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헬 블레이드 1권(13화)
Chapter5 전생의 기억(2)
“으윽……!”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베스렐은 머릿속에 이상한 기억들이 혼재된 상태로 가득 차 있어 매우 어지럽고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3층의 방으로 돌아가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스윽.
베스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써클의 방은 보름의 시간이 이미 지난 뒤라 밖으로 나서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스그그그긍.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자 그의 혼미한 눈 속에 금발 머리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지하 복도의 문 앞에 쓰러져 있는 그녀.
그녀는 리렌시아였다.
“으윽, 뭐, 뭐야? 뭔데 얘는 여기에서 잠을 자고 있는 거야?”
베스렐은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를 흔든다고 어지러운 게 나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길……!”
덥석!
할 수 없는지 베스렐은 리렌시아를 한 손으로 들어 어깨에 걸치고는 나머지 한 손으로는 벽을 짚고 느릿한 걸음으로 지하 복도를 걸어 나갔다.
터벅터벅.
힘없는 발걸음 소리였다. 보름간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꼬르륵.
그때 때마침 배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배 속의 거지는 자신을 보름간이나 굶긴 베스렐에게 잔뜩 화가 나 거침없이 배고픔의 고통을 선사했다.
“으윽, 배, 배도 고프고 머, 머리도 어지럽고……. 정말, 정말로 미치겠구나…….”
베스렐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쌍한 놈이 아닐까 생각했다.
“빨리 가자, 빨리 가…….”
터벅터벅.
그는 힘들지만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빨리 저택의 자신의 침상으로 들어가 몸을 누이고만 싶었다. 지금 그의 상태는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그보다는 머리의 어지러움이 더욱 큰 고통이었다.
***
열흘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 열흘의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왔다.
베스렐 갈루안스.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머리의 어지러움은 이미 말끔히 사라졌고 이제는 그 생소한 기억들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킨 것이다.
“흐흐흐흐…….”
음침한 웃음이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뚜렷한 기쁨이란 감정이 녹아 있었다.
“주인님! 왜 아까부터 그렇게 웃으시는 거예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리렌시아는 베스렐이 앉아 있는 침상 곁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서는 땅콩을 몇 개 까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껍질이 벗겨진 땅콩을 하나씩 주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면 베스렐은 그걸 받아서 서른 번씩 꼭꼭 씹어서는 아쉽다는 듯 목구멍을 열고 배 속으로 직행시켰다.
꿀꺽!
“좋은 일? 흐흐, 당연히 좋은 일이 있지.”
“뭔데요? 어떤 좋은 일이 있기에 평소에 잘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는 건가요?”
리렌시아는 궁금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기뻤다.
평소 주인의 모습은 언제나 심통 난 모습이지 않았던가? 무언가에 화가 나서 언제나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수련과 마법공부에 열중했던 주인이다.
“흐흐. 좋은 일. 흐흐흐, 그래, 그래. 내 너에게만큼은 이 좋고도 좋은 일을 알려 주도록 하지. 너는 나와 하나로 엮여 있으니까.”
“저한테만요? 호호. 좋아요. 그럼 얼른 얘기해 주세요.”
베스렐은 자신의 기쁜 일을 리렌시아에게 알려 주기로 마음먹고는 곧 입을 열었다.
“흐흐. 그럼 귓구멍을 크게 열고 잘 듣도록 해. 놀라지 마라. 마침내 이 베스렐 갈루안스가 살을 뺄 수 있는 비법을 얻었단다. 그 더럽고도 더러운 검은 도마뱀 새끼의 저주를 깰 방도를 얻었단 말이다.”
“예에? 정말이요?”
“흐흐. 그래, 정말이다.”
리렌시아의 두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드래곤이 내린 저주를, 그것도 오천 살이 다 되어 가는 고룡이 건 저주를 풀 수 있는 비법을 얻었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다.
“와우, 정말 잘됐어요, 주인님! 드디어 살을 뺄 수 있게 되었다니 정말, 정말로 축하를 드려요. 이런 기쁜 일은 다른 분들도 아셔야 하는데…….”
“아니, 됐어.”
베스렐은 리렌시아의 말을 끊었다.
“일단 이 일은 너만 알고 있도록 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해 둬.”
리렌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소식을, 이처럼 기쁜 소식을 왜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를 말이다.
“나중에…… 아주, 아주 나중에 나의 살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나면 그때 말할 것이다. 지금 말했다가는 다들 들떠서 지들 할 일을 내팽개치고 축제를 벌이자 난리를 칠 것이 분명하니 말이야.”
“아아. 그런 깊은 뜻이 있는 거로군요, 주인님.”
리렌시아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주인님. 이 일은 제가 입을 꼭 다물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어요.”
“흐흐. 그래 잘 생각했다. 아, 그리고 너?”
베스렐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예, 주인님?”
“너 이제는 마력에 아무 문제가 없는 거지? 열흘 전에 마법의 경지가 갑작스럽게 상승하는 바람에 기절했었잖아.”
베스렐의 질문에 리렌시아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담으며 대답했다.
“호호, 예에, 주인님. 이제는 괜찮아요. 아주 멀쩡해요. 그날 마법 써클 여섯 번째의 것이 갑자기 생성되는 바람에 잠시 기절한 거잖아요. 정말 놀랐어요. 5써클의 경지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6써클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말이에요. 못해도 5, 6년 정도는 더 있어야 6써클의 경지에 오를 줄 알았거든요.”
리렌시아는 자신의 주인을 대단하다는, 존경한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렇지가 않겠는가.
마법이란 건 다 단계가 있는 것이었고 그 단계를 무시하고 단숨에 보다 높은 경지로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열흘 전만 해도 그녀는 분명 5써클 비기너의 경지에 있었다.
한마디로 5써클에 있어서는 초보자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는 건 그녀는 앞으로도 부지런히 마법을 익혀 5써클의 유저가 되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한다는 얘기였고, 그보다 더욱더 노력해 나중에는 5써클을 마스터해야만 한다는 얘기였다. 그게 바로 마법의 단계인 것이다.
“제가 이렇게 6써클의 마도사가 된 건 다 주인님의 힘 덕분이겠죠? 주인님과 저는 서로 마법의 경지를 상승의 경지로 이끌어 주잖아요. 물론 지금까지는 계속해서 주인님이 저의 마법 경지를 올려 주셨지만 말이에요.”
“후후. 그래, 맞다.”
베스렐은 스스로가 대견한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나의 마법 경지가 6써클로 갑자기 오르는 바람에 너도 같이 오르게 된 것이지.”
베스렐은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심한 어지럼증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을 때쯤 문득 자신의 마력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음을 알게 된 그였다.
몸이 느끼는 마나가 예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주위의 마나를 느끼고 통제하는 능력이 늘어난 것이었다.
베스렐은 급히 심장에 새겨진 써클을 관조해 보았고 직후, 그는 놀랍게도 자신에게 하나의 써클이 더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뜻밖에도 그는 6써클의 마도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후후, 차크라 수련법…….’
베스렐은 자신의 마법 경지가 상승한 이유를 써클의 방에서의 수련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 차크라 수련법은 마법에만 도움을 준 게 아니었어. 그것은 나의 모든 능력을 상승시켜 주었지. 오러를 발현할 수 있는 능력도 한 단계 상승했으니 말이야.’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였다.
베스렐의 검술 경지는 마법이 6써클의 경지로 오르는 것과 동시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로 올라섰다.
차크라 수련이 최상의 경지에 한 번 들어섰다는 것. 우주의 이성에게 한 걸음 다가가 보았다는 것.
그것은 수련하는 상대가 지니고 있던 잠재되어 있는 역량을 본신의 능력으로 바꾸어 주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자아, 그럼 이제 너와 할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 이제 그만 나가 봐라.”
베스렐은 이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좀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주인님 심심하잖아요. 거의 열흘간 계속해서 침상에 있었으니 말이에요.”
리렌시아의 눈에 조금은 섭섭한 듯한 빛이 어렸다.
자신은 주인과 좀 더 있고 싶은데 그만 나가 보라고 하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7써클에 자리한 절대귀속마법.
그것은 노예가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나 남녀 사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아니야. 나 심심하지 않아.”
“그래요?”
“그래. 조금 피곤하니 잠시 누워 있으려고 해. 그러니 너는 그만 나가 봐. 그리고 오전에 블레스 기사단장과 메드레스 마도사가 잠시 다녀갔다고 했지?”
“예, 오전에 두 분이서 같이 오셨었는데 주인님이 아직까지 몸이 회복되지 않아 주무시고 계신다고 하니 알겠다고 하시며 다시 돌아가셨어요.”
리렌시아의 말에 베스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래. 그럼 너는 밖에 나가 그들 두 사람 보고 내가 저녁때 잠시 보잔다고 전해라. 오래간만에…… 아니, 아니지. 그들과는 처음으로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겠군. 어쨌든 네가 말 좀 전해. 그 두 사람과 같이 저녁이나 들어야겠으니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스윽.
리렌시아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베스렐에게 허리를 한 번 숙이고는 바로 실내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턱.
“흐흐흐…….”
베스렐은 리렌시아가 밖으로 나가자 다시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참을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밖으로 신형을 옮겼다.
실내 바닥에 있는 하얀 백곰의 털가죽이 그의 발에 착 감기듯 느껴졌다.
“흐흐, 좋아, 한번 해 볼까?”
바닥의 털가죽이 주는 좋은 기분 속에서 베스렐은 하나의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심장에 자리한 6개의 써클이 맹렬히 휘돌았다.
그에 따라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마나가 빠른 속도로 베스렐의 주위로 몰려왔다.
간단한 마법인 모양인지 곧바로 녀석의 입에서 마법의 시동어가 터져 나왔다.
“바디 웨이트!”
화아아아악.
순간 환한 빛이 일었고 그것은 곧 베스렐의 양발에 다가가 어떤 이상한 것을 만들어 냈다.
사각형 모양의 검은빛.
그것은 베스렐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사격형의 윗부분에서는 하얀 색깔의 숫자가 0.1에서부터 빠르게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나타난 숫자는 168.3.
지금의 숫자는 몸무게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방금 그가 시전 한 마법은 다른 게 아닌 몸무게를 잴 수 있게 해 주는 체중계 마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2써클에 있는 마법이었는데 베스렐이 자신의 몸무게를 수시로 잴 수 있게 예전에 만든 것이었다.
“흐흐흐. 11크롬(kg) 정도가 빠져나갔군. 처음이야, 처음으로 몸무게가 빠졌어.”
부르르르.
베스렐의 몸이 작은 떨림을 일으켰다.
녀석은 체중계 마법에 찍힌 자신의 몸무게를 확인하고는 곧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하……!”
정말 시원스레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미칠 듯이 기분 좋게 흘러나오고 있는 그 웃음.
“와하하하하하하……!”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고룡이 내린 무한히 살찌게 하는 저주마법.
이것은 살을 찌게는 해도 빠지는 것은 없는 절대적인 마법이지 않은가. 한데 지금 베스렐은 처음으로 자신의 몸무게가 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그 기쁨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어떻게 말로 표현하지 못할 일인 것이다.
“좋아, 좋아. 이대로 놔두면 계속해서 다시 찌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다 방도가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어.”
스윽. 털썩.
베스렐은 몸무게를 확인하고 나자 다시 침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리곤 느긋이 기억을 헤집기 시작했다.
지난 열흘간에 걸쳐 차곡차곡 정리된 그 수많은 기억들을 생각해 보았다.
“으음, 여국현이라…….”
생소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마치 자신의 일부인 양 느껴졌다. 아니, 그 여국현이란 장년의 사내는 틀림없이 베스렐 그 자신이었다.
보통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기억이 하나가 되면 혼란이 오기 마련이다. 성격이라든지, 아니면 기질 같은 게 바뀔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베스렐은 예전의 베스렐 그대로였다.
조금의 변함도 없었다.
여국현이란 전생은 다만 현생의 베스렐에게 완벽히 녹아 들어가 그의 일부가 되었을 뿐인 것이다.
“전생이란 게 실제로 존재함을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인가? 후후, 내가 직접 그 같은 경험을 해 보게 되다니…….”
베스렐은 여국현의 일생을, 아니 자신의 전생을 생생히 떠올리며 기분 좋게 필요한 자료들을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어젯밤 최종적으로 남게 된 그 두 가지의 것을 놓고 어떤 것이 더 나을지 따져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