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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14화)
Chapter 5.(3)
“이 정도도 생각 안 해 보고 오진 않았을 텐데?”
“네놈!”
거의 도발하는 듯한 티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오나 뒤에 서 있던 트라이곤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에 에이다와 게덴, 슈나이더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검 위로 손을 옮겼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트라이곤.”
레오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트라이곤을 제지했다. 티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레오나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소녀, 레오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방금 티르 자신이 이야기한 것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뛰어들 정도로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
결혼 제의를 한 걸 보면 분명 티르 자신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왔을 터였다. 그렇다면 여차할 때는 몸을 빼낼 자신이 있었던 걸까.
“어째서 가울링 후작을 찾아가지 않은 거지?”
레스베리아의 호국경. 지금 당장은 미동조차 하고 있지 않지만 그 휘하에 레스베리아 최정예를 거느린, 어떻게 보면 이번 왕위 계승의 최대의 복병이라 할 수 있을 남자.
“…본래는 그럴 계획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계획을 바꾼 건지 알 수 있을까.”
티르에 대한 소문이 퍼진지 이제 겨우 이주가 될까 말까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티르의 힘에 대해서 확인할 수는 있어도 티르의 성격이나 야심 같은, 깊은 내면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레오나는 티르를 찾아왔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대신 빠르게 선수를 치는 쪽을 택했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당신이 전설의 소드마스터니까.”
레스베리아의 건국왕인 슈발츠 대왕에 대한 전설. 아니, 그것은 전설이 아닌 사실. 실재했던 역사의 기록.
“설사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 준하는 존재일 테니까.”
슈발츠 대왕의 여섯 기사. 오백 년이라는 까마득한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 위대한 힘.
레오나는 담담히 말했다. 티르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을 두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어째서 왕자들과 싸우려는 거지? 그들도 왕위 계승권 서열이 낮은 당신에겐 그렇게까지 큰 관심이 없을 터인데.”
태자와 레오나 공주의 어머니였던 제1왕비는 외척이 거의 없다시피 한 여인이었다. 태자까지 죽은 이 마당에 레오나 공주가 가진 세력은 그야말로 미비했다.
레오나는 바로 답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티르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차분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이 아버님을 죽였으니까.”
국왕은 독살당했다.
“그들이 오라버니를 죽였으니까.”
태자 역시 독살당했다.
제2, 제3왕자는 왕위를 원했으니까.
아비와 형을 죽이고, 끝내는 저들끼리 개싸움을 벌이는, 인륜을 저버리는 행동을 해서라도 레스베리아의 왕위를 가지고 싶어 했으니까.
“이유가 더 필요한가? 티르 아벤트, 아벤트의 영주여.”
티르는 알았다. 어떤 논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알았다.
레오나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녀는 지금 망상으로 인해 애먼 이복형제들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진실이었다.
돕지 않는 것이 옳았다.
애당초 홀멘까지 차지한 순간 일이 너무 커진 것이었다.
티르 자신은 몰라도 율리아와 에이다가, 슈나이더와 게덴을 비롯한 모두가 위험해질 일이었다.
“결혼은 하지 않아.”
티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트라이곤을 비롯한 실버 나이츠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검에 손을 가져갔다.
레오나는 태연을 가장한 채 담담히 티르의 시선을 마주했다.
티르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지 않았다. 레오나가 그러했듯이 한쪽 손을 내밀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동맹은 맺기로 하지.”
후회할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순간도 조금은 후회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도 티르는 말을 마치며 웃었다.
“동의한다, 티르 아벤트.”
레오나 레지세이어 역시 그런 티르를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
해가 지고 어둔 밤이 내렸을 때, 바로크 지방으로 들어서는 갈림길 앞에 여인 하나가 섰다.
베이지 색 로브를 머리끝까지 푹 눌러쓴 여인의 머리칼은 순백이었다. 가만히 길 너머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각기 붉고 푸른색이었다.
“대충 이 근처인가.”
나직이 중얼거린 여인은, 시안Xian은 이내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향하는 곳은 남서쪽, 홀멘이 있는 방향이었다.
Chapter 6.(1)
헤어지기 전날 밤.
다시 만날 수 있냐는 물음에
그녀는 그저 상냥히 미소 지어 주었다.
***
공주와 기사들의 거처를 정해 준 뒤, 자세한 사안은 내일 마저 이야기하기로 한 티르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베스크 백작이 즐겨 사용하던 값비싼 의자에 몸을 기댄 티르는 그대로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단 동맹을 맺기로 하긴 했지만 티르 자신도 석연찮은 구석이 몇 가지가 있었다.
이를테면 공주가 너무 서둘렀다는 점일까?
단순히 소문만 듣고 찾아온 것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너무 빠른 감이 없지 않았다.
더욱이 티르의 활약이 전부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결혼 제의까지 해 온 것은 꽤나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공주의 상황이 다급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전설의 소드마스터라는 것에 공주가 꽤나 기대를 걸고 있는 걸지도 몰랐지만 이래저래 석연찮기는 매한가지였다.
“티르, 우리들의 마지막이여. 그건 너무나 간단한 거다.”
갑자기 들려온 낮고 굵직한 목소리에 티르는 고개를 바로 했다.
집무실 문 앞에는 거대한 놀이 양반 다리를 한 채 앉아 씩 웃고 있었다.
죽음을 뿌리는 자, 놀들의 왕 비단. 청동의 시대를 살아갔던 자.
‘바이스 등과 싸울 때 망치를 썼더니 기어코 비단까지 나와 버린 건가…….’
티르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놀들의 왕 비단은 여전히 웃었다. 티르의 허리보다 두꺼운 팔뚝을 들어 팔짱을 끼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그 공주는 다급했던 거다. 왕자 놈들이 네게 연락을 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선수를 쳤어야 했으니까. 결혼제의를 한 거야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 한 것이고. 뭔가 확실한 연결고리가 필요했던 거지.”
티르의 관한 소문은 그야말로 날개 달린 말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왕자들의 귀에 소문이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맨몸으로 용갑주를 쓰러트리는 남자.
제3자가 듣기에 믿지 못할 소문이긴 했지만, 공주의 반응을 보면 왕자들 역시 진짜라 생각할 공산이 컸다.
공주의 입장에서는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왕자 측의 전령이 한발 먼저 티르와 접촉한다면, 티르가 왕자 측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공주 자신은 나설 기회조차 잃어버릴 터였으니까.
결혼 제의 역시 비단의 말대로일 가능성이 높았다. 말이 좋아 동맹이지 결혼과 같은 구속이라도 없다면 언제 티르가 발을 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애, 몸을 빼낼 자신이 있는 눈치였어. 나름대로 확인 과정을 거쳤으면서도, 그렇게 당당히 네 앞에 선 건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던 거지.”
하늘색 미녀 베아트리체는 비단의 품에 안기듯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탄탄하고 거대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더니 은근한 눈으로 물었다.
“그보다 공주의 제의는 왜 수락한 거야? 우리 도련님답지 않은 선택인데.”
모험을 해야 할 때는 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티르는 위험 기피자였다. 율리아를 비롯한 모두의 안녕을 위해서는 티르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공주를 내치고 왕자들과 손을 잡았어야 했다.
“크하하핫 뻔하지 않나. 저 녀석도 내심 왕이 될 야심을 가졌던 거지. 무릇 사내란 그런 법이거든!”
어느새 나타난 전마 갈천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 옆에 나란히 선 검마 백야흔은 조금은 부자연스런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건 ‘그’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백야흔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백야흔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티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니까. 아름다운 소녀의 애절한 부탁에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르지. 그런 그의 마음이 티르 너에게도 작용한 것이고.”
그는 백야흔 자신이나 베아트리체 등과는 달리 정말로 특별했으니까.
티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백야흔은 그런 티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흔들린 건 그냥 너일지도 모르고 말이야.”
레오나 레지세이어의 미모는 저 마녀 베아트리체와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더욱이 티르는 레오나처럼 외강내유인 여자에게 약했다.
하지만 티르는 얼굴을 엉망으로 구기더니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랬으면 그냥 결혼하자고 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결혼은 왜 거절한 거야? 예쁘던데 그 아이.”
베아트리체가 놀리듯 묻자 티르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티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머리가 하늘색인 누구처럼 자기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아니라고 거절해 주는 일이거든.”
“…헛소리가 많이 늘었네?”
베아트리체가 목소리에 조금이지만 날을 세워 말했다. 전마 갈천은 이번에도 껄껄 웃더니 티르를 돌아봤다.
“그냥 이미 따로 마음에 둔 아가씨가 있는 거 아니냐? 그 여기사 꼬맹이도 귀엽더만. 그 공주가 결혼 제의할 때 티르를 돌아보는 눈동자가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는군.”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 메카닉 아가씨도 있고.”
“설마 여동생을 넘보는 건 아니지?”
저마다 재미있다는 듯 한마디씩 끼어들었다.
“아아, 시끄러, 시끄러. 그만들 돌아가!”
티르는 고개와 손을 동시에 휙휙 내젓자 방 안에 있던 모두가 하하호호 웃으며 사라졌다. 잠시 끙 하고 잇소리를 토한 티르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앉아 머리를 젖혔다.
“‘그’라…….”
지금도 티르의 오른팔을 휘감고 있는 검정 쇠사슬의 원주인.
순백의 날개를 모두 꺾인 상태로 바닥에 처박힌 남자.
티르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