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강철의 기사들 1권(19화)
Chapter 8.(1)
밤하늘에 내린 푸른 유성.
수세에 몰린 인간들에게 있어 그것은 처음으로 내밀어진 구원의 손길이었다.
***
지하 감옥은 어둡고 습하고 칙칙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둠에 겁먹고 그 무거운 분위기에 숨이 막힐 터였지만, 워치 로벤에게 이곳은 일종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의미일 뿐 워치 로벤은 지하 감옥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멀어지고 싶어 했다.
그녀가 툭하면 양지 바른 곳에서 햇볕 쬐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런 그녀의 무의식의 발로였다.
워치 로벤은 눈을 떴다. 익숙하고 불쾌한 지하 감옥 특유의 향취 속에서 철들기 전부터 익혀 온 것들에 따라 자신의 상태를 파악했다.
몸 상태 자체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양팔과 양다리가 어딘가에 묶여 있었다.
워치 로벤은 눈동자를 굴렸다. 어둡다곤 해도 시야를 확보하기에 조명은 충분했고, 이내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넓은 지하 감옥 안 한가운데. 양팔과 양 다리가 각각 천장과 바닥에 연결된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워치 로벤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어째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임무, 수행, 납치.
투창, 대검.
대검.
대검?
대검!
순간 워치 로벤은 눈을 크게 떴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비명을 억누르며 정신이 다시 한 번 공포로 잠식되는 것을 막았다.
놈이 살아 있었다.
용병왕 베이그란츠가 멀쩡히 두 눈 뜨고 살아 있었다.
티르 아벤트, 아벤트 령의 영주, 전설의 소드마스터, 용병왕, 베이그란츠.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안녕, 아가씨. 이번으로 네 번째 보는 거지?”
워치 로벤 자신의 코앞, 어느 순간 나타났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척 없이 나타나 웃고 있는 남자. 녹색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꺄아아아아아아아!”
워치 로벤은 결국 참고 참았던 비명을 토했다. 티르가 미처 무슨 짓을 하기도 전에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티르는 잠시 멍한 얼굴로 그런 워치 로벤을 바라보았다. 전투 중에 패닉을 일으킬 정도로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방금 반응은 예상을 조금 웃돌았다.
“어머나, 완전히 악당 같아.”
감옥 창살에 등을 기댄 베아트리체가 손을 입으로 가린 채 우아하게 비아냥거렸다.
“푸하하핫, 이미 훌륭한 악당이지. 악당이고말고!”
전마 갈천은 대놓고 웃었고, 검마 백야흔은 낮게 쿡쿡거렸다.
티르는 순간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야, 여자 다루는 버릇이 서툰 건 여전하구나 티르!”
쾌활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티르는 길고 긴 한숨을 토했다. 대검을 사용한 순간 예견했고, 이제는 현실이 되어 버린 그것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 거의 반년만이네!”
발랄하기 짝이 없는 붉은 머리칼의 미녀가 베아트리체 옆에서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티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칼은 무척이나 탐스러워 마치 사자의 갈기 같았고, 엘프임을 드러내는 긴 귀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맑고 파란 눈동자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마녀 베아트리체조차 한수 접어 줄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육신은 붉은 망토와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황금색 레오타드로 감싸여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사자심왕 레이그란츠, 은의 시대에 태어난 타입 엘프Type Elf의 전투형 시리즈인 ‘요정왕 시리즈’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다른 영들에게도 그다지 강하지 않은 티르이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특히 더 약했다. 티르는 어설프게 웃으며 인사한 뒤 애써 그녀를 외면했다.
하지만 레이그란츠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까 그 하얀 머리 아가씨는 누구야? 네 공격을 호쾌하게 막아 버리던데.”
대검에 꿰뚫린 암살자의 시신에 시야가 가린 터라 티르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대검 그 자체와 동화해 있던 그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대검을 향해 거침없이 날린 내려찍기. 더욱이 시안이 그 당시에 신고 있던 것은 무슨 특별한 신발도 아닌 그냥 보통의 운동화였다.
“몰라, 나도 오늘 처음 봤고 들은 거라고는 시안이란 이름 하나뿐이니까.”
티르는 조금은 무심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지만 속내는 조금 복잡했다. 어쩌면 그녀도 티르 자신과 비슷한 존재일지 몰랐다.
“아무튼 그 여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해야겠군.”
감옥 벽에 등을 기댄 채 놀들의 왕 비단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용병왕 시절을 청산하기 위해 주시자의 눈이라는 놈들한테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던 것인데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다행히 잘 끝났지만 자칫하면 율리아가 크게 다칠 뻔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처절하게 파괴하고 박살 내야만 한다.
많은 것을 함축한 비단의 말에 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영들 역시 장난치는 것을 그만두고 저마다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주시자의 눈을 제거한다. 다시 덤빌 엄두를 못 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린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앞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베스크 백작.”
티르는 베스크 백작이 한 행동을 이해했다.
베스크 백작은 싸움이 안 될 것이 분명한 정면 승부 대신 측면 공격을 노렸을 뿐이었다. 이것에 대해 비겁하니 마니 헛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해만 할 뿐,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죽인다.
애당초 제거할 생각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지체하지 않는다.
결행은 이틀 뒤, 티르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같은 시간, 멀고 먼 레스베리아 반대편에 위치한 땅에서 보라색 머리 청년은 밤하늘을 우러렀다.
“존이여, 나의 주인이여, 새가 왜 날갯짓을 하는지 의아해 해 본 적이 있나?”
시적인 물음에 청년 앞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던 갈색머리 소년은 짧게 답했다.
“…지랄을 한다.”
“오, 나의 주인이여 그대는 언제나 사춘기 소녀처럼 새침때기 같구려.”
보라색 머리 청년은 다 이해한다는 듯 킥킥거리며 양팔을 벌렸다. 잠시 그런 청년의 모습에 치를 떤 소년, 제3왕자 존 레지세이어는 정원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헛소리는 그쯤하고 형을 이길 방안이나 생각해 봐, 마그누스.”
존의 형 칼 레지세이어.
왕과 왕세자를 제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다시없을 동맹이었지만 이제는 다시없을 경쟁자인 남자.
보라색 머리 청년은, 마그누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다시금 밤하늘을 우러르며 말했다.
“존이여, 네 형이‘그녀Type Arch Angel’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네 승산은 한없이 낮아진다.”
마그누스의 말에 존은 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이야기야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본 것이 아니다 보니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렇게나 강조해서 말하니 일종의 반발심까지 생겼다.
“그녀가 그렇게 대단한가? 난 아직도 잘 모르겠군.”
마그누스는 이번에도 혀를 찼다. 연극에 나오는 배우마냥 과장스런 손동작으로 허공 여기저기를 어루만졌다.
“대단하다. 대단하고말고. 그러니 네 형이 그녀를 손에 넣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마그누스, 어차피 슈발츠 대왕 외에는 그녀의 힘을 손에 넣은 자도 없잖아. 난 우리 형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일 것 같지는 않아.”
칼 레지세이어가 훌륭한 전사냐고 묻는다면 존도 동의할 터였다. 칼은 분명 거인의 혼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력한 전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불세출의 천재나 역사에 길이 남을 기사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존이여. 네 말대로 그렇다면 다행이지.”
마그누스는 화려한 손동작을 그만두더니 존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까지와 달리 조금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아, 슈발츠 대왕은 참 나쁜 놈이었어. 그녀를 실컷 이용해 먹고는 자기 죽을 때가 다 되니까 왕성 지하에 처박아 두다니 말이야.”
“우리 조상이지만 악랄하군.”
존이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자 마그누스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쁜 놈이지.”
전설의 슈발츠 대왕. 무려 오백여 년 전 사람이었지만 망각을 모르는 마그누스에게 있어서는 어제 만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이 인간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존은 마그누스의 기분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대신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마그누스, 네게 좀 물어볼 게 있다.”
“언제나 묻고 있으면서 뭘 또 새삼스럽게 그러나, 물어보게나.”
마그누스가 선선히 답하자 존은 눈동자를 굴렸다. 유리구슬 같은 마그누스의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바로크 지방에 전설의 소드마스터의 재림이라는 놈이 나타났어.”
“오호?”
“진위 여부를 확인 중이기는 하지만, 일단 소문에 따르면 맨몸으로 2급 용갑주를 박살 냈다는군.”
“철의 시대에 그런 작자가 나타나다니 그거 참 신기하구만.”
마그누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충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따위로 반응할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존은 눈썹을 꺾었다. 조금은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혹시 놈도 슈발츠 대왕과 비슷한 부류 아니야? 그녀가 달랑 한 개체만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전설의 소드마스터는 실재한다.
과거에 그러했고, 오백여 년 전에도 그러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완전히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마그누스는 학생에게 좋은 질문을 받은 선생마냥 흐뭇하게 웃었다.
“좋은 지적이다 소년. 물론 그녀가 달랑 한 개체일 리는 없지. 하지만 그녀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과거에는 희소했고, 지금은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마 놈은 그녀보다 좀 더 열등한 개체의 힘을 얻은, 그러니까 아마도 ‘그녀들Type Angel’의 힘을 얻은 존재일 거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중앙’의 놈들이 난리를 쳤겠지.”
중앙, 아발론.
영웅의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땅.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존이여. 그녀가 아니라 그녀들의 힘이라면 1급 용갑주로도 충분히 제압이 가능하니.”
“뭐, 걱정은 안 해. 어차피 놈은 지금 형의 영향권 안에 있으니까. 형이랑 박 터지게 싸우고 말겠지.”
칼 레지세이어 역시 존 자신과 마찬가지로 1급 용갑주 몇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전설의 소드마스터라 놈이 좀 더 활발히 깽판을 쳐주기를 바랄뿐이었다.
“아무튼 서둘러야 하는 건가. 왕성은 넘겨줬어도 널 손에 넣었다고 좋아했는데, 그 왕성 밑에 더 큰 조커가 숨어 있었다니 원.”
“전부 너 하기 나름이다. 힘내라 왕자, 미래의 왕은 너다.”
마그누스의 격려에 머리를 긁적인 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저앉아 있는 그를 보는 대신 그의 등 뒤에 자리한 강철의 거신을, 마그누스의 본체를 돌아보았다.
“그래, 누가 뭐라 해도 마그누스 네 주인은 현재 나니까.”
1급 용갑주 마그누스 더 블레이드. 영웅의 시대에 인류가 만들어 낸, 가히 예술이라 불러도 좋을 파괴 병기.
중앙이 나서지 않는 한 현시점에서 그의 적수는 없었다.
존은 정원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었다. 지금 머무는 곳은 고작해야 공작의 성이었지만 머지않은 시일 내에 왕성에 들어갈 것을 다짐하였다.
***
겨울의 시작과 동시에 아벤트 군은 베스크 백작 령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동원한 총병력은 800여 명, 그중에 기병은 100기나 되었다. 현재 아벤트 군이 보유한 3급 용갑주 2대 역시 모두 참전한, 아벤트 군의 총력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전력이었다.
베스크 백작 역시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영지에서 긁어 낼 수 있는 병력을 총동원, 2,000여 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진을 치고 맞섰다.
양군이 성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것은 아벤트 군이 진군을 개시하고도 일주일 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