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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13화)
Chapter 5.(2)
***
성 한 귀퉁이에 자리한 공방은 넓었다. 튀링겐 자작에게 대여했던 것까지 치면 본래 베스크 백작이 보유하고 있던 용갑주는 무려 5대에 달했으니 그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꽤나 치밀한 성격인 베스크 백작은 철수하면서 용갑주 기술자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 버렸다. 덕분에 지금 공방을 지키고 있는 것은 루레인과 루레인의 일을 도와줄 똘똘한 병사 몇이 다였다.
마침 공방 입구 쪽에선 시운전이 한창이었는데, 티르가 다가서자마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영주님!”
“에이다?”
장갑을 다 뜯어낸 용갑주에 타고 있는 것은 에이다였다. 용갑주 조종석 안에서 환하게 웃는 에이다를 바라보던 티르는 공방 입구에 선 루레인을 돌아보았다.
티르의 시선에 루레인은 예의 버릇대로 쭈뼛거리며 답했다.
“…제가… 용갑주의 테스트를 부탁했습니다.”
용갑주의 기동에는 적어도 기사급의 기량이 필요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티르는 다시 에이다 쪽을 돌아보았다.
“저게 새로 수복한 용갑주인가?”
“네, 일단 가동부만 연결한 뒤에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해 보고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세밀한 곳까지 손보고… 장갑까지 다시 달려면 이주는 족히 걸리겠지만요.”
루레인의 말을 들어서 그런지 에이다가 타고 있는 용갑주가 이래저래 없어 보이기는 했다. 흉부 장갑을 다 벗겨 내고 보니 일단 모양새부터가 좋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부품을 끌어다 써서 그런지 걷는 폼도 위태위태했다.
“…어째 불안한데?”
용갑주 상태도 별로 좋지 않은데 조종하는 에이다 역시 초보운전이다 보니 불안감이 그야말로 두 배였다.
에이다는 씩씩하게 웃더니 걱정마라는 듯 용갑주의 손까지 흔들었다.
“에이, 영주님 걱정하지 마세… 아아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이다가 탄 용갑주가 뒤뚱거렸다.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린 탓에 균형을 잃은 모양이었다.
더욱이 하필이면 자빠지려는 방향이 정면 쪽이었다. 흉부 장갑도 안 단 상태인지라 저대로 넘어지면 에이다가 크게 다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루레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꺄아아아아!”
에이다는 비명을 질렀고 병사들 몇은 도저히 못 보겠다는 듯 눈까지 감아 버렸다. 티르는 이를 악물더니 거의 쏘아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넘어지는 용갑주의 앞에 버티고 서더니 그대로 쓰러지려는 용갑주를 받아 냈다.
“크으… 괜찮아?”
티르가 용갑주의 복부 부분을 받쳐서 완전히 고꾸라지는 것은 막았다지만 워낙에 크기 차이가 있었으니까.
거의 지면과 얼굴이 평행 상태가 된 에이다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으, 네.”
“그래, 그럼 안전벨트 풀고 천천히 내려와. 갑자기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에이다는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쉰 뒤 천천히 티르의 지시에 따랐다. 티르가 없었다면 큰 사고가 났을 터인지라 루레인 역시 가슴을 쓸었다.
그리고 그런 공방이 내려다보이는 조금은 먼 장소, 성곽 위에 은신해 있던 여행자 차림의 청년은 공방 앞에서 일어난 광경에 눈을 깜박였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저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저, 저거 인간 맞아?”
흉부 장갑을 떼어 냈다고 해도 여전히 수 톤은 거뜬히 나가는 용갑주였다. 그런데 용갑주를 인간이 손으로 지탱한다? 그것도 갑자기 쓰러지려는 것을?
힘도 힘이었지만 저게 인간의 육신이 맞나 싶을 정도의 단단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속도도 놀라웠다.
티르가 본래 서 있던 곳과 용갑주가 쓰러지려던 곳 사이의 거리는 못 잡아도 10미터였다. 그 짧은 찰나에 10미터 이상을 이동해서 용갑주를 붙잡았으니 이미 인간의 속도가 아니었다.
청년은 서둘러 홀멘 안에 마련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 안에는 청년과 마찬가지로 정보를 모으러 갔던 다른 이들 역시 모여 있었다.
“그러니까… 번쩍하더니 쾅하고 용갑주가 수십 미터를 날아서 바닥에 나뒹굴었… 죄송합니다.”
조사해 온 것들을 한 명씩 이야기해 보라는 명에 따라 오늘 성에서 본 광경과 주점에서 들은 목격담들을 이야기하던 청년, 실버 나이츠 소속의 기사 트리스탄은 좌중의 시선이 좋지 않자 슬며시 뒤로 물러섰다.
그런 트리스탄을 대신해 이번엔 여기사 이졸데가 앞으로 나섰다.
“전투를 목격한 자들도 대부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투였습니다. 워낙에 비현실적인 광경이기도 했으니까요.”
사람이 용갑주를 쓰러트리는 광경이었다. 목격한다 한들 너무나 상식에 위배된 일이었으니 저마다 받아들인 이미지에 따라 기억이 제멋대로일 수밖에 없었다.
“입고 있었다는 하얀 갑옷에 뭔가가 있지 않겠소?”
두 사람에 비해 연장자라 할 수 있을 기사 랜스터가 되물었다.
그러자 구석에서 의기소침해 있던 트리스탄이 다시 한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첫 번째 전투에선 맨몸이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오늘 본 광경을 생각해 봤을 때… 애당초 초월적인 힘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기사 랜스터와 기사 트리스탄, 기사 이졸데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소녀, 레오나 레지세이어에게 시선을 돌렸다.
레오나는 그런 기사들의 시선에 나직이 숨을 토했다.
자신의 옆에 시립한 실버 나이츠 단장 트라이곤 카노에를 올려다보며 입안에서 맴돌던 단어를 토해 냈다.
“전설의 소드마스터…….”
“푸핫! 뭐야 그게.”
마시던 물을 거의 반쯤은 토해 낸 티르가 사레라도 걸린 듯 켁켁거리며 물었다. 율리아는 더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티르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전설의 소드마스터 몰라? 레스베리아를 세운 건국왕 말이야.”
손수건으로 입가를 적당히 닦은 티르는 어깨를 살짝 떨었다.
“전설 자가 붙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듣기만 해도 오글거리냐.”
“아무튼, 오빠가 그게 아니냐는 소문이 요새 나돌고 있어.”
“그런 오글거리는 거 아니다.”
티르가 정말로 싫다는 듯 정색을 했다. 그러자 가만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슈나이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래도 멋있지 않나요? 전설의 소드마스터.”
티르는 잠시 조각상처럼 잘생긴 슈나이더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율리아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율리아.”
“응?”
“나중에 애 낳으면 애 이름을 절대로 네가 지어라.”
진지하기 짝이 없는 티르의 목소리에 순간 멍해 있던 율리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오빠!”
킥킥거린 티르는 율리아의 앙증맞은 주먹이 어깨를 가격하건 말건 다시 모두를 돌아보았다.
“아무튼 그게 뭐지? 좀 자세히 아는 사람 없나?”
에이다가 살짝 손을 들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슈발츠 대왕에 관한 전설이에요. 지금 영주님처럼 슈발츠 대왕도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 힘으로 레스베리아를 세웠다고 하거든요.”
인간의 힘을 초월한 초인이 나타나 나라를 세웠다는, 여느 나라에나 있는 뻔하다면 뻔한 건국신화였다.
“그럼 그거지 소드마스터는 또 뭐야?”
티르의 그 같은 물음에 율리아가 질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릴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오빠는 참 전설이나 신화에 관심이 없구나.”
“응 그러니까 설명해 봐.”
이번에는 게덴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슈발츠 대왕에게는 대왕 외에도 초월적인 힘을 가진 여섯 명의 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검의 극의에 달한 자, 소드마스터라 칭했지요. 전설에 따르면 오라라고 하는 미지의 힘을 부려 수많은 괴물들과 대적했다고 합니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영웅과 그런 영웅을 보필하는 여섯 명의 조력자.
“과연 전설답군.”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티르는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아무튼 곤란한데…….”
티르 자신이 소문날 일을 벌이긴 했지만 정말로 소문이 왕왕 퍼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렇잖아도 내전 중이거늘 이런 소문이 퍼지면 제2왕자나 제3왕자 중 하나가, 어쩌면 둘 다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홀멘에 연락을 취할 수도 있었다.
어느 한쪽을 받아들이든, 아니면 둘 모두를 멀리하든 티르는 왕자들에게 경계를 받을 테니, 그만큼 홀멘을 비롯한 아벤트 령이 위험해질 터였다.
방 안에 모인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알았기에 분위기가 자연 진지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침묵이 이어진지 얼마나 지났을까.
“여, 영주님!”
튀링겐 령에서 데려온 하급 관리 하나가 급한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왜 그러지?”
“차, 찾아왔습니다.”
“뭐가?”
티르의 되물음에 하급 관리는 숨 고를 새도 없이 빠른 어조로 말했다.
“레오나 레지세이어 공주가 영주님을 찾아왔습니다!”
***
티르는 율리아를 비롯한 모두를 그대로 착석시킨 상태로 자칭 레오나 레지세이어 공주를 맞이하였다.
‘예쁘네.’
이제 열일곱, 아니 열여덟이나 되었을까. 율리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는 아름다웠다. 저 자칭 레오나 공주가 만약 가짜라면 대역 고르는데도 꽤나 수고를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레오나 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그 미모로 유명했으니까.
티르도 집을 나가기 전에 그녀와 관련된 소문을 꽤나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났다.
‘머리칼은 선명한 황금색에 눈동자 색은 파란색이라… 이것도 일단은 소문과 같군.’
소녀의 뒤로는 사내 셋과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티르가 이처럼 머릿속으로 품평회를 하는 동안 소녀 역시 비슷한 얼굴로 티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대뜸 티르의 맞은편 의자에 앉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티르 아벤트인가?”
“그렇긴 한데, 그러면 그대는 레오나 레지세이어인가?”
티르가 똑같이 되묻자 소녀 뒤에 서 있던 자들의 안색이 사나워졌다. 하지만 소녀는 그저 빙긋 웃더니 의자 등받이에 등을 편하게 기댔다.
“내가 가짜인 것 같나?”
“그럼 대뜸 쳐들어와서 레오나 공주라고 하는데 그걸 믿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나? 더욱이 레오나 공주는 현재 2왕자와 3왕자를 피해 도주 중인 걸로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당당히 나타나는 쪽이 더 의심될 수밖에.”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당당하게 나섰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내가 은밀히 홀로 나타나 레오나 공주라고 한들 자네의 의심은 더 깊어만질 것 같은데.”
소녀는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고 티르는 씩 웃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하는 것보다, 그 태도에서 은연중에 묻어나는 기품이 인상적이었다.
저 소녀가 만약 가짜라면 정말 레오나 공주처럼 보이려고 꽤나 노력을 했을 터였다. 저런 왕족 특유의 기품이란 건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좋아, 자칭 레오나 공주. 그대가 진정 레오나 공주라면 무슨 용무로 나를 찾아온 거지?”
티르의 물음에 소녀, 레오나 공주는 한차례 숨을 고르더니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티르 아벤트, 그대에게 제안할 것이 있어서이다.”
“어떤 제안이지?”
“나와 결혼하자.”
레오나는 자연스럽게 말했고, 티르는 부자연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율리아와 에이다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소녀를 돌아보았다.
“…뭐?”
“나와 결혼하자고 말했다, 티르 아벤트.”
레오나는 또박또박 말했고 마지막에는 슬며시 미소도 지었다.
티르는 앉은 자세를 고치더니 할 말을 고르듯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거 뭔가 굉장히 많은 것들이 함축된 제안 같은데?”
레오나 공주와 결혼한다.
제2, 제3왕자와 적이 된다.
이 나라의 왕권을 놓고 벌어지는 패권 다툼에 끼어들게 된다.
레오나는 잠자코 티르를 바라보았고 티르는 그 뜻을 읽었다.
이 여자가 진짜 레오나이든 가짜 레오나이든 지금 하고 있는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결혼 지참금 치고는 이쪽이 준비할 게 지나치게 많은 것 같군.”
“하지만 얻는 것 역시 많지.”
싸워 이긴다면 왕이 될 수 있다.
그것도 왕위 찬탈이나 반역과는 거리가 먼, 나름 정통한 왕위의 획득.
티르는 씩 웃었다.
“어차피 난세, 공주와 손을 잡으면 명분도 얻을 수 있겠지. 아름다운 공주가 내 사람이 되기도 하고 말이야.”
아무리 지방이라고는 해도 영주들끼리 자기들 멋대로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홀멘을 빼앗긴 베스크 백작이 이대로 쉽게 물러설 리도 없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전투가 계속될지 몰랐다.
어차피 이어질 전투라면,
거기에 레오나 공주라는 강력한 명분이 생긴다면,
“허나 거절한다.”
티르는 딱 잘라 말했다. 레오나도 이번만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어째서?”
“뻔하지 않나? 그냥 내가 여기서 공주를 붙잡아서 2왕자건 3왕자건 둘 중 하나에게 넘기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공주를 도와 둘을 모두 무찌르는 것보다 그중에 한편에 서서 다른 하나를 무찌르는 게 훨씬 더 쉬워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국왕과 태자의 죽음에 제2, 제3왕자가 개입되었다는 호사가들 사이의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왕궁에서 도망친 레오나 공주는 아주 좋은 ‘선물’거리가 될 수 있었다.
그 정도 선물을 가져다 바치고 티르 자신의 능력을 조금 보탠다면 이미 차지한 튀링겐과 홀멘을 왕국 차원에서 인정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니, 티르 자신의 능력을 생각해 볼 때 호국경이 얼스터 지방 자체를 지배하듯 아예 바로크 지방 전체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도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