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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12화)
제6장 살고 싶으면 납작 엎드려 머리를 처박아라(2)


카라스와 함께 시장통을 통과해 경비대가 도착한 곳은 꽤 넓은 창고용 건물이었다. 이곳은 애꾸 파의 근거지로 하루하루 거둬들인 수입과 물건들을 모두 모아 싸이클롭에게 바치고 잘못된 것은 없는지 싸이클롭과 부두목이 직접 그날그날 점검하는 곳이었다.
“훗! 여긴가? 키클롭스 상가 번영회?”
카라스는 커다란 간판에 쓰여진 이름을 보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상가 기생충도 아니고 번영회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눈 가리고 아웅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 이곳이 애꾸 파의 본거지입니다. 지들은 키클롭스 파라고 부르지만 모두들 애꾸 파라고 부르지요.”
“들어가지.”
“자, 잠시만요. 영주님!”
카라스가 다짜고짜 키클롭스 상가 번영회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헉스가 다급하게 막아섰다.
“왜? 무슨 문제 있나?”
카라스는 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약속하셨잖아요, 나서시지 않기로.”
헉스는 다시 한 번 이곳에 오기 전 반드시 지키기로 했던 카라스와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약속은 충분히 기억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지. 난 뒤따라 들어갈 테니까.”
카라스는 하는 수 없이 경비대 뒤로 물러섰다. 먼저 들어가든 나중에 들어가든 자신으로서는 별 관계는 없는 일이었다.
“약속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럼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요.”
“알았다니까.”
거듭 신신당부를 하며 잔소리를 하는 헉스의 모습에 카라스는 귀찮았는지 손을 휙휙 내저으며 한 발 물러서야 했다.
“모두 들어가자. 무슨 일이 생기면 영주님을 보호해야 한다.”
헉스는 조원들을 향해 비장한 목소리로 주의를 당부했다.
“조장이 그런 말 안 해도 다들 그럴 생각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도 명색이 영주님의 경비대인데.”
조원들 역시 헉스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비록 대우를 받지는 못해도 자신들의 신분은 엄연히 경비대. 영주의 신변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후우, 들어가자.”
헉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키클롭스 상가 번영회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짧은 통로와 또 하나의 문이 있었는데 그 앞에는 애꾸 파의 조직원 둘이 벽에 기대선 채 경비를 서고 있었다.
“니들이 여긴 웬일이냐? 이봐 헉스! 미친 거 아냐?”
경비를 서던 애꾸 파의 조직원이 헉스를 알아보고는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글빙글 돌리며 비웃었다.
지난번에 경비대가 그렇게 험한 꼴을 당한 것을 알면서도 이곳 본거지에 찾아왔으니 정상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잠시 니들 두목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가서 말 좀 해 줘.”
헉스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두목하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떼거리로 몰려와서 뭐하자는 건데? 한판해 보자고?”
헉스의 잔뜩 긴장한 모습에 조직원은 잔뜩 인상을 주며 겁을 주었다.
헉스 뒤로 모여 있는 경비대원들의 숫자가 제법 되었지만 이곳은 애꾸 파의 본거지.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숫자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이다.
“그런 것 아니니까 두목한테 말 좀 해 달라니까. 급해서 그래.”
다짜고짜 싸움을 걸려는 조직원의 모습에 헉스는 고개를 휘저으며 싸울 뜻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곳에서 싸운다면 그야말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경비대가 우리 두목하고 무슨 볼일이냐니까?”
조직원은 계속해서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걸어왔다.
“밖이 왜 이리 소란스럽냐?”
밖이 소란스럽자 부두목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뜩이나 크락슨의 문제로 싸이클롭과 언쟁 아닌 언쟁을 하고 있는 중인데 짜증이 더욱 치밀어 오른 것이다.
똑똑.
“두목! 경비대놈들이 두목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는뎁쇼?”
조직원은 하는 수 없이 경비대가 와 있다는 것을 안으로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헉스를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경비대? 그놈들이 왜? 매가 부족했대?”
경비대가 왔다는 소리에 두목 싸이클롭도 관심을 보였다.
“당장 쫓아 버릴깝쇼?”
“아니다, 일단 들여보내라. 무슨 일인지 궁금하잖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행동 잘해라. 안 그럼 오늘이 경비대 송장 치우는 날이 될 테니까. 헉스, 특히 너 말야!”
싸이클롭의 명이 떨어지자 조직원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경비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들여보내면서도 험상궂은 표정으로 위협을 가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크흠. 들어가자.”
헉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등에서는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이것들이… 누가 다 들어가라고 했어? 어, 어쭈? 내 이것들을 그냥!”
헉스의 뒤를 따라 경비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가자 문앞을 지키던 조직원들은 경비대를 막아서며 더욱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스무 명이 넘은 경비대가 모두 들어간다면 무슨 소란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놔둬라! 너는 애들 모아서 단단히 지키고. 혹시 모르니까 한 놈도 도망치지 못하게 밖에서 대기해라.”
“예, 두목.”
싸이클롭의 명령에 문을 지키던 조직원은 쌩하니 밖으로 나갔다. 시장에 흩어져 있는 조직원들을 모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경비대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느냐?”
싸이클롭은 삐딱한 시선으로 깔아보며 무척이나 거만한 얼굴로 물어보았다.
“그게… 지난번 폭행 사건 있지 않소? 우리 대원들을 두목의 수하들이 폭행한 일 때문이오.”
헉스는 잔뜩 긴장한 채 힘겹에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번 애꾸 파와의 충돌 문제를 따지기 위함인 것이다.
“폭행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 경비대원들을 폭행한 일을 잊었단 말이오? 그 때문에 당시에 출동했던 대원들이 대부분 몸져 누워 있단 말이오.”
싸이클롭이 시치미를 떼고는 딴청을 부리자 헉스는 하멜이 이끄는 1조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일일이 이야기해 주었다.
“헉스라고 했던가? 네놈이 아주 간이 부었구나. 치료비라도 달라고 기어온 모양인데 네놈들까지 그 꼴 나고 싶지 않거든 썩 물러가거라. 내가 오늘은 특별히 봐주마.”
싸이클롭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한껏 인심을 쓰는 척했다.
아무리 궁색해도 그렇지 건달에게 치료비를 달라고 하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싸이클롭은 그런 발상을 한 헉스와 경비대가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가 지금 치료비 달라고 온 게 아니란 말이오.”
헉스는 답답했는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여차하면 카라스가 나설 판이라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고자 노력 중인데 싸이클롭은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이 어디서 감히 두목님께 그따위 말투로 대들고 지랄이야? 혀가 반 토막이라도 났냐? 그놈의 혀부터 잘라 줘야 공손하게 굴 테냐, 앙?”
이때 부두목이 벌떡 일어서며 헉스를 향해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고함을 쳤다.
처음부터 자신의 두목을 향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언성까지 높이자 꾹 참고 있던 것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알량한 경비대라는 신분에 그나마 봐주고 있었는데 더 이상은 봐줄 수 없었던 것이다.
“거참. 그래 치료비가 아니면 네놈들이 몰려온 이유가 뭐냐? 이유라도 들어 보자.”
부두목이 욱하며 경비대에게 욕을 하자 싸이클롭은 그런 부두목에게 참으라고 손짓했다.
치료비도 아니라면 왜 경비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설마 자신을 잡아가려는 귀여운 생각을 하진 않았겠지만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었다.
“지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앞으로 경비대에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지 마시오. 경비대는 엄연히 헤론 영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영주님 직속의 조직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하오.”
헉스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경비대의 위상은 물론 싸이클롭에게 요구하는 사항들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마음 같아서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카라스가 또 나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은 돌이킬 수 없게 흘러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이 이렇게 앞장서서 해결하는 길만이 카라스를 지키고 또 다른 불상사를 방지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헉스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아. 그러니까 네놈 말은 경비대를 받들어 모셔 달라는 것이냐? 그러고 보니 르노와르 상단주의 아들이 영주로 왔다는 말은 들었다만 지금 그 애송이를 믿고 까부는 것이냐?”
헉스의 요구 사항에 싸이클롭은 기가 찼다. 하마터면 점심에 먹었던 포도씨가 튀어나올 뻔했다. 말이 경비대지 헤론 영지에서 경비대가 제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이제 경비대는 말 그대로 이름뿐이었다.
특히나 십 년 전 영주가 살해당하면서부터는 영주도 지키지 못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는 시장통의 건달 패거리들에게 조차 업신여김을 당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그것은 조직의 규모를 떠나 개개인의 자부심의 문제였고 경비대를 무시한다고 해도 어쩌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인지도 몰랐다. 헤론 영지의 경비대가 가진 약점이자 원통함이었다.
그런 경비대가 십 년 만에 영주가 생겼다고 이렇게 목에 힘을 주고 빳빳이 세우고 다닌다는 것은 싸이클롭에게는 콧방귀를 뀔 만한 일이었다.
헤론 영지에서 이번에 새로운 영주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싸이클롭이 알기로는 시장통의 군소 조직들 중에서도 이번에 새로 올 영주가 어떤 인물인지 자신들에게 어떤 해를 입히지는 않을지 몰래 시험했다는 소문도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내려진 결론은 이번에 새로 올 영주는 있으나마나 한 허수아비일 뿐만 아니라 감히 자신들과 맞서 싸울 배짱도 없는 나약한 인물이라는 평이었다.
그런 애송이를 믿고 경비대가 이렇게 설치는 것이 싸이클롭으로서는 웃기지도 않는 일인 것이다.
“영주님께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이는 국법을 어기는 일이오! 영주님께서는 국왕 폐하를 대신하여 이곳을 다스리시는 분이시오!”
영주에 대한 지나친 언사에 헉스는 또다시 언성을 높이며 싸이클롭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떽! 이곳의 영주가 바짓저고리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지나가는 똥개 새끼도 아는 건데 꼴에 영주라고 엄포라도 놓겠다는 것이냐? 뭐 르노와르 상단의 힘을 앞세운다면야 수긍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르노와르 상단의 힘이지 있으나마나 한 영주라는 직함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국법이고 뭐고 지껄일 필요는 없단 말이지.”
싸이클롭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헉스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헉스가 영주를 들먹이며 자신에게 으름장이라도 놓는 듯 행동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사실 다른 영지 같으면 헉스의 말대로 자신은 당장 잡혀가 혼쭐이 나겠지만 이곳은 헤론 영지였다. 헤론 영지에서 만큼은 영주가 아니라 영주 할아비가 와도 아닌 것이다.
십 년 전과는 달리 이번 영주는 르노와르 상단의 자제였고 이곳 헤론 영지에서 가장 힘을 쓰는 곳은 바로 상단들. 집안의 배경을 이용한다면 모르겠지만 단순히 영주라는 이유만으로는 헤론 영지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도 국법까지 운운하는 것이 싸이클롭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아무튼 약속해 주시오. 이것은 모두가 평화롭게 살기 위한 영주님의 뜻이오.”
헉스는 애초부터 싸이클롭이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그저 구두로라도 약속을 받는다면 일단은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최소한 카라스에게 할 말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곳을 다 접수하면 르노와르 상단에도 어느 정도 인사를 할 생각이니까 그만들 물러가라. 아직은 떼 줄 떡고물도 없으니까.”
헉스의 요구를 싸이클롭은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르노와르 상단의 아들이 영주가 되었고 그러한 영주의 직속 조직인 경비대이니 만큼 르노와르 상단의 얼굴을 봐서 어느 정도의 대우를 해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대우의 내용은 애꾸 파의 수입 중 일정 부분을 경비대의 자금으로 지원하는 그런 형태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싸이클롭도 입을 딱 씻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지금은 시장통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 아니기에 그때까지는 자금의 여력이 없을 뿐이었다. 지금 상태에서 르노와르 상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