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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15화)
제6장 살고 싶으면 납작 엎드려 머리를 처박아라(5)


“내 입에서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나?”
크락슨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어렸다. 어떠한 고문에도 지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네놈의 입에서 들을 생각은 없다. 네놈은 지금 죽을 테니까.”
하지만 카라스는 크락슨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크락슨은 이미 죽어야 할 목숨이었고 어떠한 이유로도 그것이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멈칫.
무언가 눈치를 챘음에도 자신을 심문하지 않고 죽이겠다는 말에 크락슨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싸이클롭. 싸이클롭이라면 최소한 비밀의 실마리 정도까지는 접근할 수 있었다. 만일 싸이클롭을 통해 자신과의 연결 고리를 캐내려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쐐애애애액!
크락슨은 두 동강 난 검을 집어들고는 싸이클롭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싸이클롭의 숨통을 끊어 입을 봉할 심산이었다.
“허억! 무, 무슨 짓이냐?”
싸이클롭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크락슨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곧 벽에 가로막혔다.
쉬이이이이익!
“커허헉!”
하지만 크락슨의 검은 싸이클롭에게 닿지 못했다.
이미 피보다 붉은빛을 뿌리며 크락슨의 몸을 지나쳐 간 섬광이 먼저였다. 혈루검은 크락슨의 피를 흠뻑 머금은 채 붉은 광채를 뽐내고 있었다.
데구르르르.
크락슨의 목이 떨어져 바닥을 굴러가더니 싸이클롭의 발 앞에 멈췄다. 크락슨의 부릅떠진 눈동자와 싸이클롭의 눈이 마주쳤다.
부들부들.
싸이클롭은 이 같은 광경에 잔뜩 겁에 질려서는 전신을 떨고 있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이 마치 십 년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푸우우욱.
싸이클롭이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사이 혈루검이 향한 곳은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대고 있던 부두목의 심장이었다. 카라스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부두목의 심장에 혈루검을 꽂아 넣었다.
“허어억! 사, 살려…….”
싸이클롭은 너무도 잔인한 광경에 사지를 벌벌 떨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목소리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입조차 제대로 벌릴 수 없을 만큼 싸이클롭은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까 말했을 텐데? 살고 싶으면…….”
카라스는 조금 전에 싸이클롭에게 했던 경기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그제야 싸이클롭은 카라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그대로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쿵쿵쿵!
싸이클롭은 털썩 무릎을 꿇더니 바닥에 머리를 처박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는 카라스가 경고했던 대로 납작 엎드려서 고개를 처박아야만 했던 것이다.
“살려 주십시오, 나리! 소인이 잠시 정신이 나가 죽을 죄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싸이클롭은 납작 엎드려서는 카라스에게 빌고 또 빌었다.
눈앞에서 부두목과 크락슨이 너무도 끔찍하게 죽어 버렸으니 싸이클롭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싸이클롭의 눈에는 카라스가 그 어떤 악마보다 무서운 대상인 것이다.
“여, 영주님!”
“이게 대체…….”
놀라기는 경비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락슨과의 싸움이 예견되는 순간 경비대는 목숨을 걸 각오였다.
르노와르 상단에서 곱게 자란 카라스를 무사히 도망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카라스가 보여 준 실력은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더욱이 잔인해 보이기까지 한 그 냉정함은 경비대의 놀라움까지도 압도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한 말 기억하나?”
“무슨…….”
“이곳에서의 일이 외부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경비대의 일은 경비대만의 일로 끝나야 한다.”
카라스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당부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비밀 엄수.
경비대는 자신의 직속이니 만큼 자신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비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카라스는 이곳에서의 일이 밖으로 새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부잣집 도련님이자 아무런 야망 없는 영주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영주님.”
“영주님께 충성을!”
경비대원들은 저도 모르게 군기가 바짝 들어서는 카라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카라스에게 압도되어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
“애꾸!”
카라스의 차가운 눈빛이 싸이클롭을 향했다.
“예에엡! 충성!”
싸이클롭은 카라스의 부름을 받자 우뢰와도 같은 목소리로 크게 충성을 외쳤다. 누가 보면 싸이클롭도 경비대의 일원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네가 고용한 용병이 반란을 일으켰고 부두목이라는 이놈과 싸우는 도중에 네가 벤 것이다. 이해했나?”
카라스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부두목과 용병 크락슨의 사망 사건은 경비대의 개입 없이 자체적으로 벌어진 일인 것이다. 카라스는 마치 정말 사실이 그러한 것처럼 너무도 태연스레 이야기하고는 싸이클롭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 제가요?”
싸이클롭은 멍하니 카라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그저 구석에서 벌벌 떤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는데 모든 것이 자신이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찌릿.
쿵쿵쿵!
싸이클롭이 의문을 표하자 카라스의 날카로운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싸이클롭은 자동으로 납작 엎드리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기 시작했다. 이제는 카라스의 눈빛이 조금만 차가워져도 조건반사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해했나?”
“이, 이해했습니다요! 크락슨 이놈이 부두목을 베었고 제가 그 틈을 타 크락슨의 목을 베었습니다요!”
싸이클롭은 그제서야 카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된 양 떠벌리기 시작했다.
“좋아. 그것이 이 사건의 진실이다. 만일 다른 말이 새어 나갔을 경우에는…….”
카라스는 다시 한 번 이번 사건에 있어서의 비밀 엄수를 강조했다.
카라스의 눈빛에는 순간적으로 엄청난 살기가 번뜩였고 싸이클롭은 간이 오그라들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요! 한 번만 믿어 주십시요! 영주 나리님!”
싸이클롭은 카라스의 눈빛에 질겁을 하고는 두 손을 싹싹 빌며 자신의 충성을 호소했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카라스에게는 딴 마음을 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네놈을 믿을 수야 없지. 잠시 네 목은 맡겨 두마. 엉뚱한 소리가 들리는 날 그 목을 거두어 갈 것이다.”
제아무리 설설 기며 굽신거려도 싸이클롭을 믿을 만큼 카라스가 어리석지는 않았다. 카라스는 싸이클롭과 같은 자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절대적인 공포를 심어 준다면 충복만큼이나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할 것이다.
“목숨으로 비밀을 지키겠습니다요!”
어찌 되었든 자신의 목은 온전히 붙어 있게 되자 싸이클롭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리의 힘이 쭈욱 풀려 버렸다.
챙. 채채챙.
이때 상가 번영회 바깥에서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고함 소리가 들리며 소란스러워졌다.
“영주님을 구해야 한다! 사정을 봐 줄 필요는 없다! 막는 자는 다 베어라!”
“비켜라, 이놈들!”
“영주님! 카라스!”
애꾸 파의 조직원들과 경비대원들이 싸우는 모양이었다. 그중에서는 하멜의 목소리도 들렸다. 걷기도 힘들 텐데 카라스가 걱정되어 달려온 모양이었다.
“영주님, 하멜 조장과 경비대원들이 왔습니다!”
“하멜이? 오늘 모일 수 있는 대원들은 이게 전부라고 하지 않았었나?”
카라스는 어이없다는 듯 헉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집합 명령에도 못 오던 자들이 느닷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영주님을 구하기 위해 하멜 조장이 모두 이끌고 온 것 같습니다.”
“훗! 역시 친구밖에 없군. 애꾸!”
과연 친구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 흐뭇해진 카라스는 싸이클롭을 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예에엡! 영주 나리님!”
싸이클롭은 부동자세를 취하며 카라스의 앞에 석상처럼 섰다.
“경비대원들에게 조금이라도 상처가 난다면 네놈들 모두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가서 중지시키도록!”
“예에에엡!”
쌔애애앵.
카라스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싸이클롭은 바람처럼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 이놈들! 모두 동작 그마아안! 무기를 버려라! 어서!”
싸이클롭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자신의 수하들의 뒷덜미를 부여잡은 채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칫 경비대원들의 몸에 생채기라도 나는 날에는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다 죽어 가는 부두목의 심장에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꽂아 넣는 위인에게 인정이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싸이클롭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두, 두목!”
경비대를 패대기치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자신들을 밀치며 나무라는 싸이클롭의 모습에 애꾸 파의 조직원들은 영문을 모른 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따아아아악!
“크으윽!”
싸이클롭은 자신의 명에도 멍하니 있는 조직원의 뒷통수를 있는 힘껏 냅다 후려쳤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어서 항복해라! 어서!”
챙그랑!
후두두둑!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거듭 싸이클롭이 명령하자 애꾸 파의 조직원들은 영문을 모른채 바닥에 무기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두, 두목이 왜 저래?”
“벌써 미쳤나?”
애꾸 파 조직원들은 저마다 서로를 쳐다보며 싸이클롭의 상태에 대해서 수군거렸다.
“영주님은 어디 계시냐? 영주님께 변이라도 생겼다면 결코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때 하멜이 앞으로 나서며 싸이클롭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자신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온 카라스에게 일이 생긴다면 하멜은 목숨을 걸고 싸이클롭과 싸울 생각이었다.
“이놈아! 변은 무슨! 하이구 내 참.”
하지만 듣는 싸이클롭의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그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싸이클롭이었다.
“여어 하멜! 아직 움직이면 안 될 텐데? 이거 치료해 준 보람이 없군.”
싸이클롭과 하멜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카라스가 웃으며 여유 있게 등장했다.
“카라스! 아니, 영주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늦지 않아서.”
하멜은 카라스가 무사히 나오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자신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애꾸 파로 무모하게 쳐들어간 카라스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하멜은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몰랐다.
“후후. 다행히 이야기가 잘 끝나서 이렇게 무사하다. 다른 대원들은 바쁘다더니 다들 모였네?”
카라스는 자신의 명에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경비대원들이 모두 모여 있자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경비대원들은 지은 죄가 있었기에 고개를 푹 떨구었다.
“벌은 무슨? 이렇게 와 주니 나야 수고를 덜어서 편하지. 사실 오늘 모두 갈 곳이 있거든.”
카라스는 자신의 명을 듣지 않았어도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뻔히 안 되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자신을 구하러 와 준 것만으로도 카라스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카라스는 처음 경비대를 집합시키려 했던 목적을 비로소 달성할 수 있게 되자 한층 기분이 좋아졌다.
“갈 곳이라니요?”
“이봐, 카라스! 아니, 영주님! 또 어딜 가시려고? 애꾸 파로는 부족해요? 나 아직 환자란 말입니다.”
하멜을 비롯해 경비대는 은근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애꾸 파를 굴복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시장통의 조직이란 조직은 죄다 들쑤시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하멜은 앓는 소리를 하며 다시금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보니까 멀쩡하네 뭘. 자, 오늘은 우리 집에서 거하게 파티를 벌일 모양이니까 모두 함께 간다. 사실 집합시킨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거든.”
카라스는 경비대를 집합시킨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로 영주 취임 축하 파티에 초대하기 위함이었다.
“파, 파티?”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하멜과 경비대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음. 아버님이 경비대 모두 초대하셨거든. 너도 알잖아?”
“아, 알지요. 영주님 아버지라면 경비대뿐이겠습니까? 헤론 영지 사람들 모두 초대 안 하신 게 다행이지요.”
하노스 상단주를 떠올리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하멜이었다. 하노스 상단주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그런 거였어?”
“난 또 군기라도 잡으려는 줄…….”
헉스와 티르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직들과 거하게 한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라고 부른 것이라면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내팽개치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새로 영주로 부임한 것도 축하할 겸 오늘은 거하게 먹고 마신다! 모두 우리 집으로 출발!”
“와아아아! 실컷 마시자!”
경비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급반전되며 저마다 함성을 질렀다.
이제야 자신들이 진짜 경비대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경비대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역시 영주의 존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영주 나리니이이임! 살펴 가십시요오오오! 충성! 충성! 이놈들아! 너희들은 인사 안 드려? 충성! 충성!”
카라스와 경비대가 시끌벅적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키클롭스 파의 두목 싸이클롭은 목청을 돋우며 카라스에게 인사를 올렸다.
“추, 충성!”
“목소리가 작다! 얼른!”
“추우웅 서어엉!”
애꾸 파의 조직원들을 닦달해 가며 싸이클롭은 카라스의 영원한 종복이 되기를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