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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19화)
제6장 귀무단 (3)
조운비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상처를 회복했고, 지금의 상태를 보아서는 누구라고 해도 혈귀와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혈귀의 시체가 발견된다면 가장 큰 혐의를 받는 것은 조운비다.
그런 조운비가 아무런 상처도 없는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 혈귀를 죽였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던 백리연이 문뜩 얼굴을 굳히며 시선을 들었다.
“그럼 너는 사무린에게 죽어 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조운비의 말이 옳기는 했지만 거기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조운비가 모습을 드러내고 혈귀를 죽였다고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백리연이 듣기에 그러한 얘기는 자신과 진영령을 살리기 위해 조운비가 희생을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셋의 위험을 한 사람의 위험으로 바꾸는 것이니 어찌 보면 가장 나은 방법일 수도 있었지만, 백리연은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누가 네 녀석 따위를 걱정한다는 거야!”
조운비의 대답에 백리연이 발끈해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백리연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잠시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던 조운비가 고개를 한 번 가로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한 것이 있는데, 너희들이 있든 없든 별 차이가 없어. 그런 상황에서 너희들까지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나름대로 생각했다는 게 도대체 뭔데?”
한동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던 진영령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조운비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언뜻 생각해도 조운비에게 특별한 방법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백리연과 자신을 생각해서 희생하려는 것으로만 느껴졌던 것이다.
원래 진영령의 성격이라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진영령은 왠지 화가 나고 기분이 상했다.
조운비가 진영령에게 시선을 돌리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내일 혈귀와 싸웠던 장소 주변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내고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여기서 수련을 할 생각이야.”
백리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껏 생각했다는 것이 그런 거야? 네 생각은 틀렸어. 분명히 내가 얘기를 했지만 열흘에 한 번씩 하는 무공 수업을 포기한다면 너는 결코 이곳을 벗어날 실력이 될 수가 없어. 일단 매 수업 때마다 지급되는 마화단을 포기하면 일단 내공에 있어서 뒤처질 수밖에 없고 무각의 비급들도 볼 수 없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교관들의 수업을 듣지 못한다는 점이지. 혼자 수련해서는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기는커녕 점점 차이만 벌어질 뿐이야. 너는 두더지처럼 이곳에 숨어 있다가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사냥을 당하는 신세가 될 거야.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다른 방법을 좀 더 생각해 보자.”
갑갑하다는 듯한 백리연의 말에 조운비는 웃음을 지었다.
백리연과 진영령의 걱정 섞인 말들이 싫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이지문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에게 신경을 써 주는 것이 의아하기도 했지만 고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조운비가 곧 입을 열었다.
“나는 조금 특별한 내공심법을 익혔어. 그래서 마화단이라는 영약의 도움이 없어도 내공에서 크게 뒤처질 일은 없을 거야.”
납득을 할까 하는 우려에 조운비가 잠시 말을 멈췄으나 의외로 백리연과 진영령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특별한 내공심법이라는 말에 처음에 고해심결을 운기하던 조운비의 모습과 상상을 초월한 빠른 회복력을 떠올린 두 사람에게 그의 말은 상당한 신빙성 있게 들렸던 것이다.
조운비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른 무공에 대해서는 기존에 배운 것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상태라 실상 다른 무공이 급한 것도 아니고 저번에 혈귀와 싸우면서 얻은 것이 조금 있어. 그것들을 수습해 낸다면 다른 아이들을 이기지는 못해도 쉽게 당할 일은 없을 것 같아. 어때? 이 정도면 대답이 되겠어?”
진영령은 여전히 못미더운 표정으로 잠시 조운비를 바라보다가 백리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리연 또한 그리 탐탁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진영령의 묻는 듯한 표정에 잠시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이리저리 생각을 해 보았지만 조운비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고, 그나마 조운비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싶었던 것이다.
‘혹시 거짓말이라고 해도 나와 영령이라도 사무린의 표적에서 벗어난다면 저 녀석이 이곳에 숨어 지내는 동안 무엇인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하던 백리연은 문뜩 당혹감을 느꼈다.
알고 본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자신이 타인에 대해 이렇게 고심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백리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배가 고픈데 뭔가 먹을 것이 없을까?”
고개를 든 백리연의 시선에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조운비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상한 녀석.’
백리연은 잠시 뭔가 말을 할 듯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잠시 조운비와 백리연을 번갈아 보며 머뭇거리던 진영령이 곧 뒤따라 동굴을 벗어났다.
* * *
우거진 나뭇잎들에 부딪혀 비산하는 흐릿한 햇살은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검은빛의 나무들로 휩싸여 있는 숲은 귀기 어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조운비는 누군가 바로 앞에서 지켜본다고 해도 쉽게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의 움직임으로 조심스럽게 숲 속을 이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잘 빠져나갔겠지?’
문뜩 스치는 상념에 조운비는 고개를 한 번 흔들고는 실소를 터트렸다.
‘풋, 내 입장에서 걱정이라니.’
백리연과 진영령이 사망지를 벗어나기 전까지 두 사람과 조운비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와중에 알게 된 사실 한 가지가 자신의 무공이 백리연과 진영령에게조차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몇 번의 대련을 통해 자신의 무공 수준이 현재 등천관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통틀어도 간신히 하위권을 벗어날 정도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약간 씁쓸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다지 납득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등천관에서 처음 부딪친 혈귀의 무위로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조운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예상보다 등천관의 수준이 높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만 그런 것뿐이다. 내공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이고, 고해심결로 얻어진 비정상이라고 할 정도의 예민한 감각은 내게 충분한 힘이 되어 줄 수 있다.’
조운비는 주먹을 힘 있게 쥐며 눈동자를 빛냈다.
한동안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조운비가 스며들 듯 한 거목 뒤로 몸을 감췄다.
등천관에 들어서기 전보다 더욱 예민해진 조운비의 감각에 무엇인가 느껴졌던 것이다.
조운비는 자신이 느낀 것을 조금 더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차분히 감각을 집중했고, 곧 직감에 가깝던 기척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두 명이군. 역시 혈귀의 시신이 발견된 것인가?’
조운비의 몸이 다시 유령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주변의 다른 기척을 찾아보던 조운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의 위치로 돌아와 몸을 세우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은신한 채 움직인 탓에 심력의 소모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시체가 발견되고 꽤 시간이 지난 것인가?’
혈귀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수색이나 추적을 위한 인원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을 위해 남겨 둔 두 명이라 그나마 약한 녀석들이겠군.’
잠시 생각을 정리한 조운비는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능력 중에서 그나마 나은 것이 내공과 은신술이었다.
은신술의 경우는 등천관의 아이들과는 달리 체계적으로 배운 덕분인지 혈귀에게도 통했었다.
게다가 근래 예민해진 감각 덕인지 조운비의 은신술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약한 축에 속하는 아이들이라고 쉬운 상대는 아닐 것이다. 다행히 두 명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으니 우선 암습으로 하나를 잡는다.’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로 느릿하게 검을 뽑아 등 뒤로 돌려 잡은 조운비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기 시작했고, 일다경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한 녀석이 은신하고 있는 곳까지 다가설 수 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조운비는 은신한 상태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비스듬히 몸을 숨기고 있는 흑의인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필 나무 위라니. 높이가 일 장에 가깝다.’
상대의 반응이 빠르다면 뇌전비로 땅을 박차고 오를 때 눈치를 채고 방어를 할 수도 있었다.
암습을 당하는 상황이니 막기에 급급하겠지만 그리된다면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검 소리에 다른 한 녀석이 달려오고 상황이 이 대 일로 변한다면 조운비는 솔직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해 보던 조운비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혈귀의 일로 너무 소심해졌구나. 나는 결코 약하지 않다. 저 위에 있는 녀석이 혈귀 정도의 수준일 리도 없고.’
조운비는 흘끔 나무 위를 바라보고는 힘주어 검 자루를 쥐었다.
‘일격에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운신이 어려울 정도의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면 충분하다.’
상대가 혈귀를 능가할 정도의 실력이 아니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조운비의 내공은 내상을 치료하며 흡수된 천마신단의 약력으로 더욱 늘어난 상태였고 상대는 당황한 상태에서 끌어올린 일부의 힘으로 조운비의 전력을 다한 공세를 막아야 하는 것이다.
조운비는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고 진기를 끌어올려 발끝에 힘을 모았다.
가벼운 소음과 함께 조운비의 몸이 위로 솟구치며 백색 섬광이 번뜩였고, 거의 동시에 나무 위에 은신하고 있던 흑의인이 검을 뽑으며 몸을 돌렸다.
당혹감으로 눈을 치켜뜬 흑의인이 발악하듯이 조운비의 공세를 맞받아 갔다.
파앙!
“크윽!”
검과 검의 충돌임에도 불구하고 쇳소리가 아닌 폭음에 가까운 울림이 터져 나왔고, 흑의인은 걷어차인 돌멩이처럼 튕겨지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뒤로 튕겨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조운비는 가벼운 울렁거림을 심호흡으로 억누르며 바닥을 박차고 재차 몸을 날렸다.
‘그다지 강한 편에 속하는 녀석은 아닌 듯한데도 이렇게 빠른 반응이라니…….’
내상이 심각한지 주먹만 한 핏덩어리를 토해 낸 흑의인은 득달같이 달려드는 조운비의 모습에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힘겹게 검을 세웠다.
조운비는 굳어진 얼굴로 전력을 다해 검을 날렸다.
‘다른 한 녀석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이번 한 수로 잡아야 한다.’
흑의인을 향해 덮쳐 가던 검광이 순간적으로 셋으로 갈라지며 시린 청광을 뿜어냈다.
콰쾅!
“컥!”
단말마의 신음성과 함께 흑의 소년의 몸이 태풍에 휘말린 나뭇잎처럼 날아가 뒤쪽의 거목에 부딪혔고, 곧이어 그림자처럼 뒤따른 조운비의 검에서 섬뜩한 검광이 피어오르며 쓰러지던 흑의인의 머리가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흑의인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며 잘린 목에서 폭포수처럼 피가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조운비는 왠지 모를 열기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조운비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어느새 나타난 흑의 소년이 몸을 세운 채 놀람과 당혹감이 떠오른 얼굴로 조운비와 시체가 된 동료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조운비의 살기 어린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흑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너, 너는 누구지? 어, 어째서 우리 귀무단을 공격하는 거냐?”
자신의 동료를 잔인하게 살해한 조운비의 살기 어린 기세에 흑의 소년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애초에 암습을 당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죽은 소년이 조운비의 일 수에 낙엽처럼 날아가다 목이 베이는 모습만 본 흑의 소년에게 조운비의 무위는 압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조운비는 소년의 반응에서 어느 정도 그러한 상황을 짐작해 낼 수 있었다.
‘풋. 겁을 먹은 것인가? 그렇다면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겠군.’
어차피 과장된 무위를 보이고 살려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살아 간 녀석이 자신을 혈귀를 죽일 만한 실력자로 착각을 해 주어야 백리연과 진영령이 귀무단과 사무린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의외로 시간과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서 일이 조금 쉬워졌군.’
조운비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살기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시비는 네 녀석들이 먼저 걸지 않았느냐. 저 녀석은 살기를 품은 채 내가 지나는 길목에 은신하고 있었는데, 설마 잠이라도 자고 있었다고 할 참이냐? 후, 며칠 전에는 혈귀라고 지껄이던 미친놈이 다짜고짜 살수를 펼치더니. 정말 재미있는 곳이 아닌가, 하하핫!”
잠시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던 조운비가 살기를 피우며 흑의 소년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흑의 소년은 놀람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네, 네 녀석이 혈귀를 죽였느냐?”
“제 놈 입으로 혈귀라고 떠들고 다니는 미친놈이 그 한 놈뿐이라면 내 손에 죽은 놈이 맞겠지. 겁이 났는지 도망을 치기에 쫓아가서 반 토막을 내 주었다.”
조운비의 말에 흑의 소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직접 죽이지 않았다면 혈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리가 없었다.
어떻게 뒤쪽에서 맞은 검에 의해 허리가 잘렸는지 의아하게 여겼었는데, 조운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해가 갔다.
‘혈귀가 도주를 할 정도의 무위라는 말인가?’
조운비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흑의 소년의 몸이 튕기듯 뒤쪽으로 날아갔다.
‘내 상대가 아니다!’
바닥에 발을 딛고 몸을 틀려고 하던 흑의 소년의 시야에 섬뜩한 청광이 날아들었다.
“허락도 없이 가려는 것이냐?”
콰쾅!
“크윽!”
반사적으로 검을 쳐 낸 흑의 소년이 신음을 토하며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고, 곧 바닥으로 떨어질 듯 보이던 몸을 비틀며 섬전처럼 숲 속으로 사라졌다.
조운비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도주하는 흑의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간단한 녀석이 하나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