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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24화)
제8장 무각 (2)


서가로 다가선 조운비의 미간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너무 많군. 그저 읽기만 한다고 해도 몇 개월은 걸리겠는걸.’
전면의 초급이라 적혀 있는 책장처럼 수천 권의 서책들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얼핏 보아도 서책의 수는 수백 권에 이르고 있었으니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열흘에 한 번씩밖에 출입을 못하는 상황이니, 운이 나쁘면 자신이 원하는 무공을 찾는 데만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는 것이다.
‘연이나 영령에게 조금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육 년간의 초기 과정에서 담당 교관들이 성향에 어울릴 만한 무공을 몇 가지씩 추천해 주기도 하고, 천마신교에 일가가 있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입관하기 전부터 미리 익힐 무공을 생각하고 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조운비로서는 실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일단 오늘은 읽어만 보자.’
조운비는 생각과 함께 서가로 시선을 던지며 손을 뻗었다.
‘비천검, 청살마검, 역천구검, 단혈칠식……. 후우! 제목만 봐서는 아무것도 모르겠군.’
서가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조운비에게 ‘팔로검’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조운비의 손은 어느새 팔로검이라는 제목의 서책을 꺼내 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익히고 있는 팔로세와 이름이 비슷해 반사적으로 손이 간 것이다.
책을 펼치고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조운비의 얼굴에는 가벼운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무엇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팔로세와는 그다지 연관이 없는 검법이었던 것이다.
잠시 책을 덮을까 망설이던 조운비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팔로세와 상관없다는 생각에 실망하기는 했지만, 굳이 다른 검법을 찾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팔로검은 여덟 가지의 초식과 그에 따른 적지 않은 수의 변초와 연환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동안 비급의 내용에 심취해 있던 조운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적지 않은 데다 생각보다 너무 수준이 높게 느껴졌다.
‘각 초식의 위력이 혈삼성에 비해 거의 손색이 없다. 그런데 중급이라는 건가?’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던 조운비는 다시 비급으로 시선을 옮겼다.
당장 검법 자체를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새롭게 알게 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한동안 삼매경에 빠져 있던 조운비가 문뜩 책에서 시선을 떼며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사무린은 거의 기척을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고에 들어서기 무섭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조운비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상관진도 이 정도 거리에서 내 움직임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소고의 보고가 사실이라는 건가?’
실상 조운비가 기척을 느낀 것은 무공보다는 고해심결로 예민해진 감각 덕분이었지만, 사무린이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무린은 왠지 기분이 찜찜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복잡해지는 심사와는 달리 사무린은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여! 삼 개월 간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더니 드디어 기어 나왔군. 어디서 독초라도 잘못 처먹은 거냐?”
말이 끝날 무렵, 사무린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스쳤다.
다가서는 사무린을 잠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던 조운비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닮았군.”
조운비의 뜬금없는 말에 잠시 의문을 떠올렸던 사무린의 얼굴이 곧 분기로 물들었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조운비의 표정과 말투에 섞여 있는 비웃음은 충분할 만큼 사무린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호라! 어차피 죽을 것이니 겁날 이유도 없다는 것이냐? 두더지 새끼처럼 숨어 있던 놈치고는 용기가 있구나.”
하는 말과는 달리 사무린은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관진의 말마따나 너무나 자신만만하다. 도대체 뭘 믿고? 설혹 놈의 무공이 나를 넘어선다고 해도 내겐 귀무단이 있다. 도대체 뭐냐?’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사무린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무의식적으로 조운비의 무공이 자신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했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다. 불과 삼 개월 전에 입관한 녀석이다. 나이도 나보다 적으면 적었지, 많지는 않다. 저 녀석의 무위가 나를 능가한다면 등천관 따위가 필요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조운비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사무린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라도 되는 듯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 미친 녀석의 형이냐, 동생이냐?”
조운비의 물음에 사무린은 닮았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더욱 의문이 깊어졌다.
사무진, 이곳에서 혈귀라 불렸던 녀석은 모친이 다르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신기할 정도로 자신과 닮은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사무린의 의아함을 알고 있다는 듯이 곧 조운비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제를 모르고 입만 나불거리던 혈귀라는 녀석은 반 토막이 나서야 조용해지더군.”
사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 사무린은 그 감정의 정체가 분노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네, 네놈이 감히…….”
“후훗! 말 더듬는 것조차 비슷하군. 역시 한 핏줄이라는 건가?”
사무린의 얼굴에서 더 이상 미소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사무린의 얼굴은 타오르듯 붉게 물들어 있었고, 꽉 움켜쥔 두 주먹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한 가지 다른 점도 있군. 그놈과 달리 네 녀석은 겁먹은 자라 새끼처럼 참을성이 좋구나. 하하하!”
조운비는 고개를 가볍게 들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무린은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진한 살기를 내뿜으며 폭발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조운비의 몸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삼 장의 거리를 한 걸음에 단축한 조운비가 솟아오르기라도 한 듯 사무린의 눈앞에 나타났다.
반쯤 이성을 잃고 있던 사무린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피하긴 늦었다.’
사무린은 전신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우선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검을 잡아 갔지만, 조운비의 검에서 일렁이던 청광은 빛살처럼 사무린의 미간을 덮치고 있었다.
‘마, 막을 수 없다.’
두려움보다는 허탈함이 머릿속을 뒤덮고 있었다.
사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꺼져라!”
나직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사무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의 미간과 불과 반 자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어 있는 검과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조운비의 모습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사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다.
멍한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라도 덤벼라, 겁 많은 자라 새끼.”
들릴 듯 말 듯한 조운비의 목소리에 사무린은 진한 수치심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천천히 검을 거두는 조운비의 모습을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무린이 휙 몸을 돌리며 재촉하듯 걸음을 옮겼다.
돌아서 걸음을 옮기는 사무린의 꽉 깨문 입가로 진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 이게 무슨! 주, 죽여 주겠다. 최대한 잔인하게!’
순식간에 사무린의 모습은 서고에서 사라졌고, 잠시 입구를 바라보고 있던 조운비가 쓰러지듯 책장을 잡으며 허리를 굽혔다.
“컥!”
조운비의 입에서 터지듯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죽였어야 했는데.’
시체처럼 창백해진 조운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운이 따른 것인지 모든 것이 생각했던 대로였다.
짐작대로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 사무린이 자신을 찔러 보기 위해 뒤따라왔고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었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곳이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나 무각이라는 장소는 사무린에게 방심과 거리낌이라는 짐을 지웠다.
그런 상황만을 노리고 있던 조운비는 내상까지 감수하며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운은 거기까지였다.
너무 무리한 탓에 중도에 진기가 끊어진 것이다.
아마 사무린이 조금만 더 버티고 있었다면 조운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운비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품에서 붉은빛 환단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힘겹게 환단을 삼킨 조운비는 윗도리를 벗어 바닥에 흐른 피를 닦고는 책장을 짚으며 천천히 서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처만 입히고 말다니……. 이제 어떻게 나올까? 어설프게 건드려서 독만 오르게 만든 건가?’
눈에 띄지 않는 서고의 뒤쪽까지 걸음을 옮긴 조운비는 쓰러지듯 주저앉아 태허심공을 끌어올렸다.
마화단의 기운인지 후끈한 느낌이 몸을 휘감았다.
내상을 다스리기 위해 심공을 운기하면서도 조운비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사무린을 죽였어야만 했다.
사무린이 없으면 귀무단이 자신을 쫓을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고, 귀무단 자체가 흩어질 확률도 높았다.
무각에서 살인을 하면 육 개월 동안 움직일 수도 없는 독방에 갇히는 처벌을 받았겠지만 사무린이나 꺼릴 일이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조운비로서는 마다할 일도 아니었다.
조운비는 애써 머릿속의 생각들을 지워 나갔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차선으로 생각해 둔 계획을 진행하면서 상황을 본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나고 조운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공에 득은 없었지만 마화단 덕에 내상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군.’
서고에 들어서는 아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너무 오래 시간을 끌면 누군가의 눈에 띌 수도 있었다.
조운비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시 중급 서고에 자리를 잡은 조운비는 팔로검을 꺼내 들었다.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 지 한 시진쯤 되었을 무렵, 조운비의 눈빛이 묘하게 번뜩였다.
‘많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팔로세와 겹치는 초식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거의 공통점이 없었지만, 변초의 일부분은 팔로세와 거의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조운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로세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심이 되는 움직임이다. 다른 검법에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이 이상하기보다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의문과 놀람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했지만 조운비는 무엇인가 놓친 것이 있는 것 같아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
탄성과 함께 반 식경 가까이 생각에 잠겨 있던 조운비가 고개를 들었다.
“가능할까?”
조운비는 의문 섞인 말을 내뱉으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뜩 머릿속을 스친 생각의 단초를 잡기는 했지만, 조운비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처음 비고에 들어올 때는 자신에게 맞는 검법을 찾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문뜩 떠오른 생각은 조운비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팔로검에 포함되어 있는 팔로세와 흡사한 초식에는 운용요결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기본적이고 바른 초식들의 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 팔로세의 특성을 감안하면 다른 검법들에도 분명히 비슷한 초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었고, 그 생각의 끝은 운용요결이 포함된 비슷한 초식들을 모아 운용요결이 포함된 팔로세로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얼토당토않은 생각이었고 주화입마에 들려고 작정한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발상이었지만, 이미 고해심결에 의지해 혈삼성을 뜯어고친 경험이 있는 조운비에게는 어느 정도는 가능성이 있는 듯 느껴졌다.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운용요결이 있다고 해도 연환식이 없고 연결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리고 굳이 팔로세에 연연할 필요가 있는 걸까? 새로운 검법을 익히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잠시 후 조운비는 세차게 고개를 한 번 흔들고는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새로 시작해서는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리고 초식 자체만으로는 팔로세를 능가하는 검법은 드물 것이다.’
어쩌면 좌세량의 말에 너무 의지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조운비 또한 그동안 느낀 바가 적지 않았다.
‘주저하기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운비는 눈을 빛내며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조운비는 누군가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흑의인이 다가서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뱉어 냈다.
조운비는 아쉬움이 남는지 잠시 들고 있던 팔황검해를 잠시 바라보다 책장에 꽂고는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열 권의 비급에서 열일곱 가지의 비슷한 초식을 찾았다. 이런 식이면 초식을 찾는 데만 반년은 걸리겠군.’
비고를 벗어난 조운비가 문뜩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꼭 그렇지만은 않겠군. 각 초식들의 운용요결을 분석하다 보면 일정한 틀이 생길 수도…….’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에서 벗어나니 이미 어둠에 둘러싸인 검은 하늘이 보였다.
‘아! 내가 너무 비급에 정신이 팔려 있었구나. 지금 정도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무각을 벗어났을 텐데…….’
조운비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언뜻 봐도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이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사무린이나 귀무단보다 먼저 무각을 벗어나거나 최소한 아이들이 많이 빠져나가는 시기에 움직였어야 했다.
사무린이 어찌 나올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그냥 보내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움직여 보자.’
무각은 등천관을 벗어나는 입구 쪽의 한 방향으로만 담이 있었고, 밀림으로 들어서는 세 방향으로는 간간이 늘어서 있는 횃불들로 경계 정도만 표시되어 있을 뿐 막혀 있지는 않았다.
조운비는 경계가 있는 인근의 건물 뒤쪽으로 스며들 듯 몸을 움직였다.
어둠과 횃불이 만들어 낸 건물들의 그림자는 조운비의 움직임을 훌륭하게 숨겨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