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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11화)
Chapter 4.(1)
신들이 없기에 기적은 없었으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이 역시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만들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이를,
우리에게 기적을 선사할 이를.
그것은 기계장치의 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
진지로부터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 나무 그늘 아래 거의 쓰러지듯 누운 티르는 거친 숨을 토했다.
“…살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에이다가 쫓아오지 않았다면 위험할 뻔했다.
변신을 통해 외상 자체는 거의 다 치유했지만, 그래도 당했던 상처가 워낙에 중상이었으니까. 거기에 변신에 대한 후유증까지 겹쳐지니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티르는 포션 한 병을 더 따서 마셨다. 호른에 있는 연금술 길드에서 파는 물건이었는데, 비싼 값을 하는지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몸이 호전되는 기분이었다.
끙끙거리며 숨을 고른 티르는 조금 더 편하게 몸을 눕혔다.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이다가 보였다.
“오지 말라고 했더니.”
“아…으… 어떻게 안 와요!”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영주가 혼자서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을 하는데 어떻게 내버려 둔다는 말인가.
“역시 훌륭한 기사야.”
티르가 웃으며 말하자 에이다는 열불이 난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으휴… 아무튼 정말 괜찮은 거죠?”
“그래, 에이다가 포션을 챙겨 와서 살았어.”
티르가 재차 웃자 에이다도 결국엔 작게 웃었다. 그대로 자세를 낮춰 티르의 가슴 근처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런데 영주님.”
“왜.”
“정말 인간 맞아요?”
“맞아. 어릴 때 같이 놀아 놓고 왜 그래.”
티르는 가볍게 말했지만, 에이다는 이번에도 그냥 쉬이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장난스럽게 묻기는 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 겁도 났으니까. 티르의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마지막의 변신은 또 무어란 말인가.
에이다는 율리아 만큼이나 티르를 믿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였다.
‘뭐… 당장은 참을 수밖에.’
티르는 영주였고 자신은 기사였으니까. 율리아에게조차 말하지 않는 걸 보면 티르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터였다.
생각을 정한 에이다는 다시 티르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힘들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티르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티르는 누운 채로 숨을 가다듬더니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놈들한테 말한 대로 베스크 백작한테 가야지.”
에이다는 미간을 찌푸렸고 티르는 그런 에이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적어도 겉보기엔 이렇게 멀쩡하니까.”
“…그거 안심하라고 하는 말 맞아요?”
씩 웃은 티르는 몸을 살짝 일으켜 세웠다. 바닥에 드러눕는 대신 나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아, 그 용갑주들도 다 회수해야 하는데.”
티르 자신이 파괴한 용갑주들. 전신을 파괴한 것은 한 대도 없으니 잘하면 수복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특히 바이스가 탔던 2급 용갑주는 수복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반드시 회수해야만 했다.
티르의 그 같은 걱정에 에이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병력은 왜 돌려보냈어요.”
병력이 있었다면 그 진지는 몰라도 용갑주들은 어떻게든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돌려보냈다고 생각해?”
“…네?”
티르는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슈나이더와 합류해서 다시 뒤쫓아 오고 있을 거야. 병력 차이가 나긴 하지만 네가 봤던 그 상황이고… 슈나이더가 용갑주도 끌고 올 테니 용갑주 확보는 별문제 없겠지.”
“아니, 아니 잠깐만요. 그게 다 지금 무슨 소리예요?”
에이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티르는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쫓아가겠다고 할 때 게덴이 말 안 해 줬어?”
티르의 물음에 에이다는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한 적은 당연히 없지만 생각해 보니 자기가 혼자 쫓아간다고 할 때 순순히 보내 준 것이 뭔가 이상하기는 했다.
“아… 으…….”
뭔가 놀림 받은 기분에 에이다가 얼굴을 붉히자 티르는 결국 작게나마 소리 내어 웃었다. 다시금 손을 뻗어 에이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걱정해 줘서.”
“으…….”
티르는 그런 에이다의 볼을 살짝 꼬집어 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가자, 에이다.”
“벌써 괜찮아요?”
“안 괜찮아. 그러니까 말은 네가 몰아.”
티르는 죽는 시늉을 하며 말 앞에 섰고, 에이다는 얼른 말 위에 올랐다.
***
티르가 홀멘에 도착했을 때 이미 베스크 백작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성벽 위에는 궁수들이 그야말로 진을 치고 있었다.
티르는 화살 범위 밖에 말을 세운 뒤, 에이다를 남겨 두고 혼자 말에서 내렸다. 몇 걸음인가 앞으로 나아간 뒤 성문 위에 선 베스크 백작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시오, 베스크 백작.”
“티르 아벤트…….”
한차례 이를 간 베스크 백작은 대뜸 활을 꺼내 들더니 티르를 향해 쐈다. 조준이 꽤나 정확했지만 티르는 가볍게 그 화살을 붙잡았다. 에이다야 워낙에 비현실적인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베스크 백작을 비롯해 성 위의 모두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먼저 간 병사들에게 듣지 못했나?”
조금은 놀리듯 큰 소리로 되묻자 베스크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더 길게 나눌 이야기도 없겠다 여긴 티르는 에이다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이다.”
짧은 부름에 에이다는 말안장에 묶어 두었던 장창 한 개를 건넸다.
홀멘에 도달하기 직전에 티르가 나무 하나를 수수깡처럼 뚝뚝 부러트리고 쓱쓱 깎아서 만든 것들이었다.
대충 만든 것이다 보니 이래저래 부실했지만 어차피 한번 쓰고 말 용도였으니까.
손 위에서 장창을 몇 번인가 돌려 본 티르는 이내 투창 자세를 취했다. 그대로 번개처럼 내쏘았다. 흡사 발리스타마냥 공기를 짓찢으며 날아간 창은 성벽 중턱에 박혔다.
“좋아.”
티르는 주먹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성벽을 향해 달렸다. 갑작스런 티르의 움직임에 베스크 백작이 놀라 외쳤다.
“쏴, 쏴라!”
성벽 위의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당겼지만 티르가 한발 빨랐다.
티르의 머리 한참 위를 지나간 첫 번째 화살이 땅에 처박힌 순간 해자 앞까지 도달한 티르는 있는 힘을 다해 지면을 박찼다.
단번에 해자를 가로지르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도약이었다.
“헛차!”
기합과 함께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 티르는 방금 박아 둔 창을 박차고 다시 한 번 도약했다. 단숨에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안녕하신가!”
“막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성벽 위의 병사들이 티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티르는 그들을 상대하는 대신 재차 지면을 박찼다.
병사들의 어깨를 도약대 삼아 연거푸 공중을 가로지르더니 순식간에 베스크 백작 앞에 섰다.
“이놈!”
그래도 제법 강단이 있는지 베스크 백작이 급히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지만 이번에도 티르가 빨랐다.
검을 뽑아내려는 베스크 백작의 손을 재빨리 찍어 눌러 다시 검을 밀어 넣더니, 다른 한 손으로 베스크 백작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크헉!”
돌바닥에 제대로 내리꽂혔으니 신음을 토할 만도 했다. 티르는 재빨리 베스크 백작의 위에 올라탄 뒤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보란 듯이 백작의 목을 겨누었다. 짧고 간단하게 용건만 말했다.
“홀멘을 내놔.”
“…뭐?”
베스크 백작이 반사적으로 되묻자 티르는 단검을 아예 백작의 목에 대었다. 살짝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목을 압박했다.
“홀멘을 내놓으면 용서해 주지.”
베스크 백작의 영지가 넓다고 하나 결국 가장 근본적인 부의 원천은 홀멘이었다. 용갑주들까지 모두 잃은 마당에 홀멘까지 잃는다면 백작의 힘은 급감할 터였다.
“미친… 크악!”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는 백작의 뺨을 후려친 티르는 좀 더 자세를 낮췄다. 백작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남의 영지를 빼앗으려 했으면서 자기 영지가 뺏길 각오는 하지 않은 건가?”
“…날 죽이면 너도 여기서 내 부하들 손에 죽는다!”
“정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성벽 위의 병사는 줄잡아 100여 명. 하지만 베스크 백작은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티르가 저 100명을 모조리 물리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몸을 빼내지 못할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베스크 백작. 당신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지금은 괜한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란 걸 알고 있을 텐데. 순순히 홀멘을 넘기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베스크 백작은 한차례 티르를 노려보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티르의 말마따나 그는 머리가 좋았으니까. 쥐어짜 낸 목소리로 티르의 제안을 수락했다.
성에 주둔하고 있던 베스크 백작의 사병 150여 명이 비무장 상태로 모두 빠져나가는 데는 2시간 여가 걸렸다.
필요한 서류를 모두 챙긴 티르는 성문을 굳게 닫은 뒤 베스크 백작을 사다리를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다.
수하들의 도움을 받아 말 위에 오른 백작은 도저히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부들부들 떨더니 티르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티르 아벤트! 지금쯤이면 튀링겐은 불바다가 되어 있을 거다!”
연회에서의 암살 건이 실패했을 때, 백작은 지금까지의 계획을 변경하고 록튼 령의 노포크와 밀회를 가졌었다.
서로 간에 나눈 것은 아주 간단한 약속이었다.
지금쯤이면 록튼 령의 군사들이 티르가 없는 튀링겐 령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백작의 말에 티르는 피식 웃더니 짧게 대꾸했다.
“알아.”
“…뭐?”
“노포크 녀석이 쳐들어올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이 양반아.”
너무나 태연한 티르의 목소리에 백작은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티르는 그런 백작에게 불쌍하다는 듯 동정의 시선을 보낸 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 다음에는 내가 연회에 초대하든가 하지.”
백작은 잇소리를 토하더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병사 하나 없는 티르였지만 백작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자리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싸움을 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백작이 물러간 뒤 5분쯤 지났을까. 여태까지 얌전히 있던 에이다가 티르에게 급박한 목소리를 토했다.
“지, 진짜예요?!”
“뭐가?”
“록튼 군이 튀링겐에 쳐들어온다는 거요!”
그게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슈나이더와 게덴까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으니 튀링겐 령은 텅텅 빈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티르는 이번에도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라면 맞아. 노포크 녀석이 가르쳐 줬거든.”
“으… 예?”
“저번에 홀멘 밖으로 나가기 전에 노포크 녀석이 알려줬어. 말은 안 했지만 녀석이랑은 지금 비공개적 동맹 상태고.”
그러니 쳐들어오지 않는다.
노포크는 토사구팽 당할 바에 확률 낮은 도박에 뛰어든 것이었다.
잠시 황망한 얼굴로 티르를 바라보던 에이다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흐아… 대단하긴 대단한데… 도대체가 말해 주는 게 뭐예요!”
병사들을 회군시킨 이유부터 해서 이번에 노포크 건까지. 보안이 중요한 사안이긴 했지만 섭섭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미안, 미안. 다음부터는 이야기… 크읏!”
웃는 얼굴로 에이다를 달래던 티르는 돌연 신음을 토하더니 그대로 배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여, 영주님?”
갑작스런 티르의 반응에 에이다 역시 깜짝 놀랐다. 티르는 인상을 찌푸린 채 몇 번인가 손사래를 치더니 그대로 성벽 바닥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으으…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 홀멘 뺏겠다고 괜한 기교까지 부렸더니……. 슈나이더가 빨리 오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겠는걸.”
베스크 백작의 사병들을 모두 내보내긴 했어도 그게 전부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더욱이 수천 명이 넘게 사는 도시를 티르 혼자서 장악한다는 것은 티르가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튀링겐 령에 홀멘까지. 갑자기 영지가 늘어나다 보니 병사고 기사고 일손이 너무나 부족했다.
“아무튼… 일단은 조금 쉴게.”
에이다에게 되는 대로 말한 티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슈나이더가 홀멘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