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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22화)
제7장 월하영령 (3)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린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던 이옥화는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남해신니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숲의 끄트머리쯤에 민둥하게 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바위 봉우리를 등지고 아담하게 느껴지는 사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아!”
지쳐서 내쉰 숨소리인지 탄성인지 구분하기 힘든 가벼운 한숨이 뿌연 입김을 만들며 이옥화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힘들지? 조금만 더 힘을 내자꾸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이옥화를 바라보던 남해신니는 이옥화의 조그마한 손을 쥐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옥화는 남해신니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따사로운 기운에 한기가 가시는 것을 느끼며 총총히 발을 움직였다.
이옥화에게 맞춘 걸음이라 빠르다 할 수 없는 속도였지만, 어느새 두 노소의 앞에는 보타암의 소박한 정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림 중의 문파라면 지키는 이 한둘 정도는 있어야 할 정문은 인적도 없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끼이익!
남해신니의 가벼운 손길에 문이 열리자 멀리서 비질을 하고 있던 젊은 비구니가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남해신니는 그러한 모습에 흐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수고가 많구나.”
자애로움이 담긴 신니의 목소리에 젊은 비구니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안에 아뢰어 올리겠습니다.”
“되었다.”
신니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가로저으며 젊은 비구니를 지나쳤다.
느릿한 신니의 발걸음이 소박한 몇 개의 전각을 지나고 몇몇 비구니의 인사에 자애로운 웃음으로 답했을 때, 노소의 눈앞에는 다른 소박한 건물들에 비해 조금이나마 웅장하게 느껴지는 전각의 모습이 보였다.
대웅전 앞을 총총히 오가던 비구니들이 안으로 들어서는 신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눈을 치떴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신니가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자, 한 중년의 비구니가 다가서며 허리를 굽혔다.
“편히 다녀오셨습니까.”
신니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애는 안에 있느냐?”
“네, 장로 분들도 함께 계십니다. 먼저 아뢰겠습니다.”
신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옥화의 손을 끌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꽤나 널찍한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에 들어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한쪽의 대탁에 앉아 있던 지긋한 나이로 보이는 네 명의 노승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접었다.
“사백을 뵙습니다.”
신니는 미소를 떠올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 잘들 지냈는가?”
대탁의 상석에 자리하고 있던 노승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이야 언제나 한결 같지 않습니까. 다녀오신 일은 좋은 결과가 있으셨는지요?”
신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헛걸음을 하지는 않았다네.”
상석의 노승, 현 보타암의 암주인 무애는 신니의 대답에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헌데 저 아이는?”
무애는 이옥화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궁금증 어린 눈빛으로 신니를 바라보았다.
무애의 물음에 신니는 잠시 이옥화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천에서 나와 인연이 닿은 아이라네.”
“사백님과 인연이 닿았다 함은?”
신니의 말에 무애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사백인 남해신니는 외유를 하다 굶주린 고아들을 보면 종종 데려오곤 했다.
그렇게 보타암에 몸을 담게 된 여승들의 수도 적다고 할 수 없었으니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며 물었던 것인데 사백이 이전에 들은 적이 없는 대답을 하니 무애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백이 아이들과 함께 올 때면 언제나 데려오게 된 사정을 설명했지, 인연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무애의 의문 섞인 물음에 남해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짐작하는 것이 맞을 것이네.”
놀람이 적지 않은 듯 무애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제자로 거두려 하십니까?”
신니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신니의 대답에 대탁 주위에 서 있던 다른 노승들의 얼굴에도 놀람과 함께 가벼운 흥분감이 떠올랐다.
강호의 최고수들을 논하면 언제나 빠지지 않는 사백이었지만 자신들의 수없는 권유에도 지금껏 제자를 들이지 않아 거의 포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늦게나마 사백이 마음이 바뀐 것이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놀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무자 항렬의 막내인 무화가 문뜩 떠오른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사백, 그럼 그 아이의 항렬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무화의 물음에 무애를 비롯한 다른 노승들도 미간을 찌푸렸다.
남해신니의 제자가 되면 암주인 무애와 같은 항렬이 되는 것이니 생각해 보면 간단히 넘어갈 문제는 아니었다.
남해신니도 그 부분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듯 난감한 기색을 떠올렸다.
잠시 후 무애가 남해신니에게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사백, 항렬이 너무 높으면 추후 저 아이가 외부에 나가는 경우에도 난감한 일이 적지 않을 겁니다.”
남해신니의 얼굴에 가벼운 기대감이 떠올랐다.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명목상으로는 제가 거두는 것으로 하면 될 듯합니다. 제 막내 제자와도 나이 차이가 꽤 나겠지만 그래도 챙겨 줄 사형제들이 있으면 저 아이에게도 더 좋지 않겠습니까?”
무애의 말에 남해신니가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그럼 우선 삭발과 수계식을 할 날이나 잡아 보도록 하게.”
남해신니의 손을 꼭 쥔 채 조금은 불안한 얼굴로 신니와 무애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던 이옥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고 신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스님이 되는 건가요?”
이옥화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신니가 고개를 숙여 이옥화와 시선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왜, 스님이 되는 것이 싫은 게냐?”
신니의 물음에 이옥화의 얼굴에 갈등이 떠올랐다.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하는 이옥화의 모습에 무애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삭발을 하는 것이 싫은 것이냐?”
무애의 물음에 시선을 돌린 이옥화가 잠시 생각을 하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불안한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신니와 노승들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무애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사백,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도 아니고 스스로 불가에 귀의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도 아니니 삭발이 겁이 날 만도 할 겁니다. 우선 수계식만 하고 삭발은 조금 시간을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웃음 어린 무애의 말에 신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낮인 듯싶었다.
울창한 원시림과 끈적거리는 트릿한 습기에 가려 그다지 환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부분 부분 비춰 든 햇살이 힘겹게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동굴 앞 자그마한 공터에 차분한 모습으로 검을 세우고 있는 조운비의 모습은 상당히 초췌하게 보였다.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광대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말라 있었고, 입술은 희게 보일 정도로 메말라 갈라져 있었다.
마치 맨몸으로 사막이라도 헤맨 모습이었지만, 묘하게도 눈빛만은 생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조운비의 몸이 움찔하더니 튕기듯 정면을 향해 날아갔다.
슈욱!
순간적으로 조운비의 몸이 흐릿해지는 듯하더니 오 장 앞에서 한기가 느껴지는 청색의 검광이 치솟았다.
“후우!”
몸을 세운 조운비가 검을 내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짝짝짝!
동굴 입구 쪽에서 경쾌한 느낌을 주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 멋진걸? 그 정도면 등천관의 누구라도 쉽게 막기는 힘들 거야.”
밝은 느낌의 목소리에 조운비가 시선을 돌리며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쉽게 막아 내지 못하는 정도로는 힘들지. 나로서는 전력을 다하는 일보와 일검이니까. 상대가 막아 내고도 여력이 남는다면…….”
굳이 뒷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진영령은 그다음 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오히려 운비가 당하게 되겠지.’
문뜩 떠오른 생각에 잠시 미간을 찡그렸던 진영령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네 존재를 느끼지 못한 상황에서 그런 공격을 받고도 여력을 남길 수 있을 만한 녀석은 등천관 안에서도 스무 명도 채 안 될 거야. 으음…… 그리고 지난 세 달 동안의 네 성취는 믿을 수 없을 정도야. 으음, 그러니까 미리 걱정하지는 마.”
중간 중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진영령의 모습에 조운비는 실소를 지으며 동굴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장을 걱정하는 건 아니야. 문제는 지금 내가 얻은 성취가 편법에 가깝다는 거지. 내공이 늘어나는 만큼 더 강해지기는 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손해가 될 수도 있어.”
조운비는 지난 삼 개월 동안 혈삼성을 고쳐서 만든 한 초식의 검법과 뇌전비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했다.
열흘에 한 번 정도 번갈아 가면서 들르는 백리연과 진영령이 외워 온 기초적인 검법과 심법들을 통해 이해력을 높인 덕분에 조운비의 일보와 일검은 더욱 빠르고 강해졌지만, 현재의 시점에서는 한계가 명확하게 보였다.
사용하는 내공에 비례해 더 빨라지고 강해질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공의 한계라기보다는 내 능력의 한계겠지. 이제 다른 방법을 찾을 때가 된 것인가?’
조운비의 걸음이 자신을 지나쳐 동굴 안으로 향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영령이 잰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근데 아까 사용한 초식은 이름이 뭐야?”
뒤를 따르던 진영령이 짤랑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 안 해 봤는데.”
“정말? 그래도 네가 처음으로 만든 무공인데.”
“조금 고친 것뿐이야.”
“아니지, 고쳤다고 해도 전혀 다른 초식이잖아. 네가 만든 거나 다름없어.”
계속되는 진영령의 반박에 조운비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실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다고 해 두지, 뭐.”
무성의하게 들리는 조운비의 대답에 진영령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볼을 부풀리며 입 꼬리를 삐죽거렸지만 앞장서서 걷고 있는 조운비가 알 리가 없었다.
조운비의 등이 조금씩 멀어져 가자, 진영령이 폴짝거리듯 다시 잰걸음을 옮겼다.
“그럼 그 초식, 내가 이름 지어도 돼?”
“그래, 그렇게 해.”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그리고 누가 물어도 내가 지어 준 이름으로 대답해야 해. 약속해!”
“하하하! 알았어. 그렇게 할게.”
떼를 쓰는 듯한 진영령의 말에 조운비는 문뜩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운비의 대답에 진영령은 걸음을 멈추며 팔짱을 꼈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 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영령의 입 꼬리가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럼 이제부터 그 초식 이름은 월하영령이야, 월하영령! 딴소리 안 한다고 했지? 호호호!”
멈칫하며 걸음을 멈춘 조운비가 고개를 돌렸다.
당혹감마저 떠올라 있는 조운비의 떨떠름한 얼굴을 보며 진영령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턱 끝을 가볍게 치켜들었다.
“설마 고자도 아닌 당당한 사내가 딴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진영령의 이어지는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조운비가 실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알았어.”
조운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 초식 이름이 뭐라고?”
진영령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다시 귓속을 파고들었다.
“초식 이름이 뭐냐고?”
조운비가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진영령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래, 월하영령!”
“헤헤!”
진영령은 얼굴에 꽃이 만개라도 하는 듯 밝은 웃음을 떠올리고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조운비의 등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동굴이 막힌 안쪽까지 들어선 조운비는 곧 자리를 잡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진영령도 조운비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조운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진영령이 문뜩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 무공도 약한 데다 별나게 잘생긴 것도 아닌데, 묘하게 매력이 있단 말이야.’
지난 삼 개월 동안 진영령은 거의 이삼 일에 한 번씩은 이 동굴을 찾아왔다.
실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자주 올 필요는 없었지만, 백리연과 진영령은 경쟁이라도 하듯 이곳을 찾았다.
‘한번 사귀자고 해 볼까?’
문뜩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진영령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가 조심스럽게 조운비를 향해 눈을 흘겼다.
‘뭐야! 생각해 보니까 웃기네. 이쯤 됐으면 먼저 사귀자고 할 수도 있잖아. 지가 무슨 나무토막이라도 되는 줄 아나?’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인지 진영령은 초반부터 조운비에게 강한 끌림이 있었고, 본래 그다지 숨김이 없는 성격이다 보니 그러한 감정은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하물며 당사자인 조운비가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뚫어져라 조운비를 바라보며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진영령은 조운비가 눈을 뜨자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뒤로 재꼈다.
그런 진영령의 모습에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만 가 봐야 하지 않아? 조금 있으면 날이 저물 것 같은데.”
진영령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갈등의 기색이 떠올랐다.
조운비의 말마따나 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다른 지역이라면 어둠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의 무공을 가진 진영령이었지만 사망지의 밤은 달랐다.
날이 저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하고 독기마저 섞여 있는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다.
가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기는 했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삼 일 만에 보는 건데…….’
잠시 고민을 하던 진영령이 고개를 왼쪽으로 숙이듯 돌리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내일 가면 안 될까?”
진영령의 말에 조운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