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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20화)
제6장 귀무단 (4)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냐?”
투박해 보이는 나무 의자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는 소년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을 뿜어냈다.
곱상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소년의 싸늘한 말에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흑의 소년이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 무린, 내, 내가 감당할 만한 녀석이 아니었어. 고상이 일 수에 정신을 잃고 목이 날아갔어. 고상이 당하는 순간에 바로 공격을 했지만, 그 녀석의 일 검에 더 이상 다투기 힘들 정도의 내상을 입었다고.”
사무린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자, 흑의 소년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무, 무린!”
어느새 다가선 사무린이 주춤거리며 물러서려는 흑의 소년의 손목을 낚아챘다.
“요, 용서해 줘.”
사무린은 여전히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진기를 끌어올렸고, 흑의 소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정말 내상을 입었군.”
사무린은 팽개치듯 흑의 소년의 손목을 놓으며 몸을 돌렸다.
“가 봐!”
흑의 소년은 사무린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동굴을 벗어났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사무린이 문뜩 걸음을 멈추며 나직한 목소리를 내었다.
“소고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일까?”
“고진이 몇 수 못 버티고 당한 것은 맞는 것 같군. 아니라면 도망칠 이유도 없었겠지.”
동굴의 한쪽에서 나른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사무린이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며 동굴의 어둑한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봐, 상관진. 내가 그런 것을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소고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번에 새로 들어온 그 녀석의 무위는 결코 나나 네 녀석의 아래가 아니야.”
사무린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 그림자가 조금씩 일그러지며 끌어안듯이 검을 들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흑의 소년은 목소리만큼이나 나른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상관진의 목소리에 사무린은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그만두자. 네 녀석한테 의견을 물은 것이 잘못이지.”
사무린은 상관진을 향해 손을 가볍게 휘휘 젓고는 턱을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상관진은 사무린의 그러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걸음을 옮겨 사무린이 몸을 일으킨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잠시 후 사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관진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흠, 아무래도 이상해. 그 정도의 무공을 가진 녀석이 굳이 지금에 와서 등천관에 들어올 필요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 정도 실력으로 내상까지 입은 소고를 놓친 것도 이해가 가지 않고.”
사무린의 말에 상관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서? 이상하고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 녀석을 살려 두기라도 할 생각인 거야?”
상관진의 말에 사무린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쓸모없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내 동생을 죽인 놈이야.”
“내 말이 그 말이야. 어차피 죽일 놈인데 골치 아프게 이리저리 머리 굴릴 필요 없잖아.”
상관진의 말에 사무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건 그 녀석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부분이 아니야. 동조자가 있었냐는 것이지.”
“동조자? 그건 무슨 얘기야?”
의아하다는 상관진의 물음에 사무린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혈귀의 시신 근처에서 매영단 이가현의 시신이 발견됐지. 평소에 이가현과 같이 어울려 다니던 백리연과 진영령은 사라졌고. 뭔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재미있다는 듯한 사무린의 말에 상관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골치 아픈 얘기로군.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야? 간단하게 말해. 나 복잡한 것 싫어하는 거 알잖아.”
사무린은 상관진에게 시선을 돌리며 실소를 지었다.
“그 녀석이 지금 시점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황상 백리연과 진영령이 어떤 식으로든 혈귀의 죽음에 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서 매영단을 압박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 설혹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도 말이지.”
상관진이 한껏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녀석은 ‘간단하게’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거냐?”
짜증 섞인 상관진의 말에 사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후훗, 핑계거리가 생기면 매영단을 흡수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번 일이 어쩌면 그 핑계가 될 수도 있을 듯도 했고. 일단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지만……. 이 시점에서 때맞춰 백리연과 진영령이 나타난다면 조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필요는 있겠지, 하하하!”
제7장 월하영령 (1)
어느 틈엔가 날이 저물어 가고 있는지 흐릿하게나마 동굴 입구를 비추고 있던 햇살은 붉은빛을 띠어 가고 있었다.
조운비는 사망지에 돌아오자마자 동굴의 안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혈귀와의 싸움을 돌이켜 보고 있었다.
팔로세의 이백팔십팔 식의 검세는 무엇을 어찌 사용해야 할지 생각해 볼 여력조차 없었고 풍운보는 미처 떠올려 보기도 전에 혈귀의 검세가 날아들었다.
‘팔로세와 풍운보는 실전에는 효용이 없는 무공이라는 것인가?’
조운비는 혈귀와의 격전에서 자신과 혈귀가 사용했던 초식들을 떠올려 보았다.
장난치는 것 같던 혈귀의 공세는 빠르고 간결하면서도 효율적이었다.
그에 비해 자신의 움직임은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많았고, 검세는 혈귀와 비교한다면 차마 쾌검이라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조운비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신의 움직임에서 군더더기로 느껴지는 부분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아!”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한 감탄을 터뜨렸다.
‘팔로세에 포함되어 있는 검세들이다.’
혈귀와의 싸움에 사용했던 초식들에서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을 제거하고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되는 움직임으로 고쳐 보니 팔로세에 포함된 초식이었던 것이다.
가벼운 흥분을 느끼던 조운비는 다시금 마음을 가라앉혔다.
‘익히고는 있지만 제대로 활용할 정도로 익숙하지 못하다. 써 먹지 못한다면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조운비는 머릿속에 다시 혈귀와의 공방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팔로세의 초식을 사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거기에 대처하는 혈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혈귀는 잠시 궁지에 몰리는 듯 보였지만 곧 검세에 속도가 붙으며 다시금 조운비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조운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릿속의 잔상을 떨쳐 내려는 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역시 팔로세를 완전히 몸에 익힌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 검의 속도에서 차이가 난다. 어째서인 것이지?’
조운비는 차분하게 혈귀의 움직임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혈귀의 검세를 몇 번이고 되새겨 보던 조운비가 문뜩 고개를 끄덕였다.
‘검세가 살아 있는 듯 움직이고 순간순간 변한다. 조금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검세의 움직임은 혈삼성과 흡사하다. 초식 자체에 진기를 운용하는 요결과 연환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조운비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팔로세에는 초식의 연환이나 진기를 운용하는 요결이 없고 풍운보 역시 운용요결이 없다. 역시 팔로세와 풍운보의 수련이 장기적으로는 몰라도 당장 실전에 활용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인가?’
조운비는 한동안 생각들을 정리해 보다 문뜩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방은 이미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흔한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왠지 모르게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조운비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고 검병으로 손을 가져갔고,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세 줄기 청색 검광이 조운비의 전면을 뒤덮었다.
‘내가 익히고 있는 무공들 중에 당장 실전에 효용이 있는 것은 혈삼성과 뇌전비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등천관의 아이들 중 누구 하나도 제대로 상대하기 어렵다.’
조운비는 검을 늘어뜨리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많은 생각을 해 보았지만 단기간에 등천관의 아이들을 따라잡을 만한 방법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조운비가 백리연과 진영령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 혈귀와의 싸움을 통해 얻은 것이 있었고 등천관의 아이들에게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감도 있기는 했다.
다만 그것이 무공으로서가 아니라 예민해진 감각 덕에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은신술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점이 조운비의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한동안이야 정면 대결을 피하고 은신술과 기습으로 등천관의 아이들을 상대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마냥 똑같은 방식에 당해 줄 리가 없었다.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칙칙한 어둠에 묻혀 있는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부터 정리해 보자. 일단 내공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모자라지 않고 현재의 발전 속도로 봐서는 앞으로는 오히려 우위에 설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고해심결로 얻어진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당장 실전에 사용할 만한 무공은 혈삼성과 뇌전비. 후훗! 살수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은신술과 일격필살이라…….’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던 조운비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리저리 재고 따질 만한 상황이 아니다. 현재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확실히 해야 한다.’
조운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고, 다시 청광을 내뿜으며 혈삼성이 펼쳐졌다.
‘빠르고 강하다. 하지만 힘이 셋으로 분산된다. 한 곳에 집중을 한다고 해도 혈귀 정도의 실력자라면 일격필살을 장담하기 힘들다.’
검을 내뻗은 자세에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조운비는 문뜩 눈빛을 번뜩이며 연달아 혈삼성을 펼쳤다.
지친 듯 잠시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조운비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가능성이 있다. 진기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이것도 감각이 예민해진 덕분인가?’
조운비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금은 들뜬 기분을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혈삼성을 펼쳤을 때의 감각을 떠올려 보았다.
이지문이 안다면 어이없다고 할 일이었지만, 조운비는 혈삼성을 고쳐 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 낸 이들을 괜히 무학의 종사라 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공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깨달음 없이 무공을 만들려 하거나 변형을 하려던 이들이 얻는 것은 대부분 주화입마나 조금 낫다고 해도 혈맥이 뒤틀려 폐인이 되는 결과인 것이다.
조운비도 그런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님에도 혈삼성을 변형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단지 조급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둘이라면 둘이고 하나라면 하나인 이유였는데 하나로 보자면 고해심결이었고, 둘로 보자면 고해심결로 인해 예민해진 감각 덕분에 진기의 움직임이 느껴진다는 것과 고해심결의 치유력이었다.
혹여 문제가 생겨 혈맥이 뒤틀린다고 해도 고해심결로 치료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 * *
백리연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등 뒤로 한 채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망지의 입구에 이른 백리연은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한 번 돌아보고는 곧 사망지 안으로 들어섰다.
백리연이 사망지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의를 입은 두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지? 사망지로 들어간 것 같은데, 뒤따라가야 할까?”
가는 눈매에 얼굴에 각이 진 소년의 당혹감 섞인 말에 다른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해. 백리연이 사망지로 들어가서 추적을 포기했다고 하면 단주도 뭐라고 하진 못할 거야. 예전에 백리연이 사망지에서 생활을 했다는 얘기가 있더니 사실이었나?”
몸을 숨긴 채 흑의 소년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리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꼬리가 붙은 것 같더니 역시 귀무단 아이들이로군. 사무린이 의심을 하고 있는 건가?’
백리연은 가볍게 고개를 한 번 흔들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은 없으니 그저 의심일 뿐이야.’
한동안 빠르게 움직이던 백리연의 걸음이 어느 순간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고, 백리연의 얼굴에는 긴장감마저 떠올랐다.
알고 있는 길이라고 해도 잠시라도 주의를 게을리 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 사망지인 것이다.
‘그나저나 열흘만인데,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을까?’
문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백리연은 흠칫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그 녀석 걱정을 하고 있는 건가?’
왠지 모를 당혹감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던 백리연의 시선에 어둠에 가려져 있는 동굴의 입구가 들어왔다.
백리연은 잠시 느꼈던 묘한 감정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힘주어 땅을 박찼다.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백리연의 눈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조운비의 모습이 들어왔다.
백리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기척을 감추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꿈쩍도 안 하고 있는 건 뭐지?’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데 백리연은 왠지 심사가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봐, 사람이 왔으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신경질적인 백리연의 목소리에 조운비가 눈을 뜨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미안. 운공을 하던 중이라.”
“혹시 내가 아니라 적이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경계심 없이 있는 것이지? 자신감을 가질 만한 능력이 있어서는 아닐 텐데.”
사과가 포함된 조운비의 대답에도 백리연의 기분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는지 이어지는 백리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뭐가 또 기분이 상한 거지? 보자마자 왜 저러는 거야?’
조운비는 조금 난감한 기분을 느끼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조운비는 예민해진 감각 덕에 백리연이 동굴 근처에 이르기 전에 이미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고, 곧 기척의 주인이 백리연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잠시 설명을 할까 생각하던 조운비는 굳이 해 봐야 쓸모없는 말만 길어질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