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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18화)
Chapter 7.(3)


***

워치 로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주 고전적이지만 그렇기에 성공률도 높은, 평범하게 진행된 첫 번째 시도는 성공했어야 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무색무취의 독을 간파하는 것쯤은 강자의 소양이라도 되는지 티르 아벤트는 단번에 독을 간파해 냈다.
여기까지야 이해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시도이기도 했고 용병왕의 전례도 있었기에, 워치 로벤은 바로 다음 수에 돌입했다.
그런데 놈은 이번에도 간파해 냈다. 문고리를 잡기 위해 손까지 뻗었으면서 순간 멈칫하더니 문을 여는 대신 부수는 쪽을 택했다.
먹을 것에 탄 독과 문고리에 발라진 독을 간파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독을 사용한 위치 로벤 자신도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영웅의 시대의 유물을 통해 티르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워치 로벤은 티르가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 판단했다.
티르 아벤트에게 독은 통하지 않는다.
아직 시도해 볼 방법은 수없이 많았지만 머릿속에서 전부 다 깨끗이 지워 버렸다.
미인계 역시 포기했다. 놈이 색골이 아닌 이상 저만큼 경계치가 높아진 마당에 미인계 같은 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워치 로벤은 빠르게 행동했다. 티르 아벤트가 끔찍이도 아끼는 여동생을 납치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 조금만 늦었더라도 티르 아벤트와 마주하고 말았을 터였다.
성을 빠져나오고도 1시간 여,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워치 로벤은 수하들을 정지시켰다.
“여기서 잠시 휴식 후 은신처로 돌아간다.”
주시자의 눈의 은신처는 홀멘 밖에 위치했다. 성안에 은신처를 두는 것이 이래저래 편리한 점이 많기는 했지만, 안전을 기한다면 성 밖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워치 로벤은 수하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율리아를 바닥에 내려놓게 한 뒤 상태를 살펴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기절한 금발 머리 아가씨는 마치 깊은 잠에라도 빠져든 듯 작고 낮은 숨을 토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워치 로벤은 긴장으로 흐른 땀을 닦았다. 이대로 은신처에 돌아간 뒤 지원을 요청한다.
상대가 용병왕급의 무력을 가졌으니 홀멘에 집결한 10명으로는 소위 말하는 ‘무대’를 꾸미기에 무리가 있었다.
워치 로벤은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천 리 밖을 내다보는 능력은 없을 테니, 은신처에 숨어 있는 자신들을 찾아낼 수는 없을 터였다.
율리아의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서 보내는 등의 방법을 써서 놈의 애간장을 바짝 태우는 한편 지원을 기다린다. 그리고 지원이 도착한 순간 용병왕을 잡았을 때 이상의 대무대를 설치해 놈을 제거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나아가자 다시 안도감이 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난번 용병왕 일 이후로 워치 로벤 자신의 담이 작아지기는 한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다시 출발한다.”
워치 로벤의 명에 수하들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날아온 창에 가슴이 꿰여 죽었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에 워치 로벤은 눈을 깜박였다. 주시자의 눈의 정예들 역시 순간 벌어진 상황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두 번째 투창이 되어 돌아왔다.
“피해!”
워치 로벤의 외침은 투창보다 늦었다. 투창은 여지없이 수하 하나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날아온 방향은 뒤쪽, 홀멘이 위치한 곳이었다.
수하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뽑아 드는 것과 동시에 산개했다. 워치 로벤 역시 쏜살같은 빠르기로 단검을 꺼내더니 율리아의 목에 겨누었다.
“멈추지 않으면 죽인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효과가 있었는지 세 번째 투창은 날아오지 않았다. 워치 로벤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창이 날아왔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는 검정이었고 눈동자는 녹색이었다.
오른팔에는 검정 쇠사슬을 휘감고 있었고, 왼손에는 투창을 하나 들고 있었다.
“티르… 아벤트…….”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워치 로벤은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들을 추적했단 말인가. 흔적 같은 것은 남기지 않았다.
직선 루트로 도망친 것도 아니고 일주일 동안 준비해 둔 최적의 탈출 루트를 통해 여기까지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놈에게는 정말 천 리 밖을 보는 눈이라도 있단 말인가!
티르는 그런 워치 로벤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워치 로벤은 발작하듯 외쳤다.
“다가오지 마!”
율리아의 목에 겨눈 단검에 힘을 주자 티르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워치 로벤은 안심할 수 없었다. 놈의 두 눈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가 마치 녹색 불꽃이라도 된 마냥 활활 타올라 워치 로벤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워치 로벤은 당장이라도 미칠 것만 같았다. 용병왕 척살 전 이후 그녀는 은퇴했어야만 했다.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한, 그야말로 인외의 경지에 다다른 괴물에게서 목숨을 건진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적이었다.
워치 로벤은 아직도 가끔씩은 용병왕과 싸웠던 일을 떠올리며 잠을 설치곤 했다.
주시자의 눈이 자랑하는 암살 기능자 32명이 고작 1명을 상대하기 위해 동귀어진을 택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그때 본 광경, 그때 느낀 공포.
수하들은 워치 로벤의 이런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훈련 받은 대로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티르 아벤트는 그런 암살 기능자들의 움직임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워치 로벤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워치 로벤과 티르 사이의 거리는 약 30여 미터. 결코 가까지 않은 먼 거리.
워치 로벤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들고 있는 투창을 버리라고 해야 할까? 동생의 목숨이 아깝다면 그대로 꼼짝 말고 서서 공격을 당하라고 해야 할까?’
패닉 때문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율리아의 가늘고 하얀 목에 겨눈 단검만이 워치 로벤 자신의 생명줄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너, 본 적이 있다.”
티르가 돌연 꺼낸 말에 워치 로벤은 흠칫 놀랐다. 조건반사에 가깝게 자신의 기억 속에서 티르의 존재를 찾아보았다.
검은 머리에 녹색 눈. 그런 자는 없었다. 암살 대상에도, 그 주변에도 그런 자는 없었다.
하지만 티르는 웃었다.
차갑게 웃으며, 지금까지의 분노와는 조금 다른 눈으로 워치 로벤을 바라보았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전부 죽였어야 했는데, 목격자를 만든다고 살려둔 게 화근이었어.”
워치 로벤은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암살자가 된 이래 두 번째로, 공포에 찬 비명을 질렀다.
녹색 눈,
타오르는 듯한 녹색 눈.
마지막 순간 보았던 눈.
검은 투구 속에 환히 빛나던 그 눈.
“설마… 설마……?!”
티르는 투창을 버렸다. 검은 회중시계를 움켜쥔 채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06시의 봉인해제, 붉은 사자의 대검.

티르의 오른손에 쥐어지는 것은 붉은 대검.
2미터가 넘는 거대한 클레이모어.
워치 로벤의 악몽 속에 자리한 그것, 32명이나 되는 암살 기능자를 한낱 고기 조각으로 바꾸어 버린 파멸의 무기.
“그래, 내가 바로 용병왕 베이그란츠다. 주시자의 눈의 암살자여.”
공포로 가득 찬 워치 로벤의 얼굴을 마주한 채, 티르는 진각을 밟았다. 붉은 대검을 휘둘렀다.

견딜 수 없는 공포에 워치 로벤의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백지같이 하얗게 변해 버린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상태로 티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암살 기능자들을 상대했다.
본래 암살 기능이란 정면 대결을 생각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암살, 목표한 대상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일격으로 목숨을 취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기술.
그런 암살 기능자들이 정면 대결을 해야 하는 현실에 처한 것부터가 이미 어그러진 상황이란 증거였다. 더욱이 상대가 저 티르 아벤트였다. 암살 기능자들은 훈련받은 대로 행동했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었다.
티르가 첫 번째 검격을 펼친 순간 암살자 둘은 저마다의 무기를 들어 검날을 막았다. 하지만 티르의 ‘벤다’기 보다는 차라리 ‘후려친다’에 가까운 공격을 버티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검날을 막았던 무기와 함께 암살자 둘은 그대로 뼈와 살이 어그러져 육편 조각이 되었다.
“크허어어엉!”
티르가 돌연 토한 사자후에 숲 전체가 뒤흔들렸다. 암살자들 가운데 몇인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고, 그렇지 않은 자들 역시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자후를 정면에서 뒤집어쓴 암살자는 눈과 코와 귀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졌다.
티르는 다시 한 번 대검을 휘둘렀다. 귀를 틀어막고 있던 암살자 하나를 종으로 양분함과 동시에 뒤에 눈이라도 달린 마냥 등 뒤에서 날아온 단검을 붙잡아 되던졌다.
단검 투척이라기보다는 발리스타 사격에 가까울 공격은 암살자의 가슴을 완전히 으깨 버렸다.
남은 암살자의 수는 고작해야 셋.
그중 둘은 티르에게 달려들었고 하나는 돌연 몸을 돌렸다. 인질을 이용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앉은 워치 로벤을 향해 도약했다.
티르는 이를 악물었다. 마치 대태도를 휘두르듯 빠르게 일섬을 가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암살자 둘을 양분한 뒤 순간의 지체도 없이 자세를 바꾸었다. 워치 로벤에게 거의 다 도달한 암살자의 등을 향해 있는 힘껏 대검을 집어 던졌다.
콰가가가가가각―!
공기를 짓찢으며 날아간 대검은 그대로 암살자의 등을 관통했다. 그러고도 힘이 떨어지지 않아 암살자의 몸을 꿰찬 채 워치 로벤을 향해 날아갔다.
티르는 순간 신음을 삼켰다. 급한 김에 힘을 낸다는 것이 너무 과했다. 저대로 날아갔다간 율리아도 다칠 우려가 있었다.
워치 로벤이 넋이 나간 상태였지만 그녀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고, 그 단검은 여전히 율리아의 목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워치 로벤과 티르의 대검 사이로 하얀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둔탁한 쇳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암살자를 꿰찬 티르의 대검이 무언가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방향을 바꿔 바닥에 처박혔다.
주변에서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티르도 이번에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조금 전의 실수로 감정이 크게 동요한 상태였으니까.
그런 티르의 얼굴을 마주하며 하얀 그림자는, 새하얀 머리칼을 길게 기른 여인은 붉고 푸른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배후를 캐야 하지 않나? 똑같은 일이 두 번 발생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자칫했다간 여동생도 다쳤을 것 같은데?”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이나 됨직한 얼굴에 어울리는 명랑한 목소리였다.
마녀 베아트리체나 레오나 레지세이어에 뒤지지 않을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하며 티르는 미간을 좁혔다.
“누구지?”
티르 자신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을 둘째 치더라도 저 여자는 방금 워치 로벤의 목을 수도로 가격해 기절시킴과 거의 동시에, 티르가 전력을 다해 던진 대검을 발로 차서 방향을 바꿔 버렸다.
발리스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공격을 발차기로 저지했다는 소리였다.
더욱이 옷차림이 이상했다. 머리에 꾹 눌러쓴 것은 하얀 야구모자였고,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검은 목 티에 탈색된 청바지였다. 철의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영웅의 시대나 청동의 시대에나 존재했던 옷들이었다.
여인은 그런 티르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이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보다 감사는?”
“…고맙다.”
어찌 되었건 티르 자신의 실수로 율리아가 다칠 뻔한 것을 막아 주었으니까.
“어떻게 해결하나 보려 했는데… 이거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네.”
영문 모를 여인의 이야기에 티르는 무어라 반응하는 대신 재차 물었다.
“그래서 누군데?”
“아직은 몰라도 돼, 네 적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거기까지 말한 뒤 슬쩍 모자를 고쳐 쓴 여인은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율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람도 찬데 여동생 감기 걸리겠다. 빨리 데리고 돌아가.”
티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율리아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약이라도 먹여서 재웠는지 깊이 잠들었을 뿐 외상 같은 것은 없었다.
“고맙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이제야 나선 건 고맙지 않군.”
티르가 조금은 뚱하게 답하자 여인은 피식 웃었다.
“그래, 대충 퉁 쳐서 없던 일로 해도 돼.”
티르는 그런 여인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더니 이내 율리아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인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가슴을 펴며 말했다.
“티르 아벤트다.”
“끙… 시안이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짧게 답한 여인은 가볍게 땅을 박차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더 있다간 대화만 길어질 것 같으니까 내가 먼저 사라질게.”
여인, 시안은 그대로 빙글 돌아서더니 지면을 박차 나무 위로 올랐다. 나타날 때 그러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이동하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쫓아가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율리아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 더 급했다.
“시안…이라.”
나직이 여인의 이름을 읊어 본 티르는 이내 씩 웃었다. 정체불명에, 어쩌면 티르 자신과 맞상대가 가능할지도 모를 여인이었지만 어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럼 돌아가 볼까.”
기절한 워치 로벤을 한쪽 어깨에 얹고, 율리아를 품에 안은 채 티르는 홀멘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