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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13화)
제6장 살고 싶으면 납작 엎드려 머리를 처박아라(3)
“약속을 해 주기 전에는 갈 수 없소. 그러니 말이라도 약속해 주시오.”
헉스는 싸이클롭의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말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야 카라스를 데리고 돌아갈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어허! 썩 물러가라는데도! 네놈들을 곱게 보내 주는 것도 네놈들의 알량한 영주가 아니라 르노와르 상단의 얼굴을 봐서라는 걸 왜 몰라?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면 네놈들도 요절을 내 버릴 것이야!”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헉스의 태도에 싸이클롭은 짐짓 노한 표정을 짓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이 정도 양보했는데도 자신을 몰아붙인다는 것은 체면을 심하게 손상시키는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본보기 차원에서라도 경비대에게 해코지를 해야 했다. 그것이 애꾸 파를 지금껏 이끌어올 수 있었던 싸이클롭만의 방법이었다.
“두목! 내가 알아서 치울 테니 신경 끄쇼.”
이때 부두목이 앞으로 나서며 헉스의 앞에 섰다.
이제 싸이클롭이 처리해야 할 선은 넘은 것이다. 다음부터는 자신의 몫이었다.
“그래라. 부두목으로서 이럴 때 뭔가 보여 줘야지.”
싸이클롭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뢰가 잔뜩 담긴 눈으로 부두목에게 기회를 주었다.
“걱정 마쇼. 내가 이중에서 몇 놈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 새로온 영주에게도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지 살짝 경고라도 해 볼 참이오. 이거 귀찮아서 원.”
부두목은 험상궂은 얼굴로 눈을 부라리며 경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마치 먹이를 고르는 맹수처럼 부두목의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케 만들었다.
“싸, 싸우자는 것이오?”
헉스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대화로 풀고자 그렇게 노력했건만 결국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다.
“네놈이 싸울 상대나 되냐? 건방진 놈. 오냐오냐 해 줬더니 아주 간이 배밖으로 나왔구나. 네놈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 네놈이 그리도 떠받드는 영주 면상에 던져 주고 올 것이야.”
부두목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싸움도 비슷해야 하는 법. 이것은 싸움이 아니라 응징일 뿐이었다. 부두목은 이참에 새로온 영주에게 거하게 신고식을 치르게 해 줄 요량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내가 직접 왔으니까.”
이때 경비대원들 틈 사이를 헤치며 앳되 보이는 청년 하나가 걸어나왔다.
“네놈은 또 뭐야?”
부두목은 헉스에 이어 정신 못 차리는 경비대원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 영주님! 나서시지 마시라니까요!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헉스는 기겁을 하며 카라스를 막아섰다.
앳되 보이는 청년은 바로 카라스였다.
“약속했지. 네놈들의 일처리가 마음에 들면 나서지 않겠다고. 그런데 영 마음에 안 드는데?”
헉스가 약속을 들먹이자 카라스는 약속의 정확한 내용을 상기시켜 주었다. 자신은 분명 약속을 지킨 것이다.
“네, 네놈이 새로 온 영주냐?”
부두목은 영주가 직접 나서자 잠시 당황했다. 설마 이곳까지 영주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 무엄하다! 어디서 감히 영주님께 무례하게 구느냐?”
헉스는 두렵기는 했지만 부두목을 향해 엄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아무리 두려워도 자신들이 지켜야 할 영주가 앞에 있었기에 꼬리를 내릴 수만은 없는 것이다.
십 년 전의 그 사건은 경비대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자 깊은 한으로 남아 있었고 똑같은 일은 절대로 반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뭐? 무엄? 이곳 헤론 영지가 귀족들의 무덤이라는 것도 잊었느냐? 특히 영주에게는 더더욱 그러하지. 헤론 영지에서 영주 대접을 받으려 하다니 네 아비를 봐서 이번은 용서할 테니 썩 돌아가거라. 자꾸 까분다면 네 아비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야.”
부두목은 헉스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헤론 영지에서 영주 대접을 받으려는 것 자체가 한심한 일. 그깟 영주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곳까지 와서 큰소리란 말인가.
부두목은 기왕 이렇게 된 것 영주에게 겁을 잔뜩 줘 앞으로는 자신들의 행사에 찍소리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부두목은 카라스를 위협하며 심지어는 카라스의 가족까지 들먹이며 협박했다.
“훗! 내가 오길 아무래도 잘한 것 같군. 네놈은 그 한마디로 결정되었다.”
부두목이 자신의 가족들까지 들먹이며 자신을 위협하자 카라스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카라스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터억.
“뭐, 뭐냐?”
카라스의 손이 부두목의 어깨를 붙잡았다.
부두목은 난데없는 행동에 멀뚱하니 카라스를 바라보았다.
휘이이이익.
우드드드득.
부두목이 멀뚱한 표정을 짓는 순간 부두목의 신형이 카라스의 손을 따라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부두목의 왼쪽 어깨부터 손목까지 기이한 각도로 꺽이며 듣기에도 끔찍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끄아아아악!”
이어지는 처절한 비명은 듣기에도 애처로울 만큼 부두복의 고통이 전해졌다.
“허억! 여, 영주님.”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짜고짜 부두목의 팔을 부러뜨려 버리는 카라스의 행동에 헉스는 기겁을 했다.
설마 이렇게 무턱대고 폭력을 행사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멜의 이야기로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점잖음은 물론 유머까지 갖춘 마음 여린 도련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보여 주는 폭력성과 잔인함은 애꾸 파조차도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런!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영주님을 보호하라!”
헉스는 경비대로 하여금 카라스를 호위하도록 명령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애꾸 파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네, 네놈이… 죽으려고…….”
부두목은 부러진 팔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카라스를 노려보며 뭔가 또 다른 위협을 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그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우지끈.
부두목이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카라스의 발은 바닥에 쓰려져 있는 부두목의 왼쪽 무릎을 그대로 밟아 비틀어 버렸다.
뼈가 부러지며 바닥에 쓸려 가루가 되는 끔찍한 소리는 경비대는 물론 싸이클롭마저 질겁하게 만들었다.
“끄아아아악!”
그 뒤를 따르는 부두목의 절규는 장차 이곳에서 벌어질 카라스와 애꾸 파의 일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이냐?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두목 싸이클롭은 난데없는 카라스의 행동에 질겁했다.
부두목이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팔다리가 부러진 채 바닥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 영주님! 이, 이분은 영주님이시다! 감히 불량배 주제에 어느 안전에서 막말인가!”
놀라기로는 싸이클롭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헉스는 황당하면서도 놀란 눈으로 카라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라스가 이렇게 막 나가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악랄했던 애꾸 파의 부두목을 이렇게도 쉽게 제압하는 모습에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는지 평소라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을 싸이클롭에게 언성을 높이며 나무랄 수 있었다.
“뭐라? 헉스 네놈이 간이 부었구나. 영주 앞이라고 기고만장하는구나!”
카라스에 이어 헉스마저 자신을 무시하자 싸이클롭은 불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래도 오늘은 송장 여럿 치우는 날이 될 공산이 컸다.
“더 이상 영주님을 노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용서를 빌거라! 우리는 영주님의 명을 받아 이곳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다!”
한 번 자신감을 얻어서인지 헉스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헉스는 싸이클롭을 향해 오히려 으름장을 놓으며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뒤에 서 있던 경비대 역시 헉스와 다르지 않았다. 두렵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당당해졌다.
“이, 이 죽일 놈이… 크락슨! 아무래도 저 애송이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줘야 할 것 같네.”
카라스와 경비대가 똘똘 뭉쳐 기세등등해지자 싸이클롭은 크락슨을 앞세웠다.
제아무리 숫자에서 유리하다고 해도 크락슨은 이들과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괜찮겠소? 상대는 영주인데.”
크락슨은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은 시장통에 자리잡은 조직들을 상대하기 위해 온 것이지 영주와 직접 부딪치는 것은 아무래도 꺼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하멜과 경비대를 손봐 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 같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헤론 영지의 영주가 어디 영주인가? 십 년 전에도 저놈처럼 주제 모르고 설치다가 비명횡사한 자가 있었지.”
싸이클롭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있었기에 더 이상 앞뒤를 재고 말고 할 여유도 없었다. 어차피 십 년 전에도 있었던 일이라면 지금 또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 영주는 르노와르 상단의 자제라던데… 뒷감당을 할 수 있겠소?”
하지만 크락슨은 여전히 꺼림칙했다. 그저 외지에서 부임해 온 영주라면 몰라도 카라스는 이곳 헤론 영지에서 제법 큰 상단의 아들이었고 조용히 끝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뒷감당? 그건…….”
싸이클롭도 막상 카라스를 르노와르 상단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니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영주는 겁나지 않아도 르노와르 상단이라면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오.”
크락슨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의 해결 방안을 찾은 모양이었다.
“무슨 방법이 있는가? 말해 보게. 저 건방진 어린 놈에게 본때를 보여 줄 수 있다면야.”
크락슨에게 뭔가 묘수가 있는 듯하자 싸이클롭은 반색을 하며 재촉했다. 이대로 자존심을 구긴채 물러서기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겠소?”
크락슨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냈다.
“설마 영주와 저놈들 모두를?”
싸이클롭은 뜨끔한 표정이 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일을 벌이자니 은근히 겁이 난 것이다.
“그것뿐이오.”
“자신 있는가?”
싸이클롭은 크락슨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크락슨의 능력은 이미 알기에 그가 자신 있다면 모험을 걸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만 해 주시오.”
“그것은 걱정하지 말게. 이미 밖에 아이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니. 한 놈도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야.”
싸이클롭은 크락슨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이미 상가 번영회 밖은 자신의 수하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크락슨이 패하지만 않는다면 이들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물러서시오.”
크락슨은 싸이클롭을 뒤로 물리고는 한바탕 싸울 자세를 취했다.
“이, 이놈! 설마 우리를 모두 죽여 입막음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이분은 영주님이시다!”
크락슨이 정말 싸울 결심을 하자 헉스는 더럭 겁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크락슨의 실력은 이미 이곳에서 정평이 나 있었고 크락슨 단 한 명에게 하멜은 물론 경비대 1조 대원들 모두가 곤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단순히 싸우는 것도 아니고 죽여서 입을 막으려 하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영주 자리는 또다시 공석이 될 듯하구나.”
크락슨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걸렸다. 그것은 확실히 이곳에서 끝장을 보겠다는 뜻이었다.
“이, 이런 무엄한! 영주님, 이자가 바로 하멜 조장과 1조 대원들을 그렇게 만든 자입니다! 이자는 위험한 자입니다! 저희가 시간을 벌 테니 어서 빠져나가십시오!”
헉스는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어떻게든 카라스만은 이곳에서 빠져나가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경비대원들의 목숨을 거는 것이라 해도 해야만 했다.
“빠져나가면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냐?”
도망갈 줄 알았는데 마지막까지 자신을 보호하려는 모습에 카라스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건…….”
“당하지도 못하면서 뭘 그리 나서?”
카라스는 헉스에게 귀찮은 듯 손짓을 하며 물러서게 했다.
“우리는 경비대가 아닙니까? 또다시 영주님을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싫고요.”
하지만 헉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들은 영주 직속의 경비대였고 영주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지난 십 년 간 영주를 지키지 못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수모를 당해 왔지만 이제는 그것을 만회할 기회가 온 것이다. 헉스는 두려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가도 이놈들이 너희들을 살려 둘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서 부탁이…….”
헉스는 마음의 결심을 굳히고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부탁? 말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