거의 의식을 놓을 지경에 이르렀던 조운비는 문뜩 몸속 어딘가에서 스며 나오기 시작한 한 줄기 따스한 기운에 간신히 스러져 가던 의식의 끝을 붙잡을 수 있었다.
조운비는 그 잠시의 기회를 놓지 않고 간신히 흐트러져 가던 기운을 수습해 낼 수 있었다.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임에도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집념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조운비는 고통의 속박을 벗어나 조금씩 정신을 되돌릴 수 있었다.
‘때마침 혈맥에 잠재되어 있던 천마신단의 기운이 촉발된 것이 천운이었다.’
조운비는 생각으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의식을 잃어 가던 중에 제어력을 잃은 고해심결의 기운으로 인해 혈맥에 잠재되어 있던 천마신단의 기운이 촉발되지 않았다면 죽지는 않더라도 폐인이 되는 상황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말 그대로 천운이 따랐던 것이다.
조운비는 힘겹게 고해심결의 운기를 마무리하고는 다시 몸의 이곳저곳으로 힘을 전달해 보았다.
손끝과 발끝에서 약간의 꿈틀거림이 느껴졌으나 역시 몸이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혈맥이 꼬이고 근육이 굳었다. 고해심결을 다시 운기해야 하는 건가? 아니다. 심한 내상 때문인지, 독 기운 탓인지 몰라도 고해심결을 운기하며 의식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조금 전에도 천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죽을 수도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조운비는 온 힘을 다해서 손끝과 발끝을 쉬지 않고 꿈지럭거리기 시작했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진다. 쉬지 않고 근육을 자극한다면 조금씩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조운비는 쉬지 않고 몸을 버둥거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에서 축축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의 시간이 흘러갔다.
백리연과 진영령은 오늘도 심각한 표정으로 조운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쉴 새 없는 꿈틀거림과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조운비의 모습은 보는 사람조차 처절한 기분이 느껴질 정도였다.
거의 열두 시진이 넘는 시간을 땀에 흠뻑 젖은 채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조운비의 모습에 진영령은 왠지 모를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앗! 연 언니, 팔이 반쯤 들렸어.”
진영령이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쁜 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 하루 정도만 더 지나면 일어날 수도 있겠다.”
차분한 대답이었지만 백리연의 목소리 또한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조운비의 팔이 움직이는 순간, 백리연 또한 왠지 모르게 찡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한동안 조운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백리연이 몸을 돌려 서서히 동굴을 벗어났다.
다시 하루의 시간이 흐르자 조운비는 이제는 몸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운비가 눈을 뜨자마자 처음 본 것은 호기심이 가득 담긴 커다란 눈망울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조운비를 지켜보고 있던 진영령이 그가 눈을 뜨는 모습을 보자마자 얼굴을 드밀었던 것이다.
“너, 이름이 뭐야?”
조운비는 얼굴에 느껴지는 온기에 당혹감을 느꼈다.
맞닿을 듯 얼굴을 들이민 채 말을 하는 진영령의 입김이 조운비의 얼굴에 부딪혀 왔던 것이다.
조운비는 애써 당황을 감추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쿨럭. 조, 조운비.”
마른 기침과 함께 갈라진 목소리가 조운비의 목을 힘겹게 비집으며 흘러나왔다.
조운비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진영령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한동안 그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조금 비켜 주지 않겠어? 일어나려고 하는데.”
조운비가 살짝 얼굴을 붉힌 채 조금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구지? 이 부대주님의 조카라는 백리연인가? 쓰러지기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는 다른 것 같은데.’
진영령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호호! 생각 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
진영령의 장난기 어린 말에 조운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가볍게 보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조운비가 진영령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을 좀 치워 줬으면 하는데.”
꽤나 차갑게 느껴지는 조운비의 말에 진영령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 좀 봤다고 그렇게 기분 나쁘다는 표시를 낼 필요까지는 없잖아?”
진영령은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진영령의 그러한 모습에 조운비는 약간은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며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백리연은 아닌 듯한데, 동료인가? 꼭 어린아이 같군.’
진영령은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린 채 한동안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운비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적지 않았으나 기분이 상해서인지 굳이 진영령의 비위를 맞추며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 상태는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군.’
진영령에게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운비는 고개를 저으며 좌정을 했고 곧 태허심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흘끔거리며 조운비를 살피고 있던 진영령은 조운비가 운기를 시작하자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뭐 저따위 녀석이 다 있어.”
진영령은 나름대로 호감이 있어 장난을 걸었던 것인데,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하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