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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15화)
Chapter 6.(2)


***

동맹을 맺자마자 티르가 요구한 것은 인력의 제공이었다. 일단은 일손이 무지막지하게 부족한 상황이었으니까.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는데, 왕국 정예라는 실버 나이츠 소속 기사가 4명이나 생긴다면 나름 수지맞는 장사였다.
“문제는 얼굴인데.”
기사 이졸데나 기사 트리스탄은 실버 나이츠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딱히 얼굴이 알려질 정도의 명성도 없었으니 괜찮다고 해도 고참 기사인 랜스터나 단장인 트라이곤은 곤란했다.
특히 트라이곤 카노에의 경우 그 얼굴을 아는 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랜스터는 수염을 자르면 되겠고.”
“뭣이?!”
랜스터가 그야말로 펄쩍 뛰어올랐지만 티르는 무시했다. 그저 가만히 트라이곤을 쳐다보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아저씨는 투구라도 하나 쓰지 그래?”
“투구 말인가? 그 용병왕이라는 자와 같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건 너무 이상하잖아. 차라리 투구가 낫지.”
어떻게 보면 가면보다 투구가 더 이상하긴 했지만, 트라이곤이 말했던 것처럼 용병왕 베이그란츠가 항시 투구를 쓰고 다닌 덕에 무인들 중에는 항시 투구를 쓰고 다니는 종자들이 꽤 되었다.
트라이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굳힌 채 티르를 마주하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레오나를 돌아보았다. 레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트라이곤의 대답에 만족한 티르는 이번엔 레오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주는…….”
“염색이라도 하도록 하지. 그것만으로도 인상이 크게 변할 터이니. 어차피 나에 대해 아는 자들은 내 머리가 금발이고 눈동자 색이 파란 색이라는 것에 꽤나 선입견을 가진 모양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긴 티르도 레오나 공주를 보았을 때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이 그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었다.
“그래 주겠어?”
“아직은 내가 드러나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일단은 티르의 세력이 안정권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못해도 바로크 지방의 패권을 차지하고 얼스터 지방과 연계를 공고히 하기 전까지는 공주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이왕지사 그대는 내가 어떤 색으로 염색했으면 좋겠나?”
“응? 글쎄, 검정이 무난하지 않을까?”
환한 금발에 반대하면 검정이었으니까. 분위기 자체를 바꾸는데도 좋을 터였다.
“흐음, 검정이라. 그대는 검정색을 좋아하나?”
“아니, 뭐 딱히 그런 것은 아니긴 한데.”
티르가 적당히 얼버무리자 레오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하겠다.”
레오나의 대답을 끝으로 잠시 대화의 흐름이 단절되었다.
어색한 가운데 티르는 머리를 살짝 긁적이더니 트라이곤과 레오나 두 사람을 동시에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거 갑작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무례한 요구일지도 모르는데.”
무례라는 말에 트라이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티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저 말했다.
“시간 괜찮다면 우리 기사들이랑 대련이나 한번 해 보지.”
“…대련?”
“그쪽의 실력을 한 번 보고 싶으니까. 물론 수락하겠지?”
확실히 도발이라면 도발이라 할 수 있을 요구였다. 하지만 트라이곤은 오히려 좋다는 듯 어깨를 활짝 피더니 허락을 구하듯 레오나를 돌아보았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실버 나이츠의 저력을 보여 주도록.”
말을 마치며 레오나는 티르를 돌아보았고, 티르는 씩 웃었다.
“이쪽 역시 만만치는 않을 거야.”
“해 보면 아는 일이겠지.”
레오나 역시 지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1시간 뒤, 양측의 기사들은 성내에 있는 연무장에서 서로를 마주하였다.

예전부터 성에 근무하던 사용인들의 말에 따르면, 베스크 백작은 연무장에서 기사들이 단련하는 모습을 자주 관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연무장은 어떤 의미에선 차라리 대련장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지 않나 싶은 모습이었다.
중앙에는 가로세로 10미터, 높이 50센티미터의 돌바닥이 깔려 있었고, 각 벽면에는 기다란 소파가 놓여 있었다.
연무장의 천장은 꽤나 높았는데, 대충 2층 높이쯤 되는 곳에는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형태의 특별 상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연무장 중앙을 기점으로 왼편에는 아벤트 령의 기사들인 슈나이더, 게덴, 에이다가 자리했고, 오른편에는 실버 나이츠 소속의 트라이곤, 랜스터, 트리스탄, 이졸데가 자리했다.
응원석이라 할 수 있을 양측의 소파에는 율리아, 루레인, 레오나 등이 각자 한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1경기는 양측의 홍일점인 에이다와 이졸데의 대결이었다. 상석에 앉아 연무장 중앙을 내려다보던 티르는 슬며시 미소를 그렸다.
“깜짝 놀랄게 눈에 훤히 보이는군.”
실버 나이츠는 골드 나이츠, 브론즈 나이츠와 함께 왕국 3대 기사단을 이루는 한축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변방에 있는 시골 기사들 따위가 자신들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정말 그들의 뜻대로 될까.
“자네 생각은 어때?”
티르는 얼굴 한가득 웃음을 띠운 채 자신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 바이스 발렌시아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이런 걸 저에게 보여 주시는지 모르겠군요.”
“방에만 있으려면 답답하잖아.”
뭘 그런 것을 다 묻느냐는 듯 적당히 답한 티르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작한다.”

에이다의 나이는 올해로 열여덟 살이었다.
일곱 살 무렵에 처음으로 검을 잡았고, 열일곱 되는 해에 기사 작위를 받아 기사가 되었다.
에이다는 몸이 가늘었다.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인 여자의 몸매였기에 강한 힘을 위주로 한 검술 같은 것은 무리였다.
흔히들 근육량이 적으면 가벼운 체중을 살려 속도를 높이면 된다고들 생각하는데, 그 속도를 내는 것 역시 결국엔 근육이었다.
에이다가 속검을 사용하긴 하지만 이 역시 장기전이 될 경우에는 체력 부족을 극복할 방안이 없었다.
상대도 같은 여기사인 이졸데였지만, 이졸데는 160 중반쯤 됨직한 에이다보다 못해도 10cm이상은 더 컸다.
에이다와 이졸데는 가벼운 목례 이후 동시에 목검을 치켜들었다.
티르는 지난 7년 동안 바이스 이상으로 많은 검들을 보아 왔다. 그리고 그랬기에 에이다를 믿었다.
‘단기전, 그리고 겁만 먹지 않는다면 승산은 충분해.’
에이다 자신은 부정했지만 그녀는 이미 게덴보다 강했다. 게덴이 나이를 먹어서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에이다의 재능과 기량이 더 뛰어나다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의 발로였다.
대련은 시작하자마자 에이다는 맹공세를 펼쳤다.
티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평소의 그녀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저돌적인 공격이었다.
이졸데는 처음에는 침착하게 방어하는 듯싶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에이다는 공격에는 일관성이나 패턴 같은 것이 없었다. 겨우 흐름을 읽었다 싶으면 바로바로 새로운 공격이 연이어지는, 말 그대로 변화무쌍하게 쏟아지는 공격의 홍수에 이졸데의 방어가 점차 흔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5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왼편에서부터 비스듬히 올려친 공격을 견디지 못한 이졸데가 목검을 놓쳐 버렸다.
에이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졸데의 목에 목검을 들이밀었다.
“…졌다.”
이졸데가 깨끗이 패배를 선언하자 에이다는 한동안 숨을 못 쉰 사람마냥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5분여 동안 맹공을 펼친 탓에 온몸이 땀투성이였지만 발개진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와! 에이다!”
율리아의 환호를 받으며 연무장 아래로 내려간 에이다는 슬쩍 티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작게 박수를 치는 것으로 응답해 준 티르는 이번엔 이졸데 쪽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실버 나이츠는 실버 나이츠라 이건가.”
패하긴 했지만 그녀가 보여 준 방어술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방어의 실버 나이츠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만큼 에이다가 대단하다는 거지만.’
팔불출 오라비마냥 속으로 우쭐거린 티르는 새로이 연병장으로 올라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주인공 등장이군.”
슈나이더와 트리스탄 두 사람 모두 바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티르는 작게 키득거리며 바이스에게 말했다.
“바이스 너와 비교해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거다. 슈나이더가 잘난 건 얼굴만이 아니거든.”
에이다의 재능도 놀라웠지만 슈나이더의 재능은 차라리 사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변방 영지에 저만한 재능을 가진 기사가 숨어 살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부조리로 느껴질 정도랄까.
그리고 그런 티르의 믿음은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크윽?!”
첫 번째 검격이 오간 순간 트리스탄은 신음을 흘렸고 연이어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이 펼쳐지는 순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져, 졌습니다.”
트리스탄이 조금은 황망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그러기도 할 것이 방금의 연격은 어찌나 빠른지 연무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 가운데 티르와 바이스, 그리고 트라이곤 세 사람만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 트리스탄은 자기가 왜 검을 놓치게 되었는지도 모를 터였다.
율리아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유쾌해하던 티르는 은근슬쩍 랜스터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은 랜스터인가?”
티르의 물음에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랜스터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보고 차륜전을 하라는 거요?”
차륜전이라고 하기에는 트리스탄이 너무 빨리 패배했지만 어찌 되었건 차륜전은 차륜전이었으니까.
하지만 티르는 그게 뭐 문제냐는 듯 슈나이더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지?”
“괜찮습니다.”
“괜찮대.”
연이어진 문답이 어째 신경을 긁었다. 랜스터는 허락을 구하듯 트라이곤을 돌아보았고, 트라이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랜스터는 분기탱천해서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졌다.”
“와아아아!”
율리아는 그야말로 신이 난다는 듯 환호성을 올렸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자기 애인이 이겨서 좋아하는 건데 허물잡기도 뭐했다.
티르는 빙긋 웃으며 트라이곤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기에, 트라이곤은 살짝이나마 눈살을 찌푸렸다.
“저자는 많이 지쳤소.”
랜스터가 패하긴 했지만 트리스탄처럼 쉽게 진 것은 아니었다.
슈나이더의 공격은 빠른 만큼 체력 소진이 심한 기술이었는데 그걸 연달아 몇 번이나 사용했으니 지칠 만도 했다.
“그렇긴 하지만 실버 나이츠 단장과 검을 겨눌 기회가 늘 오는 것도 아니니까. 슈나이더, 너도 하고 싶지?”
슈나이더도 남자인지라 호승심이란 게 있었다. 율리아가 보는 앞이니 더욱 의욕이 불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번에 상대하게 될 자는 왕국 3대 기사단 중 하나인 실버 나이츠의 단장인 트라이곤이었다. 이만한 기회를 쉬이 놓칠 수는 없었다.
“가르침을 청합니다.”
“…좋소.”
나직이 답한 트라이곤은 연무장 위에 올랐다. 천천히 숨을 고른 뒤 목검을 들어 올렸다.
“먼저 오시오.”
“…갑니다!”
슈나이더는 진각을 밟음과 동시에 트리스탄과 랜스터를 쓰러트린 이연격을 퍼부었다.
슈나이더의 기술은 그 흐름만을 보자면 간단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힌 순간 그 반동을 회전으로 돌려, 다시 상대방 검의 손잡이 부근을 가격해 검을 놓치게 한다. 원리는 쉽지만 현실에 구현하기란 극히 난해한 기술이었다.
트라이곤은 이미 슈나이더가 트리스탄과 랜스터를 상대로 이 기술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현재 스스로의 몸으로 그 기술을 받아 내었다.
‘굉장하군.’
트라이곤은 솔직하게 탄복했다. 이만한 나이에 이 정도 검술을 구사하는 자는 왕도에도 몇 없었다.
앞의 여기사가 보인 의외의 기량도 그렇고, 이곳의 영주가 왜 대련을 제안했는지 그 속내를 알 만도 했다.
‘하지만.’
트라이곤 카노에 자신은 실버 나이츠의 단장이었다. 아직 완전히 개화하지 못한 이 정도의 검쯤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트라이곤은 슈나이더가 펼친 기술을 완벽하게 방어했다. 이번에는 공격한 슈나이더가 어떻게 막혔는지를 제대로 모를 그런 수준의 방어였다.
한차례 이를 악문 슈나이더는 이번에는 에이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변화무쌍한 검격을 펼쳤다.
슈나이더의 검은 에이다 이상으로 화려하고 변화무쌍했지만 트라이곤은 이번에도 그 공격 하나하나를 모조리 분쇄해 버렸다.
아무리 변화무쌍한 공격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의 검이 펼치는 공격이었으니까. 무수한 허상을 쳐내고 나면 결국에는 단 하나의 검격만이 남을 뿐이었다.
일격, 이격, 정확히 칠격째가 되는 순간 트라이곤은 지금까지보다 월등히 강한 힘으로 슈나이더의 공격을 쳐냄과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순식간에 슈나이더의 가슴으로 파고들더니 검을 쓸 것도 없이 왼쪽 팔꿈치로 슈나이더의 흉부를 가격했다.
“커헉!”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슈나이더가 뒤로 나자빠졌다.
“져, 졌습니다.”
트라이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뒤 티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하지 않소?”
연이어 실버 나이츠들이 깨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은근히 노기 어린 목소리였다.
티르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쪽이 깨질 텐데?”
단신으로 용갑주를 상대하는 티르였다.
그 같은 행동은 대륙 최강자라 불리는 저 검성 베르무트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트라이곤은 그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공주와 함께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이 몸으로 직접 경험해 보고 싶소.”
트라이곤의 대답에 티르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두말할 것 없이 상석에서 연무장으로 뛰어내린 뒤 율리아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는 슈나이더에게서 목검을 넘겨받았다.
“후회하지 마.”
“…얼마든지.”
트라이곤은 검을 들어 올렸고, 티르는 진각을 밟았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트라이곤은 다음 날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

레스베리아의 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제2왕자 칼 레지세이어였다.
선왕과 제2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칼은 어릴 때부터 덩치가 매우 커, 다 자란 지금은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이었다. 선왕보다는 제2왕비를 닮아 머리칼은 갈색이었고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왕궁 지하로 이어진 통로를 걷던 칼은 자신의 심복인 동시에 가장 큰 이해자인 미노 백작에게 물었다.
“레오나에 대한 소식은 아직인가?”
왕궁에서 뛰쳐나간 레오나가 갈 만한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호국경이 다스리는 남서쪽의 얼스터가 아니면, 은퇴한 왕궁마법사 테오도르가 지배하는 북서쪽의 카나세움으로 향했을 터.
카나세움 쪽이야 자신의 형제이자 동료이며 적인 제3왕자 존 레지세이어가 알아서 처리하고 있을 터였다.
미노 백작은 그 수려한 얼굴을 살짝 숙이며 답했다.
“얼스터 지방에는 얼씬도 하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흐음, 하긴 그 똑똑한 아이가 지키고 있을 것이 뻔한데 그리 쉽게 걸려들 리가 없지. 수색 범위를 좀 더 확대해라. 아, 그리고 재밌는 소문이 돈다던데. 전설의 소드마스터가 나타났다던가?”
뒷부분 쪽에 좀 더 흥미가 어린 듯한 물음에 미노 백작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현재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습니다.”
“얼스터 지방에 잠복하고 있던 인원들을 풀면 되니까 얼마 걸리지 않겠군.”
“예.”
미노 백작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칼은 얼마 전부터 기르기 시작한 수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서 빨리 내전이 끝나야 할 텐데. 정통한 이 나라의 계승자로서 지방 귀족들이 설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군.”
지방 귀족들이 영지전에 혈안이 올라 있는 것은 칼 역시 알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란 자들도 있을 터. 내전이 끝나면 한바탕 청소가 필요했다.
지하로만 이십여 미터를 내려갔을까. 일종의 홀 앞에 멈춰 선 칼은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가겠다.”
“알겠습니다.”
매번 그러했던 일이기에 미노 백작은 별말 없이 예를 표했다. 혼자가 된 칼은 한차례 숨을 가다듬은 뒤 계단으로 향했다.
나선형의 계단은 폭이 좁고 경사가 가팔랐다. 대대로 정통한 왕위 계승자만이 방문할 수 있는 장소였기에, 칼은 내전이 시작된 이후에나 이 장소를 방문할 수 있었다.
지하로 삼십여 미터 이상을 내려가자 기둥 하나 없는 넓은 홀이 나타났다. 벽과 천장에서 마치 별빛과도 같은 작은 빛들이 점점이 쏟아져 조명을 대신했다.
칼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홀의 중앙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날개 한 쌍을 꺾은 나신의 여인이 쇠사슬에 휘감긴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답군.”
나직이 탄성을 토한 칼은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하얀 여인의 나신과 대비라도 되듯 여인의 머리칼은 밤을 닮은 칠흑이었다.
칼은 천천히 손을 뻗어 여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죽은 듯 눈을 감은 여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조만간이야, 조만간.”
멀지 않았다.
내전이 끝나는 날이,
칼 자신이 이 나라의 정통한 왕이 되는 날이.
“멀지 않았어.”
칼은 가만히 미소를 그렸다. 여인의 붉은 입술에 입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