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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23화)
제7장 월하영령 (4)
아직 어린 나이라고는 해도 남자와 단둘이 밤을 보내겠다는 여인의 말은 조금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할 법도 했지만 조운비는 아직까지 진영령의 아쉬움조차 이해하지 못할 만큼 남녀 관계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다.
“사무린이 너와 연이를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야.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은 위험하다는 거 모르지 않잖아.”
차분한 조운비의 말에 진영령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홱 하니 몸을 돌렸다.
“그래, 잘났어!”
뾰족하게 들리는 진영령의 목소리에 조운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진영령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뭐라고 투덜거리며 바닥을 걷어차듯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간다는 말도 없이 동굴을 나서는 진영령의 등을 바라보던 조운비가 문뜩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내일 보자.”
잠시 몸을 세우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영령이 몸을 홱 틀며 날 듯 조운비의 앞으로 돌아왔다.
“뭐라고?”
진영령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닿을 듯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조운비는 얼굴을 간질이는 진영령의 따스한 입김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틀었다.
“내일 보자고 했어. 나 내일부터 무각에 가려고.”
진영령은 동그래진 눈을 더 크게 치뜨며 경악성을 내뱉었다.
“뭐? 무각에 간다고?”
“응. 마냥 이렇게 숨어만 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
“미쳤어? 넌 사무린과 귀무단의 표적이야. 죽고 싶어서 그래?”
진영령은 있는 대로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분기마저 섞여 있는 진영령의 목소리에 조운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에 가득 묻어 있는 자신에 대한 걱정이 그리 싫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런 결정을 내렸으리라 생각하는 거야?”
입가에 미소를 떠올린 조운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진영령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봐 온 조운비의 모습을 생각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결론을 내렸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잖아.’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진영령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무, 물론 너도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을 거라 믿어. 하지만…….”
“그만.”
조운비는 나름대로 설득을 해 보려던 진영령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지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네 걱정은 충분히 짐작하고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위험하다고 마냥 이곳에 숨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점점 뒤처지다가 결국에는 사냥을 당하는 신세가 되겠지. 그리고 난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 이곳에 온 거야. 위험하다고 두더지처럼 숨어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어.”
자신을 바라보는 조운비의 진지한 눈빛에 진영령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운비의 입가에 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걱정하지 마.”
조운비는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영령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늦겠다. 어서 가.”
“어? 으응.”
진영령은 조운비의 재촉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을 하고도 한동안 조운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왠지 믿어도 될 것 같아. 아니, 그냥 믿고 싶은 건가?’
조운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영령의 눈동자에 어느 순간 묘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조운비는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진영령의 시선이 왠지 거북하게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진영령이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조운비에게 닿을 듯이 다가섰다.
“왜?”
조심스럽게 다시 진영령과 시선을 맞추며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연 조운비를 향해 진영령의 얼굴이 느릿하게 다가서기 시작하자 조운비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조운비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사이, 진영령의 자그마한 입술은 조운비의 입술을 가볍게 덮어 왔다.
조운비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에 아무런 생각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조운비는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부드러운 촉감과 함께 나긋한 한 쌍의 팔이 느릿하게 목을 둘러 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상태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조운비는 느낄 수 없었다.
몽롱한 기분에 휩싸여 있던 어느 순간 조운비는 입술이 허전함을 느꼈고, 조금은 떨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직 어려서인지 이게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어. 근데 나 언제부터인지 네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언제나 네가 보고 싶고, 네 옆에 있고 싶어. 널 믿지만 조심해 줘. 나, 날 위해서도…….”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리는 진영령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조운비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무지 입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조운비의 품이 허전해졌고, 진영령은 재빨리 몸을 돌려 동굴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넌 내 거야! 연 언니라고 해도 절대 양보 못해!”
동굴 입구에서 진영령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왔다.
제8장 무각 (1)
등천관 내에 유일하게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춘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 등천관의 입구이기도 한 이곳을 아이들은 ‘무각’이라 불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십여 명의 교두와 필요한 무공을 얻을 수 있는 비고가 존재하는 곳이니 무각이라는 이름이 썩 어울리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아이들로 무각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광장은 어느새 북적거리고 있었다.
등천관이 열린 지 육 년이 지난 시기부터 매 열흘마다 보이는 풍경이었다.
처음 삼 년간의 내공 수련, 다시 삼 년간 무공의 기반을 잡아 주는 수련 과정. 그렇게 육 년의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약육강식과 밀림으로 내몰렸다.
그 이후로 무각은 매 열흘에 한 번 문을 열었고, 비고가 개방되었다.
교관들은 묻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비고를 뒤져 자신에게 맞는 무공을 찾아서 익히고 모르는 것은 교관들에게 물으며 생존을 위해 미친 듯이 수련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불규칙하게 광장을 메우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리더니 아이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광장 정면의 건물에서 교관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느긋한 걸음의 교관들이 건물을 뒤로하고 서로 이 장 정도의 거리를 벌린 채 몸을 세우자 아이들은 재빠르게 교관들 앞에 줄을 맞췄다.
정해지기라도 한 듯 교관들 앞에 줄을 선 아이들의 숫자는 엇비슷했다.
곧 교관들은 들고 있는 상자를 열어 아이들에게 검지 마디만 한 크기의 붉은색 환단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내공 수련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마화단은 아이들이 열흘에 한 번씩 무각에 오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고, 교관들이 아이들을 관리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문뜩 마화단을 나눠 주던 교관들의 시선이 잠시 광장 입구를 향했다.
이제야 도착한 듯한 아이가 광장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몇몇 교관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줄을 서 있던 아이들 중에도 시선을 돌리는 아이들이 생겨났고, 장내에는 잠시 묘한 술렁임이 일었다.
꼭 교관들보다 먼저 와 있어야 한다는 규정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예 안 오는 경우라면 모를까 교관들보다 늦게 오는 아이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다.
“누구지?”
“못 보던 얼굴 같은데…….”
조운비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하자, 아이들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올랐다.
“확실히 처음 보는 녀석이야.”
등천관이 열린 것이 이미 칠 년이 넘었다.
아직 오백이 넘는 인원이 남아 있다고는 해도 모르는 얼굴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한 번 살피고는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몇 개월 전인가 새로 들어왔다던 그 녀석 아닐까? 혈귀를 죽였다던…….”
말을 꺼낸 아이는 혈귀라는 말을 더욱 작게 하며 무의식중에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맨 앞줄에 선 덕에 이미 마화단을 받아 몸을 돌리고 있던 사무린의 입가에는 재미있다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소고!”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줄 중간쯤에 있던 흑의 소년이 재빨리 사무린에게 다가섰다.
“저 녀석이야?”
소고는 불안감이 떠오른 눈빛으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 그놈이 분명해.”
소고의 대답에 사무린은 입 꼬리를 묘하게 비틀며 눈빛이 번뜩였다.
어이가 없어 묻기는 했지만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건가? 아니지. 아니야. 그런 이유라면 삼 개월 동안 두더지 새끼처럼 숨어 있었을 리가 없잖아.’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무린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맞아, 맞아. 저 새끼가 두더지처럼 흙만 파먹고 살다가 맛이 간 거야. 설마 이 사무린과 귀무단이 우습게 보여서일 리는 없잖아?”
한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사무린이 갑자기 표정을 싸늘하게 바꾸며 소고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소고는 사무린의 싸늘한 목소리와 살기 어린 눈빛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 맞아! 미, 미친 게 트, 틀림없어. 누가 감히 단주를 우습게 생각하겠어.”
소고의 힘겨운 대답이 끝날 무렵, 사무린의 뒤쪽에서 나른함이 그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보기에는 우습게까지는 아니래도 만만하게 정도는 보는 것 같은걸.”
사무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상관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저 녀석 봐. 당당하잖아. 눈 씻고 봐도 불안감 따위는 없어. 게다가 전혀 미친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걸.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야.”
사무린의 눈에 순간적으로 붉은 기운이 떠올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각 내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지.’
무각 내에서의 싸움은 금지되어 있었다.
교관들 외에도 적지 않은 무사들이 상주하고 있는 이곳에서 시비를 일으켜 봤자 무슨 결과가 얻어지기도 전에 제압될 수밖에 없는 데다 그에 대한 체벌은 극악할 정도였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상황에서 괜한 일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무각을 벗어나는 순간이 네놈이 죽는 시간이다.’
어느덧 조운비는 아이들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고, 정면의 가장 가까운 줄의 끝에 몸을 세웠다.
잠시 흘끔거리던 주변의 몇몇 아이들이 조운비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분위기에 고개를 돌렸다.
등천관 내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던 혈귀를 죽인 것으로 짐작되는 조운비와 굳이 시빗거리를 만들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화단을 받은 아이들은 비고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조운비가 가시 같은 수염이 얼굴을 뒤덮고 있는 중년 교관 앞에 몸을 세웠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잠시 조운비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교관이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삼 개월 전에 새로 들어왔다는 놈이 네놈이냐?”
“그렇습니다.”
“아직 뒈지진 않았었구나. 네가 혈귀를 죽였느냐?”
“그렇습니다.”
털보 교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곧 뒈지겠구나.”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조운비의 모습에 교관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 그럼 열흘 후에도 다시 네놈을 볼 수 있겠구나?”
“물론입니다.”
조운비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교관은 통쾌하다는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이름이 뭐냐?”
“조운비라고 합니다.”
한동안 웃던 교관이 마화단을 건네주자, 조운비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난 장 교관이다.”
장 교관의 목소리에 잠시 몸을 세웠던 조운비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운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 교관의 눈동자에 잠시 묘한 빛이 맴돌다 사라졌다.
아이들의 움직임을 뒤따르던 조운비는 자신을 향해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몇몇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무시하며 비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무린이라는 녀석과 귀무단의 아이들인가 보군.’
어느새 조운비의 눈앞에 바위산을 뚫어서 만든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고’라는 글씨가 크게 음각된 동굴의 입구에는 몇 명의 흑의 무사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나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의외로 비고에 들어가는 아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비고가 개방된 지 일 년이 넘은 시기이다 보니 새로운 무공을 배우려는 아이들보다는 익힌 무공을 지도받기 위해 교관들이 있는 수련관으로 향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조운비는 차분하게 비고의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횃불들로 비고의 안은 그리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입구에서 얼마간 들어서서 커다란 광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조운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바위산 안에 이런 규모의 시설을 만들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조운비는 시선을 옮기며 광장을 한번 둘러보았다.
광장의 전면으로는 십여 개에 이르는 문들이 늘어서 있었고, 각 문의 위쪽으로는 다양한 무공의 종류들이 써져 있었다.
검법과 신법이라 적힌 문을 번갈아 바라보던 조운비는 검법이라 적힌 문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앉아 있던 중년의 무사가 잠시 지나치는 조운비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문 안으로 들어선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수천 권은 되어 보이는 서책들이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도 모자랐는지 뒤쪽으로도 몇 개의 책장들이 보였던 것이다.
돌로 만들어진 책장들은 크게 셋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전면에 보이는 책장의 위쪽으로는 초급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고 뒤쪽으로 중급과 고급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중급을 먼저 봐야 할까? 아니면 고급? 연이나 영령이 익히고 있는 검법들은 고급인가?’
잠시 고민을 하던 조운비는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중급이라고 쓰인 서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단 읽어 보고 판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