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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16화)
Chapter 7.(1)


소년은 태양의 왕의 최후를 기억했다.
열두 존자 중 넷을 쓰러트리고 선 채로 죽음을 맞이한 왕의 뒷모습을 잊지 못했다.
진정한 왕.
소년에게 있어 태양의 왕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모든 것의 정점이었다.

***

레오나 일행이 티르 진영에 합류한 이후 홀멘을 비롯한 새 점령지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갔다.
게덴은 기사 노드를 비롯해 선발전을 통해 새로 뽑은 기사 카이, 기사 막스와 함께 튀링겐 령을 맡았고, 아벤트 령에도 새로 뽑은 기사 타이, 기사 반이 합류했다.
농번기도 끝났고 곧 겨울인지라, 티르는 각 영지마다 영민들을 대상으로 한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베스크 백작에게 몸값으로 받은 돈도 있고, 튀링겐 자작이 축적해 둔 군자금 역시 모두 흡수했기에 재정에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티르의 세력이 안정화가 되면 될수록 베스크 백작의 조바심은 커져만 갔다.

“으아아아아악!”
집무실에 앉아 연신 술을 들이켜던 베스크 백작은 돌연 괴성을 토했다. 옆에서 술시중을 들던 여인은 그저 오들오들 떨며 백작의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베스크 백작은 여러 가지 의미로 분노하고 있었다.
도시 홀멘의 상실.
그간 쌓아온 부를 모두 투입했다고 과언이 아닐 2급 용갑주 적색의 힐데가르트의 상실.
백작 자신의 꿈은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가슴속에 품었던 야심은 피기도 전에 짓밟혀 버리고 말았다.
“티르 아벤트!”
분을 참지 못한 백작은 술잔을 집어 던졌다. 유리로 만든 값비싼 잔이 집무실 벽에 부딪혀 와장창 깨졌다.
“티르… 아벤트…….”
이 모든 일의 원흉.
백작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다시없을 악의 축과도 같은 존재.
놈은 악마였다. 놈은 괴물이었다. 놈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지 않는 한 백작 자신에게 더 이상의 행복 따윈 없을 터였다.
놈을 죽이고 홀멘을 되찾아야만 했다.
3급 용갑주들을 포기한다 치더라도 2급 용갑주 적색의 힐데가르트만은 되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만 어떻게!
베스크 백작은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그 머리는 현실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베스크 백작에겐 영지전을 치룰 돈이 없었다. 아직도 바로크 지방의 절반을 뒤덮을 광활한 영지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이미 추수가 끝난 뒤였다. 지금 시점에 다시 한 번 영민들을 쥐어 짜내 봐야 영민들의 원성만 늘 뿐 제대로 된 자금을 확보할 수 없었다. 아니, 되려 용갑주들을 모두 잃은 현 상황에선 이미 복속시킨 영주들의 반란을 조심해야 할 판이었다.
“빌어먹을!”
문제는 돈만이 아니었다. 당장에 추수를 다시 해서 자금을 확보한다고 해도, 티르 아벤트 그 괴물 같은 놈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놈은 한 전투에서 3급 용갑주 세 대와, 2급 용갑주 한 대를 격파했다.
백작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몸값을 주고 돌려받은 기사 아율른과 기사 데비드가 거의 입에 거품까지 물어가며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떠들어댄 것만 봐도 그 진실성은 충분했다.
애당초 혼자서 도시 하나를 함락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냐는 말이다!
놈이 전설의 소드마스터라는 소문이 나도니 더 열불이 터졌다. 전설이면 전설답게 전설 속에서나 숨 쉴 것이지 왜 현실에 나타나고 난리냔 말이다.
어쨌거나 놈을 죽여야만 했다. 백작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오리구이를 거칠게 물어뜯으며 가능한 모든 수를 점검했다.
정면 승부는 불가능했다.
이제 와서 지난번 이상의 용갑주 전력을 확보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병사의 수로 승부하면 어떨까. 아무리 놈이 괴물 같은 힘을 가졌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이었다. 수십, 수백, 수천을 상대하다 보면 지치지 않을까.
‘안 돼.’
놈이 수십 수백을 죽일 동안 병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수백 단위 이상의 병력을 모은다 한들, 어차피 영민들을 징집해 만든 병사들이었다. 그렇게까지 목숨 바쳐 싸울 리가 없었다. 분명히 어영부영 와해될 터였다.
더욱이 맨몸으로 성벽까지 뛰어넘은 놈이었다. 병사들을 아무리 긁어모아 봤자 놈이 입에 칼 하나 물고 베스크 백작 자신을 치러 온다면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제길, 제길!”
이 모든 괴로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놈이 언제 올지 몰랐다. 무슨 방벽을 세워두든 놈은 언제고 찾아와 백작 자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
당하기 전에 쳐야만 했다. 정면 승부가 안 된다면 뭔가 다른 수를 써야만 했다.
‘암살.’
퍼뜩 떠오른 것은 암살이었지만, 이내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할까.
백작은 생각했다. 티르에 관해 들었던 모든 것들을, 자신이 본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용갑주들과 싸울 때 티르는 일제 사격을 피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용갑주 한 대를 완전히 격파할 수 있는 찬스를 날려 버리면서까지 화살을 상대한 이유는 뭘까.
괴물 같은 놈이긴 해도, 놈에게도 역시 창칼이 먹힌다는 소리였다.
가능할지도 몰랐다.
창칼이 통한다면, 독이 통한다면.
베스크 백작 자신은 암살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떠올릴 수 있는 방안도 결국 일반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전문 암살자라면 다를 터였다.
무언가 티르나 백작 자신이 떠올리지 못할 그런 비장의 수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2급 용갑주를 구하기 위해 확보해 둔 연줄을 총동원한다면 그런 조직과 손이 닿을 수도 있었다. 지금이야 변방의 영주에 불과하지만 베스크 백작가는 30년 전만 해도 왕도의 이름 높은 명가들 가운데 하나였다.
“티르 아벤트…….”
백작은 다시금 술을 들이켜는 대신 펜과 종이를 가져올 것을 명했다. 뭐라도 방법이 생긴 이상 술을 들이켤 시간 따위는 없었다.
전력을 다해 그 방법에 매달려 끝내는 원하는 바를 이루고 말리라. 백작의 두 눈에 다시금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척이나 흔한 일이었다.
어디서나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생기는 법.
인간이 그 수를 불리면 불릴수록, 그 사회의 복잡성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그러한 수요는 늘어만 갔다.
주시자의 눈은 공급자였다.
클락 윈체스터는 10살 되던 해에 첫 살인을 하였고, 25세 되는 해에 수령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주시자의 눈은 굉장히 폐쇄적이며 수직적인 조직인 동시에 합리적인 조직이었다.
암살조직하면 으레 상상하듯 전대 수령을 죽이고 새로운 수령이 들어서는 상황 같은 것은 없었다.
클락은 3년 동안 철저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은 뒤 수령의 자리에 올랐고, 그 뒤에도 전대 수령은 클락의 좋은 조언자로서 남아 있었다.
주시자의 눈의 주된 활동지는 초대 수령의 고향이라는 호른이었지만, 업무 자체는 튜바와 아발론을 제외한 3개국을 대상으로 하였다.
호른 북동부에는 작은 섬 위에 세워진 고성이 있었다. 윈체스터 후작가의 소유인 고성의 테라스에서 클락은 현 윈체스터 후작인 동시에, 주시자의 눈의 수령으로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반년 전 주시자의 눈은 조직의 운명을 건 모험을 했었다.
대륙의 5대 강자 중 하나인 용병왕 베이그란츠의 척살.
암살이 아닌 척살이란 표현을 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베이그란츠를 죽이기 위해 주시자의 눈이 보유한 암살 기능자들 중 절반에 가까운 32명의 암살 기능자가 유명을 달리하였다.
용병왕 베이그란츠를 척살한 일로 주시자의 눈에 대한 뒷세계의 평은 그야말로 업계 제일이 되었기에 실보다 득이 많긴 했지만 뼈아픈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클락 윈체스터는 자신의 매끈한 턱을 어루만졌다.
영웅의 시대의 유물이기도 한 통신기를 통해 대륙 먼 곳으로부터 들어온 의뢰의 내용을 고심하였다.
레스베리아 남서부에 위치한 바로크 지방의 아벤트 영주 티르 아벤트의 암살 의뢰.
의뢰주는 같은 지방에 거주 중인 베스크 백작,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왕도에서 힘깨나 쓰던 베스크 백작가의 말예이었다.
시골 영주 하나 죽이는 거야 별것 아닌 일이었고, 평소 같으면 별 고민도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클락은 망설였다.
목표물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았다.
“전설의 소드마스터…….”
사전 조사를 나간 조직원의 조사에 따르면, 놈은 정말로 용갑주를 쓰러트렸다.
거절해라.
클락의 상식이 그리 말했다. 놈은 용병왕 베이그란츠처럼 명성이 드높지 않았다. 손해를 입어 가며 죽여 봐야 득보다 실이 더 컸다.
베스크 백작의 영향력이라고 해 봐야 볼 것도 없으니 의뢰를 거절한다 해서 주시자의 눈의 명성에 흠이 될 일도 없었다.
하지만 클락은 망설였다.
놈을 죽여 보고 싶었다.
맨몸으로 용갑주도 쓰러트린다는 괴물을 죽여 보고 싶었다.
암살이란 것은 일종의 기예였다.
인간이란 동물은 창칼에 찔려도 죽지만, 독을 먹어도 죽고, 숨을 못 쉬어도 죽고, 물에 빠져도 죽는다.
전설의 소드마스터건 뭐건 인간인 이상 죽일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전대의 수령은 언제나 클락의 이 같은 점을 걱정했다. 암살 기능자임에도 불구하고 호승심이 있다는 것.
수락한다.
마침내 결정한 클락은 돌아섰다. 통신기를 향해 걸어가는 시간 동안 빠른 속도로 머릿속의 인명록을 검토하였다.
현재 레스베리아에 상주 중인 인원은 14명. 그중 1명은 용병왕 베이그란츠 척살전의 유일한 생존자인 워치 로벤이었다.
클락 윈체스터는 통신기를 들었다. 결정한 바를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