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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12화)
Chapter 4.(2)
***
티르가 홀멘을 빼앗은 소식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바로크 지방 전역에 퍼졌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화제가 된 것은 티르가 베스크 백작의 용갑주들을 모조리 격퇴한 일이었다.
단신으로 용갑주를 쓰러트린 인간.
홀로 홀멘을 함락시킨 괴물.
소문이 소문의 꼬리를 물었고, 발 없는 말은 일파만파가 되어 퍼져 나갔다.
“소문이… 사실일까요?”
바로크 지방의 초입, 가도 위에 세워진 여관방 안에 다섯 사람이 모여 있었다.
말을 꺼낸 것은 여행자 차림의 청년이었는데 말하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일행 중 가장 아랫사람인 듯했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머쓱해진 청년은 우물쭈물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렇게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문가에 서 있던 남자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청년과 마찬가지로 여행자 차림이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많이 잡아 삼십대 후반쯤 되었을 남자는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에 얹은 채 고개를 숙였다.
침대 위에 앉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눌러쓴 여인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어떤 선택을 하시든, 그 뜻에 따르겠습니다.”
본래 계획을 따르든, 그 계획을 변경하든. 모든 것은 여인의 뜻대로.
여인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늘고 긴 손을 들어 로브 자락을 벗었다.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아름다운 얼굴은 여인보다는 소녀에 가까웠다.
본래 계획은 얼스터 지방으로 가는 것이었다.
호국경 가울링 후작의 도움을 받아 저 간악한 역적인 제2왕자와 제3왕자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듣게 된 소문.
단신으로 용갑주를 격파하고, 홀로 성을 함락시킨 남자의 이야기.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그냥 헛소문 취급했을 터였지만 소녀는 그럴 수 없었다.
소녀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다섯 사람은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과거에 그런 경지에 올랐던 사람이 존재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소문이 사실이라면,
진정 그런 남자가 존재한다면.
“홀멘으로 간다.”
소녀의 선택에 방 안에 모여 있던 네 사람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소녀의 뜻에 예를 표했다.
가을도 어느새 중턱을 지나 겨울을 내다보는 시점,
레스베리아의 제1공주, 레오나 레지세이어는 홀멘으로 향하였다.
Chapter 5.(1)
저 옛날.
태양과 달과 별, 그 모두가 웃으며 노래하던 시절이 있었다.
거대한 생명의 나무 아래 앉아 푸른 어둠을 우러르며.
***
“우어어어!”
우렁찬 기합과 함께 검과 검이 부딪혔다. 두 사람 다 목검이었지만 그 기세만은 진검 못지않았다.
막고 찌르고 베고, 사내들의 검격이 오갈 때마다 연병장에 모여 있던 병사들은 환호성을 울려 댔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그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티르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시키긴 했지만 이건 뭐 거의 무술대회나 다름없군.”
홀멘을 점령하고도 이 주일이 지났다. 아벤트 령과 마찬가지로 그저 단순한 영지였던 아벤트 령과 달리 홀멘은 상업‘도시’였다. 당연히 그 점령과 유지의 성격이 크게 다를 수 없었다.
크기는 아벤트 반도 안 되면서 인구는 배 이상 많은 곳이다 보니 문제가 많고도 많았고, 그간 도시를 관리하던 베스크 백작의 수하들이 빠져나가고 나니 도시 운영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거기에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병사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항복해 온 베스크 백작의 군사들을 재배치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부족한 것은 역시나 일손이었다.
어느 정도 안정에 접어든 튀링겐은 아벤트 령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 노드에게 맡기고 율리아와 슈나이더, 에이다와 게덴을 홀멘에 불러들였지만 아직도 사람이 너무 부족했다.
“저기서 이긴 놈이 기사가 되는 건가?”
티르의 물음에 옆에 서 있던 슈나이더가 들고 있던 서류를 넘기며 답했다.
“아닙니다. 아직 B블럭이 남아 있습니다. 저기서 이긴 자가 아벤트 령에서 온 카이와 붙습니다.”
일단 급한 불이라도 끄기 위해 병사들을 대상으로 무술대회 비슷한 것을 열었다. 단순히 무력만 가지고 기사를 뽑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이 무력이었으니까.
무술대회 성적과 그 외 몇 가지 평가 법을 적용해 새로 기사를 다섯 정도 뽑을 계획이었다.
“나중에 딴소리 나오지 않게 공정하게 처리해 줘. 이런 건 원래 절차의 공정성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
“예, 맡겨 주십시오.”
슈나이더에게 일별한 티르는 성의 임시 감옥으로 향했다.
홀멘 성은 건설된 지 100년이 넘은 고성이었다. 홀이라든가, 발코니라든가 그런 곳에는 고성의 향취가 묻어났지만 아무래도 지하, 그것도 감옥에는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칙칙한 어둠이 풍길 뿐이었다.
지금 만나러 갈 녀석을 그런 곳에 가둬 둘 수는 없었다.
“몸은 좀 괜찮나?”
성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작은 방 안, 창문을 봉하고 문을 바꿔 다는 것으로 급조해 낸 감옥 안에 있던 붉은 머리의 남자는 티르가 묻건 말건 별다른 대답 없이 눈만 감고 있었다.
베스크 백작의 제1기사였던 바이스 발렌시아였다.
용갑주에 타고 있던 세 명의 기사들 가운데 기사 베인은 즉사했고, 기사 아율른과 기사 데비드는 중경상을 입긴 했지만 목숨에는 이상이 없었다.
아율른과 데비드의 경우에는 상처를 치료해 준 뒤 베스크 백작에게 몸값을 받고 넘겼다.
그날 아율른과 데비드의 기량을 생각해 보면 이래저래 위험한 일일지도 몰랐지만 베스크 백작에게는 지금 당장 용갑주가 단 1대도 없었으니까. 당장에 위협이 되는 일은 없으리란 판단 하에 한 행동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지금 저렇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바이스 발렌시아였다.
베스크 백작은 기사 아율른과 기사 데비드의 몸값을 모두 합친 것에 2배 이상의 금액을 치르고서라도 바이스를 데려가려 했지만 티르도 거기까지는 용인할 수 없었다.
적에게 다시 붙여 주기에는 너무 유능하다.
그렇다고 그냥 죽이자니 그것 역시 아깝다.
잠자코 바이스를 바라보던 티르는 무어라 더 말을 붙이는 대신 다시 방 밖으로 나왔다. 문 밖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에게 적당히 당부와 격려의 말을 한 뒤 홀로 복도를 걸었다.
“저런 녀석은 쉽게 회유되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던 하얀 청년이 그렇게 말했다.
“본래 용병 출신이었다면서 왜 그렇게 비싸게 구는 걸까나.”
하늘색 미녀가 티르의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의리지.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 주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준 자에 대한 의리! 사나이만이 알 수 있는 세계랄까!”
저만치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세 사람의 등장에 티르는 길게 한숨을 토했다.
“…이제는 아주 허구한 날 튀어나오는구만.”
티르의 한탄에 하얀 청년은 빙긋이 웃으며 티르의 오른팔에 감긴 쇠사슬을 가리켰다.
“네가 그만큼 힘을 자주 사용하고 있으니까.”
힘을 쓰면 쓸수록, 봉인을 해제하면 해제할수록 좀 더 자신들의 힘이 강하게 드러난다.
티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좁혔고, 하늘색 미녀는 그런 티르의 팔에 가슴을 밀착시켰다.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눈을 내리깔며 숨결을 토했다.
“그래서, 싫어?”
고혹적인 자태는 마음을 심란케 하기에 충분했다. 과거 마녀 베아트리체가 마녀라 불리운 것은 차라리 마법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만한 검술 때문이 아니라, 그 고혹적인 자태 때문이라는 소리도 있었으니까.
티르는 잠시 그런 하늘색 미녀, 베아트리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보랏빛 눈동자에는 티르를 놀려먹겠다는 심보가 단단히 담겨 있었다. 한차례 한숨을 내쉰 티르는 돌연 손을 뻗어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우웁?!”
깜짝 놀란 베아트리체가 발버둥 쳤지만 용갑주와 힘겨루기도 하는 티르였다. 꼼짝도 못하고 붙들린 베아트리체와 농밀한 키스를 나눈 티르는 발갛게 물든 얼굴로 허둥거리는 그녀를 보고 작게 웃었다.
“내가 무슨 세 살배기 어린애인 줄 알아? 그런 걸로 놀려먹으려고 하고.”
베아트리체는 순간 이를 악물었고, 저만치 서 있던 노인, 전마 갈천은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껄껄거렸다.
“크하하하핫. 03시의 마녀야, 이번에는 네가 당했구나.”
베아트리체는 갈천의 비웃음에 잠시 무어라 꿍얼거리더니 흥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갈천만큼은 아니지만 작게나마 따라 웃던 하얀 청년, 검마 백야흔은 티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튼 티르, 마지막 기사여. 여전히 에인헤리얼의 힘을 다루는 데는 미숙하구나.”
07시의 봉인해제로 드러나는 그 힘의 편린.
아직 너무 미숙했다.
그 지속 시간도 너무 짧았고, 변신 후의 후유증도 너무나 컸다.
갈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그런 건 쓸수록 실력이 느는 거다. 좀 더 팍팍 변신하도록 해.”
“게으름만 피우고 있어서는 결코 실력이 늘지 않아.”
베아트리체도 마지막에 슬쩍 핀잔을 날렸다.
티르는 어깨를 늘어트리더니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네네, 알았으니 그만들 돌아가시죠.”
티르는 발걸음을 떼었고 오래지 않아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잠시 뿐이었다.
“오빠?”
“그래, 율리아.”
홀에서 마주친 율리아는 꽤나 피곤한 얼굴이었다. 티르는 습관대로 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만난 일은 잘되었어?”
“그럭… 저럭? 괜히 상인 길드 대표가 아니더라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는데도 알게 모르게 내가 당한 기분이야.”
갑자기 영지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혼란스럽기는 도시 내의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홀멘 주변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베스크 백작이 도시의 주인인 것과, 시골 영지 2개를 가지고 있는 티르가 도시의 주인인 것은 그 상황 자체가 판이하게 달랐다.
각종 이권 문제로 연일 면담을 신청해 대니 재정 쪽을 담당한 율리아가 하루하루 말라갈 수밖에 없었다.
“고생했다. 조금만 더 힘내 줘. 나도 많이 도와줄 테니까.”
“…원래라면 그냥 오빠가 힘내고 내가 그걸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그것도 그렇구나.”
함께 키득거린 남매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에이다는 요새 어떻게 지내?”
“같은 성에 있잖니.”
“몰라, 요새 다들 바쁘니까. 슈나이더도 자주 못 보는걸.”
마지막 쪽이 특히 불만인지 입술을 삐쭉거렸다. 어째 표정이 ‘오빠가 일을 오죽에 많이 맡겼어야지.’하고 항변하는 것만 같았다.
“…저기 율리아, 나도 나름 많이 바쁘거든?”
티르가 그렇게 말했지만 율리아는 여느 남매가 그렇듯이 깔끔하게 무시했다.
“아, 그나저나 루레인이 견적서 뽑아 줬어. 역시 용갑주는 돈이 많이 들더라.”
들고 있던 서류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티르에게 건넸다. 예산만 적힌 간단한 요약본이었는데 가만히 읽어 내리던 티르는 미간을 좁혔다.
“끄응, 대충 확보할 수 있는 건 1대뿐인가.”
반파된 3급 용갑주 3대를 모두 회수하긴 했지만 이번엔 그 손상이 너무 심했다.
그나마 확보할 수 있다는 1대도 그나마 멀쩡한 부분들을 각각 이어 붙인, 어떻게 보면 중고 중의 중고였다. 2급 용갑주 적색의 힐데가르트의 경우에는 동력 기간이 망가진 터라 돈도 시간도 3급 용갑주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일단 급한 3급 용갑주 건부터 해결해야 하니 못해도 3달 이상은 기다려 달라는 통보였다.
“아무튼 여기서 갈라지자. 오늘 하루도 힘내렴.”
“네네, 오빠도 힘내세요.”
그렇게 율리아와 헤어진 티르는 집무실로 향하는 대신 빙글 돌아섰다. 말 나온 김에 루레인과 에이다에게도 한번 찾아가 볼 요량이었다.
“바쁘다 바빠.”
어디서 인재를 스카우트라도 해 오든가 해야지. 티르는 발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