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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17화)
Chapter 7.(2)
***
홀멘은 평화로웠다.
레오나 일행이 상주한 지는 한 달이 지났고, 아벤트, 튀링겐, 홀멘 3개 영지는 이제 완전히 티르의 통제하에 있었다.
“율리아야, 내 동생아.”
모처럼만에 율리아와 단둘이 티타임을 빙자한 회계문서 정리 시간을 보내던 티르는, 은근한 목소리로 율리아를 불렀다.
율리아가 무슨 일이냐는 듯 안경 너머로 시선을 보내자 티르는 한차례 숨을 고른 뒤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너 슈나이더랑 결혼할래?”
갑작스런 발언에 잠시 멍해 있던 율리아는 금세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오빠!”
“영지도 그럭저럭 안정기고, 사귄지도 꽤 되었다며. 너도 슬슬 결혼해도 좋을 나이니까.”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것은 율리아가 열다섯이 되는 해부터였다.
티르가 오기 전까지야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도 있고, 튀링겐 령의 위협도 있고 해서 율리아가 결혼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 같은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으니까.
내년이면 율리아도 열여덟 살이고, 그 정도면 귀족가 아가씨의 결혼 적령기이기도 했다.
슈나이더가 티르 자신의 눈에 안찼다면 모를까, 꽤나 마음에 들었으니까. 더욱이 두 사람 사이의 사이가 돈독하기도 하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율리아 역시 처음에야 발끈했지만 몸을 배배 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결혼 제의가 썩 나쁘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랄까, ‘지금은 좀 곤란한데∼’하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티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너 설마 5월의 신부네 뭐네 하진 않겠지.”
“내, 내 마음이야!”
반응을 보니 정확했다. 5월의 신부, 봄의 신부. 사랑스런 동생의 모습에 티르는 대놓고 키득거렸다.
한참 동안 그 웃음을 감내하던 율리아는 이내 얼굴 표정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러는 오빠야말로 무슨 생각이야?”
“뭐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자 율리아는 짧게 숨을 내쉰 뒤 자세를 바로 했다. 티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레오나 공주.”
“…그녀가 왜?”
“어련히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잠자코 있었지만… 정말로 왕이라도 될 생각이야?”
율리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레오나 공주를 받아들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티르보다 잘 알면 잘 알았지 결코 모르지 않았다.
튀링겐 령을 차지한 것은 튀링겐 자작이 아벤트 령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홀멘을 빼앗은 것은 베스크 백작이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오나 공주를 받아들인 이상 앞으로의 싸움은 그 의의 자체가 달라질 터였다.
티르는 대답하는 대신 조금은 쓰게 웃었다. 율리아는 가만히 손을 뻗어 티르의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영주는 오빠고, 지금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는 것도 오빠 덕분이니까 딱히 참견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난 오빠가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율리아의 손은 따뜻했고 목소리엔 진심이 어려 있었다.
“그래, 고맙다.”
습관처럼 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티르는 생각했다.
율리아의 말마따나 레오나 공주를 받아들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백야흔의 말대로 그것이 ‘그’의 영향이든, 아니면 티르 자신의 무의식의 발로이든 간에 이미 결정된 일을 뒤집을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바로크 지방을 평정한다.
겨울인지라 군사 활동을 하기에 좋은 시기는 아니었지만, 내전이 언제까지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가까운 시일 내로 군사를 동원해 베스크 백작을 친다.
튀링겐 령을 차지할 때와는 양상이 달랐다. 백작 휘하의 영주들과 기사들을 모두 제거할 필요 없이 베스크 백작만을 제거하면 충분했다.
그가 이미 복속시킨 영주들은 재복속시켜서 휘하에 집어넣으면 되었고, 노포크와 같이 몇몇 영주들은 동맹이란 이름하에 세력원 안에 집어넣으면 되었다.
바로크 지방이 아무리 변방이라고 해도 그 모두를 병합하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레오나 공주의 당초 계획대로 호국경과의 연계가 이루어진다면 정말로 레스베리아의 패권을 노려볼 만한 기틀이 잡힌다 할 수 있었다.
‘바로크 지방을 평정하는 것은 늦어도 올 겨울이 지나기 전.’
그리고 나서 정말 율리아를 봄의 신부로 만들어 주자.
티르는 율리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
워치 로벤은 햇볕이 잘 드는 지붕 위에 앉아 홀멘 중앙에 있는 영주의 성을 바라보았다.
수령인 클락 윈체스터의 지령을 받고 홀멘에 도착한 것이 오늘 오전, 미리 파견되어 있던 조직원들에게서 상황과 정보를 전달 받은 것이 2시간 전.
워치 로벤은 올해로 스물두 살이었다. 언제부터 주시자의 눈에서 활동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과거를 돌이켜 보았을 때 주시자의 눈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으니, 아마 거의 나고 자란 수준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북부 출신이었는지 워치의 피부는 우유처럼 하얀빛이었고, 머리칼과 눈동자는 모두 짙은 검정색이었다.
얼굴도 몸도 어릴 때부터 관리를 해 온 덕분에 제대로 꾸미기만 한다면 열에 아홉은 걸어가다 멈춰서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암살을 위한 기술 중에는 미인계도 있었으니까.
너무 아름다운 외모는 인상을 강하게 남기기 때문에 이래저래 암살자에게는 양날의 검이었지만, 그렇다고 일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욱이 아름다운 얼굴을 감추는 변장술 정도야 이미 습득을 넘어서 체화에 경지에 이른지 오래였다.
워치 로벤은 햇볕을 쬐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용병왕 베이그란츠를 척살하기 위해 밟았던 모든 과정들을 되새겨 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독이었다.
용갑주를 맨몸으로 상대하고, 전설의 재림이라고까지 불리는 자를 상대로 무력 다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순간 베이그란츠를 상대하던 시절이 떠오른 워치 로벤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놈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그야말로 제 육감이라도 존재하는 듯 무색무취의 독을 쉬이 간파했다.
미인계 따위는 통하지도 않았고, 혹시나 남색가인가 싶어 미동들을 투입해 봤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놈이 금욕적인 생활을 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주시자의 눈의 손길이 닿은 여인들만을 골라낸 듯 피하기 일쑤였다.
마지막 시도로 워치 로벤 자신이 미인계를 시도했을 때는 오히려 놈에게 허튼짓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다.
그때 그놈의 눈.
인간이 아닌, 차라리 맹수에 가까웠던 놈의 눈.
주시자의 눈은 모든 간접적인 수단을 포기했다. 외로운 늑대마냥 홀로 다니는 놈을 상대로 무력 제재라는 과격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결과는 주시자의 눈이 최정예로 키웠던 32명의 암살 기능자와 용병왕 베이그란츠의 동귀어진이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워치 로벤 자신도 33번째가 될 수 있었다.
무력 제재만은 안 되었다.
이번 목표는 용병왕 베이그란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한 놈이 아니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준비를 한다. 전후 과정 완벽할 것 없이 오로지 죽이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이니, 최대한 신속하고 빠르게 일을 진행시킨다.
일단은 독을 쓴다. 그리고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미 암살과는 거리가 멀지 몰라도 인질을 잡는다.
이번 목표인 티르 아벤트와 용병왕 베이그란츠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인질’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였으니까.
가까운 자라고는 하나 없던 용병왕과 달리 티르에겐 가족이 있었다. 여동생이 있었고, 친동생처럼 아끼는 여기사가 있었다.
무력은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이었다.
워치 로벤은 기지개를 쭉 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붉고 푸른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작전을 개시하였다.
***
“먹지 마. 독 들었다.”
별생각 없이 수저를 들어 올렸던 티르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멈칫했다. 테이블 맞은편에 전마 갈천이 앉아 있었다. 평소와 달리 진중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티르는 순간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에이다와 레오나를 돌아보았다. 전마 갈천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네 것에만 들었으니까.”
티르는 한차례 마른침을 삼켰다. 전마 갈천은 그야말로 독의 대가, 그가 간파하지 못할 독은 세상에 없었다.
“영주님?”
에이다가 무슨 일이냐는 듯 티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전마 갈천이 보이지 않을 테니 식사 중에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한 티르가 이상해 보일 만도 했다.
“아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식사 중에 미안해.”
대충 얼버무리듯 말한 티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레오나 역시 의아하다는 얼굴로 티르를 돌아보았지만 일일이 설명한 시간이 없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아마추어가 아니야. 전문 암살 기능자의 솜씨야.”
빠른 속도로 식당을 빠져나온 티르에게 마녀 베아트리체가 속삭였다.
이를 악문 티르는 통로의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전마 갈천이 다시 한 번 티르를 제지했다.
“만지지 마, 독이다.”
문손잡이에 설치된 독, 고전적이지만 확실하다면 확실한 수단이었다.
아까 식사에 탄 독이야 그렇다지만 이런 방식은 누가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이를 악문 티르는 발로 문을 차 박살 냈다. 그대로 걸으며 물었다.
“하녀인가?”
“하녀는 아니야.”
“그럼 주방이군.”
티르는 주저 없이 발길을 돌렸다.
도중에 마주친 트라이곤이 티르의 흉흉한 기세에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소?”
티르는 트라이곤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외지인. 하지만 이런 일을 벌일 이유는 없다.
“레오나에게 가라. 한시도 떨어지지 마.”
티르의 대답에 트라이곤은 긴말 할 것 없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직후 레오나가 있을 식당 쪽으로 달렸다.
주방은 성의 1층 외각에 위치했다. 뒷정리를 하고 있던 사용인들은 갑작스런 티르의 등장에 깜짝 놀란 얼굴들이었지만 티르는 이번에도 설명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 모두를 한 번씩 돌아본 뒤 전마 갈천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 중에는 없다.”
주방에도 암살자는 없다. 티르는 주방장에게 물었다.
“식재료 보관소는 어디에 있지?”
“예……? 아, 그러니까 이쪽에…….”
주방장은 손수 안내하려 했지만 티르는 그런 주방장을 앞질러 보관소 앞에 섰다. 줄지어 늘어진 음식들을 돌아본 전마 갈천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
암살자는 티르의 음식에 독을 탔다.
식재료 자체에는 독이 없었다.
주방에 일하던 인원 중에 암살자는 없었다.
마녀 베아트리체는 음식을 날랐던 하녀들 중에는 암살 기능자가 없다 하였다.
“성의 사용인들은 전부 홀에 집결시켜라. 지금 당장!”
뒤늦게 쫓아온 주방장에게 소리친 티르는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검마 백야흔이 나직이 말했다.
“핑계 대는 걸로 들리지 모르겠지만, 놈들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티르가 이전 바이스 발렌시아의 튀링겐 잠입을 쉽게 잡아 낸 것은, 전마 갈천과 검마 백야흔, 마녀 베아트리체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 세 사람조차 이번 침입은 단번에 간파하지 못했다.
암살자. 동원한 것은 아마도 베스크 백작.
정면 승부가 되지 않으니 간접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거늘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티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레오나 곁에는 에이다와 트라이곤이 있으니 문제없었다. 티르가 향하는 곳은 율리아의 방이었다.
놈들이 독을 쓰자마자 다음 수를 쓸 거라 생각하기는 힘들었지만 단지 예상만으로 쉬이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넘은 티르는 율리아의 방이 있는 복도에 도달했다. 급한 마음에 방문을 거의 부수다시피 하며 율리아의 방 안에 들어섰다.
본래라면 안경을 쓴 채 티르에게 툴툴거리며 회계장부를 검토하고 있었어야 할 율리아.
티르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벤트 령에 돌아온 이래 가장 큰 분노를 토했다.
텅 빈 율리아의 방 안.
율리아가 있었어야 할 책상 위에는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