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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14화)
제6장 살고 싶으면 납작 엎드려 머리를 처박아라(4)


“만일 저희가 잘못된다면… 저희 가족이라도 어떻게… 르노와르 상단에서 잘 좀 보살펴 주십시오.”
헉스는 경비대의 가족들을 부탁했다.
카라스 집안의 재력이라면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들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가족들의 안정이 보장된다면 못할 것은 없었다. 이러저리 채이며 비참한 생활을 이어 가느니 그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가족을 책임져 달라?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
카라스는 쉽게 받아들였다.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것이야 카라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저, 정말입니까? 모두 들었지? 우리 오늘 여기서 그냥 죽자!”
카라스가 승낙하자 헉스는 더욱 용기를 냈다.
명예도 되찾고 가족들의 삶까지 보장되는 길이 열렸는데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헉스는 비장한 목소리로 경비대를 향해 외쳤다.
“까짓것 죽읍시다! 가족들이야 이제 안심이고 그동안 깡패 놈들에게 굽신대던 것도 아주 죽을 맛이었는데 속이 다 후련하네!”
“영주님. 저희들이 반드시 길을 뚫어 드리겠습니다. 약속은 꼭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경비대의 명예도…….”
헉스의 외침에 티르와 나머지 경비대원들도 한목소리가 되어 각오를 다졌다.
남자는 구차하게 연명하는 것보다는 죽을 자리를 잘 찾아야 하는 법. 이들은 처음으로 경비대로서의 이름에 걸맞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죽음마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 다 해 줄 수는 있는데 싫다.”
하지만 이들의 북돋았던 사기를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들의 요구를 거절해 버린 것이다.
“예, 그럼… 예?”
충천된 사기로 크락슨에게 달려들려던 경비대원들은 순간 멍한 표정으로 카라스를 바라보았다.
“니들은 아직 부려먹을 일이 많아서. 지금 잃기에는 조금 아깝거든. 저놈이 문제라면 그냥 구경이나 해라. 내가 개인적으로 저놈에게 볼일이 좀 있거든.”
자신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경비대원들에게 또다시 손을 휙휙 내저으며 카라스는 크락슨과의 개인적인 용무를 보기로 했다.
영주고 경비대고를 떠나서 카라스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니가 새로 왔다는 용병이냐?”
카라스는 삐딱한 시선으로 크락슨을 바라보며 물었다.
카라스의 얼굴은 무척 불량스러워 보였다. 사실 카라스의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전생에서는 어린 시절 이후로 단 한 번도 웃어 본 일이 없었고 싸운 상대는 누구든 가차없이 죽여왔다.
한마디로 수십 년간을 자신의 마음대로 하며 자비라고는 모르는 인물이었으니 이렇게 화가 날 때면 절로 전생에서의 성격이 나와 버리는 것이다.
“네놈이 정말 새로 왔다는 영주인가? 하는 짓만 본다면 전혀 아닌 것 같은데?”
크락슨은 카라스의 물음에 잔뜩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 크락슨의 눈에는 카라스의 얼굴이나 느낌이 결코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보여 주었던 잔인함과 싸움 실력은 물론 거칠고 혹독한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야수와도 같은 분위기가 카라스에게서 은연중에 풍겨 나오고 있는 것이다.
찰싹.
크락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크락슨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홱 돌아가 버렸다.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오며 크락슨의 입술이 터져 나갔다. 크락슨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제대로 모른 채 그저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내가 묻고 넌 대답하고. 알아들었지?”
카라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크락슨에게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네, 네놈…….”
자신의 뺨을 후려친 것이 카라스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크락슨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카라스를 바라보았다.
카라스의 손바닥이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동안 자신은 아무런 기척은 물론 그의 움직임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니가 내 친구 팬 놈 맞지?”
카라스의 눈에서는 서서히 살기가 풍겨 나왔다.
카라스는 지금 영주가 아닌 하멜의 친구로서 크락슨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니 친구라니?”
하지만 크락슨은 카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인물이 자신의 친구를 때렸나며 걸고 넘어가는데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친구 이름이 하멜이야. 경비대 1조 조장. 얼마 전에 곤죽을 만들었다며?”
“네놈 친구인지는 모르겠고 경비대라면 내가 손 좀 봐줬지.”
그제야 카라스가 말하는 친구가 누구인지 깨달은 크락슨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손바닥을 털털 털었다. 오랜만에 재미나게 몸을 풀었다는 제스츄어였다.
“오십 년 동안 유일한 내 친구인데 몰랐구나?”
크락슨의 조롱 섞인 행동에 카라스도 살짝 웃었다. 하지만 카라스의 눈빛은 결코 웃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십 년? 이제 성인이 된 걸로 아는데 벌써부터 정신 줄을 놓고 다니는 건가? 하긴 이곳에 올 때부터 알아는 봤다만.”
오십 년이라는 말에 크락슨은 다시 한 번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카라스를 대놓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이제 스무살이 된 것으로 아는데 오십 년을 살았다고 하니 정신 상태가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부족한 것 없이 자라서 영주까지 되었으면 이런 험한 일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찰싹.
그 순간 또다시 크락슨의 고개가 홱하고 돌아가 버렸다.
조금 전에 터진 입술 주위가 완전히 찢기며 터져 나갔다. 어느새 크락슨의 얼굴 반쪽은 사탕 한 봉지라도 물고 있는 듯 땡땡하게 부풀어 올랐고 입술 사이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이놈…….”
이번에는 놀라움보다는 모욕감으로 크락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렇게 따귀를 얻어맞았으니 크락슨의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진 것이다.
“말했잖아. 나는 묻고 너는 대답하고.”
카라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미리 말해 주었던 내용을 또박또박 상기시켜 주었다.
“애송이 놈. 보자보자 하니까 건방이 끝이 없구나. 네놈 아비를 믿고 이리 구는 것이냐? 네 아비만 없다면 네놈이 감히 나댈 수나 있을 것 같으냐?”
크락슨의 눈에서는 살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이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르노와르 상단의 힘을 믿고 나대는 것은 자유였지만 자신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제 부모를 믿고 나대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오는지 크락슨은 똑똑히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영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카라스는 손가락 하나를 쭉 펴고는 좌우로 흔들었다.
“오냐. 오늘은 네놈을 살려 주마. 네 아비가 없을 때도 과연 천방지축으로 나댈 수 있는지 똑똑히 보겠다.”
카라스가 끝까지 자신을 희롱하며 무시하자 크락슨은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라스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렇게 믿는 아버지가 없어졌을때 얼마나 나약하고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인지 절실히 깨닫도록 해 줄 생각이었다.
카라스를 죽이는 것은 그 후에도 상관없는 것이다. 하지만 부두목에 이어 크락슨 역시 해선 안 되는 말을 해 버렸다는 것을 지금은 알지 못했다.
“네놈을 살려 줄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죽여야 할 구실만 만들어 대니 네놈도 참 바쁘게 사는군.”
카라스는 한심한 눈으로 크락슨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살려 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죽여달라고 애원을 하는 모습을 보니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살려는 주겠다만 혼은 나야겠지? 네놈 친구 하멜이라고 했나? 사이좋게 누워 있도록 해 주겠다.”
크락슨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더욱 카라스를 자극했다.
“죽을 놈들은 다 비슷한 것인가. 왜 나와 해결하려 들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지 언제고 날 잡아서 연구라도 해 봐야겠어. 나는 티끌만큼의 위험도 방치할 생각이 없으니 죽여 주도록 하지.”
카라스는 부두목도 그렇고 크락슨도 그렇고 죽여달라며 애원하는 방법이 참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가족과 친구를 내세워 협박하는 자들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절대로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아무리 작은 위험이라도 방치한다면 언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일. 그러한 결과가 생기기 전에 아예 위험원을 없애는 것이 카라스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스르르릉.
크락슨은 검을 뽑아 들었다. 크락슨의 검은 카라스의 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껏 조직들과의 싸움에서는 오직 주먹만을 사용한 것에 비하면 이번 싸움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검을 뽑아 든다고 달라질까?”
카라스는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크락슨을 조롱했다.
“크크큭! 내 손에 검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된다면 그런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크락슨도 기세에서는 지지 않았다.
검을 뽑아 든 순간 크락슨의 자신감은 배가 되었다. 지금껏 불량배들을 상대하느라 검을 뽑을 일이 없었지만 자신의 강함은 바로 검에 있었다. 검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크락슨이었다.
“이봐 애꾸! 잘 보고 그 머릿속에 집어넣도록. 네놈이라도 살고 싶다면 납작 엎드려서 그 대가리를 처박아야 할 것이야.”
카라스는 한쪽에서 잔뜩 긴장한 채 둘을 지켜보고 있던 싸이클롭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것은 사형선고일 수도 있었고 싸이클롭이 살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싸이클롭에게 카라스의 이야기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건방진 놈! 끝까지 건방을 떠는구나. 타핫!”
순간 크락슨의 검이 카라스의 목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그의 검은 순식간에 뻗어 나가 카라스의 목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퍼어어억!
크락슨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카라스의 머리칼을 스치며 지나쳤다.
카라스는 검을 스치듯 흘려보내며 크락슨의 품으로 파고들어서는 크락슨의 옆구리에 힘껏 주먹을 틀어넣었다.
“크으윽!”
크락슨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락슨은 숨이 턱 막혀 왔다. 체중이 실리지 않은 것 같았지만 크락슨이 느끼는 고통은 엄청났다. 마치 해머로 내리친 듯한 통증이 오는 것이 갈비뼈 한두 대는 부러졌음에 틀림없었다.
츄루루루룩.
크락슨의 검이 방향을 바꾸는가 싶더니 분열을 일으켰다. 검날이 휘청대며 마치 뱀처럼 꿈틀댔다. 크락슨의 검끝은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듯 수십 개로 불어나 카라스를 향해 지그재그로 찔러 오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흉흉한 기세를 풍기는 것이 크락슨의 검술 실력이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단순한 불량배들의 솜씨가 절대로 아니었다.
“재미있군. 고작 깡패 놈들 뒤를 봐주는 놈의 검이 이 정도란 말이지?”
카라스는 크락슨이 단순히 시장통의 건달들에게 고용된 그저 그런 용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락슨의 검은 체계가 있었고 검술 또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무 데서나 배울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검이 아니었다.
크락슨은 분명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검술에만 매진해 왔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한 자가 건달들의 뒤를 봐주며 살아 간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후아아아앙!
차아아아앙!
크락슨의 검이 사방에서 카라스를 덮치려는 찰나 카라스의 손에 들린 혈루검이 그 사이를 지나쳤다. 마치 야수가 포효하듯 혈루검이 지나간 뒤에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우당탕탕!
검과 함께 통째로 크락슨의 신형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카라스는 검집 채로 그냥 휘두른 것이었지만 크락슨은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 버린 것이다.
“커허헉! 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크락슨의 검은 두 동강이가 나 버렸고 크락슨은 검을 쥘 힘도 없었다.
아직도 팔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저려 왔다. 크락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이는 결코 갓 스물이 된 부잣집 도련님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르노와르 상단의 아들이 검을 수련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무슨 꿍꿍인가?”
크락슨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쩌면 르노와르 상단에서는 오래전부터 어떤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뿐인 아들의 능력이 이 정도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들 자랑하기라면 대륙에서 제일이라 불리는 하노스 상단주가 이러한 능력을 떠벌리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만일 일부러 감춘 것이라면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뜻이었다. 크락슨은 르노와르 상단주 하노스가 그저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로 아들을 영주로 만든 것만은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기 시작했다.
“꿍꿍이라… 네놈이야말로 꿍꿍이가 있는 것 같군. 누구 밑에 있는 놈이냐?”
하지만 카라스의 생각은 달랐다. 크락슨의 이야기를 통해 오히려 크락슨이 무언가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크락슨이 곧바로 음모를 떠올렸다면 그 스스로가 음모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키클롭스 파에서 고용한 용병일 뿐이다.”
카라스가 뭔가를 눈치챈 것 같자 크락슨은 얼굴색을 바꾸고는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그래? 뭐 차차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