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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21화)
제7장 월하영령 (2)


조금은 가라앉은 조운비의 대답에 백리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묘하게 거슬리는 기분에 괜한 신경질을 부린 것인데, 조운비가 쉽게 인정을 해 버리니 왠지 허탈하기도 하고 민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백리연에게 조운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잘 와 줬어. 마침 물어볼 것들도 좀 있고 도움도 필요하던 참인데.”
이어지는 조운비의 부드러운 말에 백리연은 조금 애매한 기분이 되었다.
계속 짜증을 낼 수도 없었고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하기도 난감했다.
‘왜 저 녀석하고만 있으면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는 거지?’
백리연이 여전히 말을 하지 않자, 조운비 역시 난감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여자 아이들은 이해하기가 힘들군. 옥화는 이렇지 않았는데…….’
문뜩 머릿속에 이옥화의 모습이 떠오르자, 조운비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동굴 안에는 한동안 묘한 정적이 감돌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왠지 갑갑해진 백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 물어보겠다는 것이 뭐지?”
무엇이라도 말을 해서 지금의 갑갑한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급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백리연은 더듬거리며 어색한 목소리를 냈다.
왠지 멍한 기분에 잠겨 있던 조운비가 백리연의 어색한 말투에 고개를 돌리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고, 백리연의 얼굴이 가볍게 붉어졌다.
백리연은 고개를 획 돌리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물어본다는 것이 뭐냐니까?”
“아, 무각에 있다는 무공 비급들에 대해서 좀 물어보려고.”
날카로워진 백리연의 목소리에 조운비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백리연이 다시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각의 비급? 무각에 가려고? 제정신이야? 지금 네 수준으로 귀무단 아이들 눈에 띄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걸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고작 열흘 동안 경천동지할 무공을 터득하기라도 했어?”
의문을 떠올리던 백리연이 눈을 치켜뜨며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화를 내는 것 같은 백리연의 모습에 조운비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말을 끝까지 들어. 나는 무각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왜……?”
가라앉은 조운비의 목소리에 백리연의 언성도 낮아졌다.
화부터 내고 나서 생각해 보니 얘기를 다 듣기도 전에 혼자 지레짐작해서 언성을 높인 것이 민망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조운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가능하다면 너와 영령이 무각에서 몇 가지 무공들을 외워 와서 알려 줄 수 있을까 해서.”
“아!”
백리연이 가벼운 탄성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간단한 걸 왜 생각을 못했지?’
고개를 살짝 들어 조운비를 한 번 바라본 백리연이 미간을 찡그렸다.
‘다 저 녀석 때문이야! 묘한 분위기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이상한 녀석.’
“도와줄 수 있겠어?”
조운비의 말에 백리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응. 해 줄 수 있기야 한데, 무공 비급만으로 그걸 제대로 익혀 낼 수 있을까?”
문뜩 떠오른 의문에 백리연이 물었다.
자신이나 다른 아이들이야 의문점이 있으면 무공 교두들에게 묻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지만, 현재 조운비는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 아닌가.
조운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익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아직 배운 것들도 제대로 활용을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무리이기도 하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어.”
백리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참고를 하려고 해. 내가 아는 무공들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다른 무공을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런 이유라면 굳이 무각의 비급이 아니래도 내가 배운 것들을 가르쳐 줄게. 영령에게도 그러라고 하고. 그러면 되지 않아?”
“그건 조금 나중에 부탁할게. 지금은 다양하고 기초적인 무공들이 필요해. 고급 무공들은 참고하기가 조금 힘들 것 같아서.”
백리연의 얼굴에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다시 묻지는 않았다.
물어보고 대답을 들어 봐야 이해가 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가지로 특이한 녀석이니까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어차피 몇 개월간의 수련으로 다른 아이들 수준으로 무공을 끌어올리겠다는 말도 이해가 가는 일은 아니잖아.’
백리연이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조운비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나하고 비무를 한 번 해 줄 수 있겠어?”
조운비의 말에 백리연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혈귀와의 싸움을 지켜보며 조운비의 수준을 뻔히 아는 백리연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을 여자라고 가볍게 보는 건가 생각을 했던 백리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에서 조운비는 분명히 등천관 내에서 자신의 수준을 충분히 납득하는 것으로 보였었다.
‘그럼 뭐지? 나한테 검을 배우겠다는 건가? 직접적으로 가르쳐 달라고 하기는 창피하니까 비무를 핑계로?’
백리연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봐주면서 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홱 돌아서며 앞장서서 동굴을 나서는 백리연의 목소리에는 왠지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곧 조운비와 백리연은 동굴 앞쪽에 있는 자그마한 공터에 마주 섰다.
“먼저 할 수 있는 공격을 해 보도록 해.”
왠지 조금은 부드러워진 백리연의 목소리였다.
백리연의 말에 조운비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조심해.”
조운비의 조심하라는 말에 실소를 짓던 백리연은 순식간에 거리를 단축하며 날아드는 조운비의 모습에 얼굴을 당혹감으로 물들이며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빠르다.’
잠시 머릿속을 스치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싸늘한 청색 검광이 백리연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파팡!
“으윽!”
감각적으로 휘두른 검으로 조운비의 검세를 막은 백리연은 신음을 삼키며 튕기듯 뒤로 물러섰다.
당황해서 제대로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한 탓에 타격이 적지 않은지 순간적으로 호흡이 막히고 팔이 떨려 왔다.
어느새 다가선 조운비의 검에서 다시 청광이 피어올랐고, 치켜 올려진 백리연의 검에서 혈광이 치솟았다.
파파팡!
가벼운 폭음과 함께 잠시 주춤거리던 백리연의 검이 혈광을 뿌리며 조운비를 덮어 갔고, 조운비는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백리연의 검세를 막아 갔다.
‘역시 팔로세로 공격하는 것은 어렵지만 방어는 어느 정도 가능하군.’
팔로세에는 검식에 따른 운용요결이 없다 보니 내공을 담은 빠른 공세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자신의 예민한 감각이면 조금 느리더라도 방어에는 활용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조운비는 백리연과 비무를 하며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운비가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백리연의 검세는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백리연의 검을 간신히 쳐 낸 조운비가 튕기듯이 뒤로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그만! 내가 졌어.”
조운비의 말에도 불구하고 백리연의 검은 여전히 혈광을 뿌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만! 졌다니까.”
얼굴에 당혹감을 떠올린 조운비의 목소리에는 다급함마저 섞여 있었다.
채챙!
“크윽!”
간신히 백리연의 검을 막은 조운비의 몸이 다시 뒤로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가는 조운비의 시선에 입술을 깨문 채 차가운 표정으로 다가서는 백리연의 모습이 보였다.
‘또 왜 저러는 거야?’
미간을 찌푸린 조운비에게는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조운비의 검에서 다시 청광이 피어올랐다.
파팡!
잠시 후, 백리연은 칙칙한 검은 빛깔의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신음을 삼키고 있는 조운비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네 녀석의 수준을 알겠지?”
조운비는 어이없음과 씁쓸함이 뒤섞인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해도 되지 않겠어?”
백리연은 조운비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문뜩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초반의 당혹감과 잠시나마 한참 아래로 보고 있던 조운비에게 밀렸다는 충격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만 하자는 말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공세를 퍼부어 조운비에게 상처를 입히고 모멸감을 느낄 만한 말까지 쏘아붙였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조운비의 입가와 오른쪽 어깨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뜩 가슴 한편이 찌릿해지는 느낌에 백리연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입 밖으로 뱉어 낼 수가 없었다.
“후우!”
가벼운 한숨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조운비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천천히 동굴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을 스쳐 지나 뒷모습을 보이는 조운비의 모습에 백리연은 왠지 모를 서러움을 느끼며 말없이 동굴로 향했다.

조운비는 동굴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자리를 잡고 태허심공의 운기를 시작했다.
내상이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내상을 가라앉히고 눈을 뜬 조운비의 앞에는 어두운 표정의 백리연이 힘없이 앉아 있었다.
“괘, 괜찮아?”
기어들어 가는 듯 작고 힘없는 백리연의 목소리에 조운비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비무를 할 때는 악귀라도 된 듯하더니 저런 처량한 태도는 또 뭔지……. 정말 난해하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
분명 막무가내로 자신을 몰아세우던 백리연에게 꽤나 화가 났었다. 게다가 목에 검을 들이대고 네 주제를 알겠냐는 식으로 말을 하는 모습에는 순간적으로 분노까지 일었었다.
‘후, 어차피 사실이 아닌가.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인데 화를 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
조운비는 시선을 들어 잠시 백리연의 모습을 차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불안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그런 백리연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내 행동의 무엇인가가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것 같은데.’
조운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괜찮아.”
조금은 부드러워진 조운비의 목소리에 백리연의 입가에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지 눈동자를 살짝 굴리던 백리연이 조운비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런데 아까 처음에 사용한 초식은 뭐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숙부님의 혈삼성하고 비슷한 느낌이 들던데.”
“음, 바탕은 혈삼성이 맞아. 혈삼성에서 변화를 지우고 검세를 하나로 합친 거지.”
백리연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숙부님께 배운 거야?”
조운비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고쳤어.”
조운비의 대답에 백리연은 당혹감을 떠올리다 눈썹을 치켜떴다.
“너 미쳤어? 아무리 다급하다고 해도 그렇지, 조금만 잘못되면 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몰라서 그러는 거야?”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백리연이었다.
‘또 소리를 지르는군.’
조운비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왜 대답을 안 해? 몰라서 그런 거야? 미친 거야?”
이어지는 백리연의 고성에 조운비는 조금은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리는 그만 지르고 내 말도 좀 들어 주겠어? 설명을 해 줄게.”
나직한 조운비의 목소리에 백리연은 말문이 막혔다.
소리 좀 그만 지르라는 말에 문뜩 당혹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게 아닌데, 또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언성부터 높였네. 왜 자꾸 이러는 거지?’
조운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내가 익힌 심법 중에 조금 특이한 것이 있어. 혈맥이 꼬이거나 역류하는 걸 막아 주는 효과가 있지. 어느 정도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치료가 가능하고.”
백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심법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데?”
“고해심결이라고 해.”
“그런 대단한 심법을 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지?”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 백리연의 말이었다.
“창안한 사람 말고는 익히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은 다 죽거나 폐인이 됐다고 하더군. 나는 운이 따라 줬는지 익힐 수가 있었어. 이 정도면 설명은 충분한 것 같은데, 더 궁금한 게 남아 있어?”
잠시 생각을 해 보던 백리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한 가지만 부탁을 할게.”
“뭔데?”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소리 지르는 건 이제 그만 해 줬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어?”
차분한 조운비의 말에 백리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건 네가 사전 설명 없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잖아. 먼저 이해가 가게 설명을 해 줬어야지.”
다시 백리연의 목소리가 뾰족해지자, 조운비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싸늘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아직 숲의 푸른빛조차 가시지 않은 초가을임에도 운해를 뚫고 우뚝 솟은 산봉우리의 바람은 한겨울의 삭풍을 무색하게 할 만큼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바람이 담고 있는 차가움에 추위를 느끼기라도 하는 듯 돌계단의 주변에 늘어서 있는 나무의 잎사귀들은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이제 다 왔구나. 저기 보이는 곳이 이 늙은이가 사는 곳이란다.”
눈썹이 하얗게 센 늙은 비구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끝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