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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10화)
제5장 축제를 벌여라(2)


하멜은 팔과 다리에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는 침대에 누워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종일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셨지만 부러진 뼈가 붙을 때까지는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다.
“이거 천하의 경비대원 하멜 꼴이 말이 아닌데?”
하멜이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퀭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우리 영주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납시다니 이거 영광인걸? 으윽!”
하멜은 단번에 카라스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멜 역시 장난스럽게 되받아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다가는 팔다리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절로 얼굴을 찡그렸다.
“다친 데는 어때?”
“뭐 이쯤이야 가뿐하지. 원래 뼈는 부러질수록 단단해진다는 말도 있잖아?”
하멜은 금세 안색을 고치고는 씩씩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뼈가 부러지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고 그 외에 크게 다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카라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디 보자.”
카라스는 하멜의 부러진 팔과 다리를 찬찬히 살피고는 몸 구석구석을 진단해 보았다.
“다행히 뼈도 제대로 붙은 것 같고 특별히 상한 곳은 없는 것 같다. 힘 빼고 가만히 있어 봐.”
고오오오오.
다행히 부러진 것 외에는 큰 상처나 후유증이 남을 만한 상처는 없었다. 카라스는 부러진 부위의 혈을 짚고는 자신의 마나를 서서히 흘려보냈다. 하멜 몸속의 탁한 기운을 몰아내고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도록 조치한 것이다.
“뼈도 다 아문 것 같으니까 며칠 지나면 움직여도 될 거다.”
한동안을 그렇게 나름대로의 치료를 마친 카라스는 손을 툭툭털며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너는 가끔 신기한 구석이 있단 말야? 어릴 때도 장난치다 내가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잖아. 그때도 네가 뼈를 맞추고 지금처럼 손바닥을 대 줬었지. 그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거든. 상쾌하고 뭐랄까 무언가가 내 몸속에 들어온 것 같은.”
하멜은 카라스의 치료가 끝나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산 정상에 올라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분이랄까. 어릴적에도 경험한 것이지만 카라스에게는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하멜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 그래? 내 손이 약손인가?”
카라스는 뜨끔했는지 능청을 떨며 얼버무렸다.
“아무튼 넌 참 이상했지. 특별히 뭔가를 배운 것 같지도 않았는데 타고난 건가? 내가 동네에서 유일하게 이길 수 없는 녀석이 바로 너였으니까.”
하멜은 보면 볼수록 카라스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언제나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카라스에게 무슨 놀이를 하든 이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힘으로라면 같은 또래에서 상대가 없는 하멜이었지만 카라스에게만은 힘에서조차 밀렸으니 하멜이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멜은 카라스가 그러한 운동 신경이나 재능을 타고난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나이를 먹어 갈수록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훗. 애꾸 파 놈들 중에 널 이렇게 만든 놈 말이야. 제법이라며? 평소에 못 보던 놈이라고 하던데.”
카라스는 애꾸 파로 화제를 바꿨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말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평생 혈루검을 쓰고 싶지 않았고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나도 처음 본 놈인데 제법 정도가 아니라 뭐랄까… 제대로 수련한 것 같더라. 우리처럼 그냥 마구잡이는 아니었어.”
하멜은 자신의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팬 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멜이 지금껏 붙어 봤던 누구보다 강했다. 단순히 힘이 세고 안 세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 것이다.
“그 정도야? 네 운동 신경도 남달랐는데 아무리 그래도 일방적으로 당했다며?”
하멜의 이야기에 카라스도 흥미가 생겼다.
하멜을 어려서부터 봐 왔기에 하멜이 얼마나 타고난 싸움꾼인지는 카라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설프게 수련해 가지고는 하멜을 이렇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멜을 이렇게 만들 정도면 시장통 하급 불량배의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했다.
“야, 창피하다. 한 대도 못 때려 봤다. 내가 휘두르면 귀신같이 피하는데 맞을 듯하면서도 간발의 차이로 피하더라. 운이 좋은 건지 일부러 그렇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멜은 과장스런 몸짓으로 이야기하면서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자 상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다시금 느껴졌다.
자신의 주먹을 머리카락 하나 차이로 매번 피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모두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알았다. 뭐 부딪쳐 보면 알겠지.”
“니가? 하지 마라. 너는 이제 이곳의 영주야. 그런 싸움판에 끼어들 위치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놈… 위험한 놈이다. 내 생각에는 일부러 시비를 건 것 같아. 굳이 내 팔다리를 이렇게 만든 것도 그렇고.”
하멜은 기겁을 하며 카라스를 말렸다.
이제 카라스는 엄연한 이곳의 영주였고 그런 막싸움에 끼어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공격했던 자라면 카라스도 무슨 일을 당할지 걱정스러웠다.
“일부러?”
카라스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왠지 단순한 시비에 휘말린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이 들어. 우리 경비대를 끌어들이려고 그랬던 것 같아. 당시에는 몰랐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애꾸 파에서 왜 경비대와 부딪치려고 하지? 무슨 득이 있다고.”
“모르겠다. 그리고 요즘 시장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
하멜은 요사이 헤론 영지의 미묘한 분위기에 대해서 미묘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시장통을 중심으로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그런 분위기였다.
“이상하다니?”
“나도 정확히 집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것 같거든. 시장통에서 뒤를 봐주는 건달들의 움직임도 수상하고.”
“건달들이야 상인들 자릿세나 뜯어먹는 놈들인데 수상해 봐야 별수 있겠어?”
“그게 아니라 그놈들이 아무리 잡초 같은 놈들이라지만 그들만의 룰이 있거든. 서로의 구역은 웬만해서는 침범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세력 싸움이 한창인 것 같아. 단순히 자리 다툼이 아니라 작은 군소 조직들을 전부 통합하려는 분위기거든.”
하멜은 다른 건 몰라도 시장통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이곳 시장통의 건달들은 크고 작은 조직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들은 간혹 자리 다툼을 하기도 하고 싸움에 지면 떠나기도 했지만 작정하고 시장 전체를 장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이 더욱 잘 알기 때문이다. 중소 상인들에게서야 자릿세를 받아내지만 시장의 주인은 그들이 아니었다.
각국에서 몰려든 거대 상단들. 그들은 헤론 영지라는 대륙의 각각의 왕국들이나 다름없었다. 자칫 그들의 눈 밖에 난다면 군소 조직들이야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건달들은 싸워야 할 상대와 굽혀야 할 상대를 누구보다 잘 구분하는 눈치라면 도가 튼 무리들. 그러한 그들이 되지도 않는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그런 그들이 위험을 무릅써 가며 뭔가 일을 벌인다는 것은 무언가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는 뜻이었다.
“음. 그건 좀 문제가 있겠는데? 그놈들까지 커다란 조직이 되 버린다면 골치 아픈데.”
카라스도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단과의 관계는 둘째 치더라도 비록 불량배들이지만 커다란 세력을 이룬다면 그때부터는 그들을 상대하는데에 더 많은 수고를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 우리 경비대를 그렇게 만든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아.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 같은 것. 그리고 새로 올 영주에 대해서도 겁을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냐?”
하멜은 그들의 이러한 행동이 우선 카라스를 의식한 것으로 해석했다.
십 년 전 부임해 왔던 영주에게 그러했듯이 이제는 누군가의 관리를 받는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십 년 간 그러한 것에 익숙해진 자들이 다시금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고 경비대의 일은 그 본보기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카라스가 이번 일로 흥분하는 것이 누구보다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렇단 말이지?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감히 내 친구를 건드렸단 말이지.”
하지만 카라스의 표정은 겁먹기는커녕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눈빛에서 풍겨 나오는 것은 진한 살기였다. 너무도 빨리 지나치는 살기여서 하멜은 느끼지 못했지만 만일 하멜이 봤다면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의 부드럽고 장난스럽던 카라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녀 리아에게 당하면서도 쩔쩔 매는, 부모님에게 성인이 되어서까지 어리광을 부리는 그런 친구의 모습은 절대로 아니었다.
“야야, 아서라. 나야 니 말대로 며칠 지나면 나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놈들은 지킬 게 없는 놈들이야. 그러니 겁나는 것도 없는 놈들이지. 한마디로 무데뽀 같은 놈들인데 괜히 건드려 봐야 위험하다.”
하멜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카라스를 말렸다. 자신이 당한 것을 복수해 주기 위해 굳이 애꾸 파에 찾아가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통 불량배는 막장 중에서도 막장인 인생들.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면 정말 위험한 자들이었다. 하멜은 십 년 전의 영주가 당했던 일들이 절로 떠올랐기에 카라스만큼은 반드시 지켜 주고 싶었다.
“하멜, 난 말이지 그저 아버님이 하도 소원하시길래 영주가 된 것뿐이야. 영주가 되서 이곳을 다스린다거나 내 맘대로 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어.”
카라스는 자신이 남작의 작위를 받아 헤론 영지의 영주가 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행복을 지켜보는 것은 카라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신분 승상에 대한 욕심도 권력에 대한 욕심도 없는 카라스가 남작이 된 이유인 것이다.
“나도 알지. 네 아버님이 오죽 하시냐? 후후. 평생 소원 이루셨으니 지금쯤 입이 귀에 걸리셨겠네. 너도 아버님 소원 이루어 드렸으니 처음 생각처럼 그렇게 둥글게 살아라. 부탁이다.”
하멜 역시 말하지 않아도 카라스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화목한 가정. 카라스의 집에 놀러 갈 때면 넘치는 웃음과 정에 자신도 마치 가족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읜 하멜에게는 카라스의 가족이 자신의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인 하노스가 하멜을 르노와르 상단에 자꾸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과 친구를 건드리지 않을 때에 한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야. 하지만 누군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건드린다면, 아니, 건드리려는 기미를 보인다면 늦기 전에, 그놈들이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내가 나서야 해.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려 했는지 알게 해 줄 거야.”
카라스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전생에서는 복수에 눈이 멀어 피에 굶주린 악귀와 같은 일을 저질렀고 그로 인한 고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또 그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자신의 행동은 아마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관계없는 사람들에까지 살인귀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과 친구를 해한다면 그 누구라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겠지만 그 외에는 함부로 검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방지하는 것뿐이었다.
카라스가 전생과 현생을 오가며 선택한 것은 그것이었다.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차라리 자신이 악귀가 되는 것. 그것만이 지금 카라스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지 마. 일이 커지면 다른 사람들까지 다치게 된다.”
카라스가 너무 심각하게 나오자 하멜은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닌가 더욱 염려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전에 내가 나설 생각이야. 단 직접적인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설령 내 원수의 가족이라 해도 나는 티끌만큼도 건드리지 않을 거야. 두 번 다시는…….”
카라스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자신을 환하게 맞아 주는 부모님. 언제나 웃게 만들어 주는 하녀 리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편이 되 주는 친구 하멜. 이들이 영원히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든 할 생각이었다.
“카라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평소의 카라스와는 너무도 다른 무서울 만큼 차가워진 얼굴에 하멜은 걱정스러웠다. 자신이 모르는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풍요로운 가정에 태어나 화목하게 자란 카라스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던 것인지 하멜로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아무튼 넌 빨리 회복할 생각이나 해라. 네 말대로라면 경비대도 새롭게 정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럼 간다.”
“난 괜찮으니까 바보 같은 짓 하면 안 된다. 알았지?”
하멜은 방을 나서는 카라스의 뒷모습이 왠지 평소의 다정하고 장난스러웠던 친구의 모습과는 어딘지 다르게 느껴졌다. 하멜은 마지막까지 카라스가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닌지 만류했지만 카라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문을 나서 버렸다.
“감히 내 친구를 건드려? 날 겁주려고? 그럼 다음 차례는 내 가족이라도 해치겠다는 건가? 절대로 다시는 그 누구라도 내 주변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도록 해 줄 것이다.”
카라스의 눈에서는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만일 자신을 노리고 하멜을 저렇게 만든 것이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무언가를 위해 소중한 사람들을 볼모로 삼는 것만큼은 카라스에게는 절대로 용서되지 않는 죄악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