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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18화)
제6장 귀무단 (2)
진영령이 혼자 분기를 터뜨리며 씩씩거리고 있을 때 백리연이 동굴로 들어섰다.
“깨어났어?”
좌정한 조운비의 모습을 보고 백리연이 진영령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언니는 보고도 몰라?”
진영령은 쏘아붙이듯이 말을 내뱉고는 씩씩거리며 몸을 휙 돌려 동굴을 벗어났고, 백리연은 황망한 표정으로 진영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운비는 조심스럽게 태허심공을 운기하고 있었다.
혈맥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지 운기가 수월하지 않았지만 힘겹게 몇 번의 소주천을 하고 나니 어느 정도 진기의 유통이 원활해졌다.
조운비는 안도감을 느끼며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고해심결의 운기로 천마신단의 약력이 촉발된 덕분에 내상이 상당히 가라앉았다. 이틀 정도면 내상은 치유가 가능하겠군.’
다시 운기를 시작하려던 조운비의 귀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기 끝났으면 눈 좀 떠 봐.”
조금은 차가운 느낌이 드는 목소리에 조운비가 눈을 떴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옥으로 만들기라도 한 듯 아름다운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운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숙부님과 무슨 관계지?”
조운비는 소녀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의문을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라는 말에서 소녀가 백리연임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숙부라는 분이 이지문, 이 부대주님을 말하는 것이 맞지?”
“부대주라는 직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분이 내 숙부님인 것은 맞아.”
조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열 살이 안 되어 등천관에 들어왔을 것이니 바깥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네 숙부님은 현재 천마대의 부대주를 맡고 계셔. 나는 천마대 대주님의 의동생이라 이 부대주님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지. 이곳에 오기 전까지 무공을 배우기도 했고.”
조운비는 현재 천마대의 대주가 천마신교의 이공자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자신이 별다른 신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괜한 위화감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조운비의 대답을 들은 백리연의 입 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말려 올라갔다.
숙부가 천마신교 최대의 무력 단체인 천마대의 부대주가 되었다는 소식은 백리연의 기분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미소를 띠고 있는 백리연의 얼굴은 활짝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게 보였고, 조운비는 순간적으로 백리연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잠시 웃음을 짓던 백리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운비에게 시선을 돌리자, 조운비는 문뜩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어깨를 가볍게 움찔거렸다.
“숙부님의 근황에 대해서 좀 더 묻고 싶지만, 우선은 몸부터 추스려야겠지.”
백리연은 말을 꺼냄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동굴을 벗어났다.
무언가 다른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뜨는 백리연의 모습에 조운비는 허탈한 기분과 함께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조운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묘하게 헝클어진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는 다시 태허심공의 운기를 시작했다.
조운비는 곧 무아지경에 빠져 들었다.
한 시진 가까이가 지나 조운비가 눈을 떴을 때, 동굴 안에는 백리연과 진영령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진영령이 웃음 띤 얼굴로 조운비에게 다가왔다.
“좀 괜찮아?”
조금 전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친근한 태도에 조운비는 조금은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도 그다지 평범한 성격은 아닌 것 같군.’
백리연이 다가서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내상은 어느 정도나 치료된 거지?”
시선을 돌린 조운비의 눈에 싸늘해 보이는 표정의 백리연의 얼굴이 들어왔다.
“내일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것 같아.”
백리연의 눈이 놀람으로 가볍게 커졌다.
상당히 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 정신이 든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완치가 되었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상은 보기보다 심하지 않았던 것인가? 아니면 그 특이한 무공 때문인가?’
조운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도움 준 것 고마워. 조금 전에는 말할 기회가 없어서.”
조운비의 진지한 감사의 말에 백리연의 얼굴에 조금은 어색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도 도왔는데, 나는 안 고마워?”
진영령이 팔짱을 끼며 입술을 삐죽거리자, 조운비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진영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모두에게 한 말이야. 정말 고마워.”
진영령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조운비의 모습에 왠지 가슴이 울렁거리자,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내가 정신을 잃고 며칠이나 지난 거지?”
“오늘이 사흘째야.”
조운비의 물음에 백리연이 답했고, 곧 그녀의 질문이 이어졌다.
숙부인 이지문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는데, 실상 조운비가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아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조운비와 백리연의 대화가 끊어지자, 대화의 내용상 끼어들 여지가 없어 소외되어 있던 진영령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얘기보다는 당장 살아날 궁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조운비가 눈동자에 의아함을 담은 채 고개를 돌렸다.
“살아날 궁리라니? 그게 무슨 얘기야?”
“네가 혈귀를 죽였잖아.”
조운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은 얘기로는 이곳에서 살인을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했는데, 나를 죽이려던 녀석을 죽인 것이 뭐가 문제가 되는 거지?”
백리연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혈귀의 형인 사무린이 등천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귀무단의 단주이기 때문이야. 사무린의 성격에 자기 동생이 죽은 것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으니 우리 세 사람은 곧 귀무단의 표적이 될 거야. 어쩌면 벌써 우리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지.”
조운비의 안색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말을 듣고 보니 무척이나 위급한 상황인 데다 자신으로 인해 백리연과 진영령까지 위험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에 잠겨 있던 조운비가 백리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상황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겠어?”
“어떤 상황?”
“등천관의 세력 구도와 귀무단과 사무린의 성격 같은 것.”
조운비의 말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백리연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현재 등천관에는 대략 오백 명 정도의 인원이 남아 있어. 일 년쯤 전부터 조금씩 무리를 이루기 시작해서 지금은 대부분의 인원이 성향에 맞게 조직을 이루고 있지. 보통 열에서 스물 정도의 조직이 많은데, 가장 수가 많은 귀무단 같은 경우는 수가 거의 백 명에 가깝지.”
백리연이 말을 끊자, 조운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조직이라는 것은 어떤 개념이지? 아니, 질문을 달리 하는 게 좋겠군. 그 조직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결속력을 가지고 있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영령은 조운비가 묻는 말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듯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것이 중요해?”
조운비가 시선을 돌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하기도 하고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잖아.”
조운비의 부드러운 말에 진영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고, 백리연이 다시 말을 이었다.
“조직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그리 결속이 강하지는 않아. 생존과 안전의 확보라는 목적이 조직이 만들어지는 배경이니까. 친분이나 상호간의 무공 증진을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조직도 있기는 하지만 귀무단의 경우는 전자에 가깝지.”
조운비는 백리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조운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백리연이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귀무단 외에 강하다고 할 만한 세력으로는 검영단과 패도단, 매영단이 있어. 검영단과 패도단은 검법과 도법을 사용하는 아이들로 구성된 모임인데, 상호간의 무공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들이라 수준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받아 주지 않아. 그러한 이유로 둘 다 인원은 스무 명을 조금 넘는 정도지만, 개개인의 실력이 높아서 귀무단에 못지않은 세력이야. 매영단은 여자 아이들이 주축이 된 세력으로, 인원에 있어서는 귀무단 다음이지만 무력은 사대 세력 중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어. 영령과 나도 매영단에 속해 있었지. 그 외에는 특별한 세력은 없어. 거의 비슷비슷한 수준이야.”
차분하고 진중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조운비는 백리연의 말이 끝나자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혈귀의 무위는 등천관 전체로 봐서 어느 정도였지?”
“대부분 자신의 실력을 전부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점까지 생각해도 상위 오십 명 안에는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조운비의 얼굴에 일순 당혹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런 녀석이 겨우 상위 오십 명에 들어가는 정도라고?’
조운비는 잠시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충격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혈귀의 형이라는 사무린은 어느 정도 수준이지?”
“적어도 상위 열 명 안에는 들어갈 거야.”
“사무린과 혈귀와 차이는 어느 정도나 되지?”
백리연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귀 정도의 실력을 가진 두 명 정도면 사무린과 상대가 가능할 거야. 정확한 것은 아니야. 다들 실력을 감추니까.”
조운비의 표정은 심각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그만한 무공을 가진 녀석이 귀무단이라는 세력까지 가지고 있다. 거의 대책이 없는 상황이 아닌가.’
조운비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턱을 짚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었다.
“혈귀의 시체는 어떻게 했어?”
백리연이 시선을 돌려 진영령을 바라보자, 진영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간을 오래 끌면 안 될 것 같아서 조금 떨어진 곳의 수풀에 감췄어. 그 계집애는 그냥 근처에 감추고.”
진영령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조운비가 백리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안전한 거야?”
백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안전할 거야. 여기는 사망지 안이야. 위험해서 아이들이 피하는 곳이지.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는 이 동굴과 이곳으로 오는 길은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
조운비는 계속 이런저런 질문을 이어 갔고, 백리연과 진영령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조운비의 물음에 대답을 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조운비는 질문을 멈추고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백리연은 그런 조운비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문뜩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시작한 후 한순간도 대화의 주도권을 잡지 못한 채 조운비에게 휘둘렸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실상 상황을 주도해 나가야 하는 것은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분위기에 휘말려 묻는 말에 대답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힌 심정이 들었다.
백리연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조운비가 눈을 뜨며 심각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 이곳을 나가는 방법을 알려 주고 두 사람은 돌아가도록 해.”
결론을 내린 듯 단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백리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가 막히는군. 내가 한 말을 제대로 듣기나 한 거야? 지금 상황에서 어디로 돌아가라는 거야? 그리고 네가 뭔데 우리한테 명령하듯이 말하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묘하게 자존심이 상해 있던 백리연의 목소리에는 적지 않은 짜증이 섞여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백리연의 쏘는 듯한 대꾸에 조운비는 할 말을 잃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뭐가 또 기분이 상한 거야? 둘 다 그다지 이해하기 쉬운 성격은 아니로군. 등천관의 아이들은 다 이런가?’
여자라고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이옥화 말고는 상대해 본 적이 없는 조운비가 여자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라 조운비는 당혹감을 가라앉히며 애써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제대로 들어서 하는 말이야. 그리고 명령을 한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너희들이 나로 인해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 싫어서 한 말이었는데 혹시라도 내 말투가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
차분하게 조운비의 말이 이어지자, 백리연은 왠지 민망한 기분에 시선을 돌리며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알겠지만 이미 늦었어. 지금쯤이면 혈귀의 시체도 발견됐을 것이고 귀무단과 사무린이 우리를 찾고 있을 거야.”
조운비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럴 확률이 높을 거야. 하지만 별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해. 내가 죽었다면 모르지만 살아 있으니까.”
진영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 섞인 목소리를 냈다.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거지? 어찌 되었건 우리는 혈귀를 죽인 너를 도와줬어. 이미 사무린은 우리도 표적으로 삼고 있을 거야.”
조운비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분명한 차이가 있어.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둘의 생각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어. 우선 나를 도왔다는 것인데, 실제로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게다가 애초에 너희들이 나를 도울 이유라는 것도 없지. 의심은 할 수 있겠지만 명확하지는 않다는 것이지.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내가 내일 정도면 완쾌가 된다는 거야. 내가 나흘 만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사무린이라는 녀석이 내가 너희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할까? 아마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녀석의 신경은 나에게 집중될 것이고 너희들은 돌아가서 적당한 핑계를 대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야. 그 죽었다는 여자 아이도 나한테 죽은 것으로 하고 어차피 나와 내 무공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굳이 못 믿을 이유도 없겠지.”
조운비의 차분한 설명에 백리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처음 조운비를 도울 때와는 분명 다른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