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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19화)
제8장 하노스의 전폭적인 지원(2)
“손님이라니, 누구?”
손님이라는 말에 카라스는 잠시 의아했다.
어려서부터 아들 자랑은 잘하고 다녔지만 집에 누군가를 데려오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노스에게 있어 집이란 가족들만의 소중한 공간이었고 상단과 관련해서는 절대로 집에까지 연관 짓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저도 몰라요. 처음 본 분인데 나리하고는 제법 가까운 분 같아요. 그러니 서두르세요.”
“알았어. 그건 그렇고 리아! 저번에 이야기한 것 있잖아? 상단에서 일하는 건 어때? 어머님 아버님께서도 전부터 이야기하신 것이지만 리아가 굳이 집안일을 계속 할 필요도 없는데.”
카라스는 일단 집에 가 보면 알 일이었기에 우선은 궁금증을 참기로 했다. 그보다 리아에 대한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리아가 하녀 신분이기는 해도 집안 누구도 리아를 하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리아가 처음 집에 들어온 것은 갓난아기 때였다. 십오 년 전 누군가 집앞에 아기를 놓아두었다며 하노스가 들어오는 길에 데리고 온 것이다.
카라스의 어머니는 아기가 너무 귀여워 카라스의 동생으로 삼고자 했지만 아버지인 하노스의 반대로 철이 들 때까지 키워 주기로만 한 것이다.
리아는 티없이 자랐고 누구보다 명랑했다. 커 가면서 카라스의 이것저것을 챙겨 주다 보니 어느새 하녀처럼 되었지만 그것은 리아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고 카라스의 가족은 물론 집안의 식솔들까지도 리아를 하녀로 대하지는 않았다.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인걸요? 저는 지금처럼 도련님 식사며 입을 옷이며 다 챙겨드릴 거예요. 제가 아니면 꾀죄죄하게 돌아다니실 거면서. 설마 귀찮으세요?”
리아는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은 카라스를 챙겨주는 일이 가장 즐거웠기 때문이다.
“아, 아니, 귀찮긴. 리아가 귀찮을까 봐 그러지.”
“나는 한 개도 안 귀찮으니까 신경 끄세요. 그리고 말씀이 나오셔서 하는 말인데…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긴 해요.”
리아는 잠시 망설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뭔가를 부탁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 말해 봐. 내가 다 들어줄께.”
카라스는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리아만 원한다면 못해 줄 것은 없었다.
“정말요?”
“그럼, 누가 하고 싶은 일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그건 나중에 얘기해요. 나리께 이미 말씀드렸으니까.”
“알았어. 아무튼 리아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니까 뭐든지 지원해 줄께.”
카라스는 드디어 리아가 자신의 일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동안 하녀처럼 일만 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히히. 약속!”
“훗. 약속!”
리아가 손가락을 내밀자 카라스도 웃으며 손가락을 걸어 주었다. 이로써 카라스는 장차 물릴 수도 없는 약속을 하고 만 것이다.
***
“나리이이! 도련님 오셨어요오오!”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리아는 부리나케 달려들어 가며 카라스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 다녔다.
“여어, 우리 자랑스러운 영주님 오셨구나.”
리아 덕분에 하노스는 곧장 카라스를 마중 나오며 양손을 활짝 펼쳤다.
와락.
“많이 기다리셨죠?”
하노스의 품에 안겨 카라스는 수줍게 인사를 했다.
“아니다. 하루인들 어떠하고 이틀이면 어떠하리. 우리 아들이라면 십 년도 기다릴 수 있지. 아암.”
“저도요. 아버님.”
카라스는 절로 애교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버지인 하노스와 있으면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절로 어린아이처럼 되어 버리는 카라스였다.
“식탁으로 가자꾸나. 네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니까.”
“누군데요?”
“가 보면 안다. 네게 도움이 많이 될 게야.”
“네.”
카라스는 과연 누구일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지금껏 집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버지 하노스와 절친했던 몇몇 인물이 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아도 같이 오려무나. 네 일도 상의해야지.”
“네, 나리. 히히.”
리아는 입이 귀까지 걸려서는 촐랑촐랑 하노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둘 사이에 뭔가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지 리아의 눈빛은 초롱초롱한 게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영주님을 뵙겠습니다. 저는 르노와르 상단에서 창고를 담당하고 있는 셀이라고 합니다.”
카라스가 들어서자 낯선 인물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는 카라스로서는 처음 본 인물로 르노와르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카라스도 마주 인사를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왜 상단의 인물을 자신에게 소개해 주는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창고를 담당하는 인물이라면 자신에게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영주님.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거라. 내 아들이기에 앞서 영주가 아니냐? 앞으로 같이 일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할 게야.”
“같이 일을 하다뇨?”
카라스는 갸웃했다. 상단의 직원을 소개해 준 것도 사실 의아했는데 자신과 함께 일을 한다는 말에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네가 비록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영주이기는 하지만 네 수하들이라고는 경비대가 전부 아니냐? 그들이야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 본업이니 아무래도 행정에는 취약하지 않겠느냐?”
하노스는 현재 카라스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사실 행정적인 경험이 전무한 카라스가 영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마침 그 때문에 아버님께 상의할 일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저도 그게 고민이거든요. 그런데 당장 세금 문제부터 막막하네요.”
카라스도 막힌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하노스의 도움이라면 당분간 업무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창고 담당 셀을 데리고 온 게야. 셀이라면 네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노스는 셀을 다시 한 번 소개하며 카라스에게 추천해 주었다.
“그런데 아버님. 르노와르 상단처럼 큰 규모의 창고를 관리하려면 물론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영지 살림하고는 성격이 다른데 가능할까요?”
카라스는 왠지 미심쩍었다.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도 상단의 일과 영지의 일은 성격 자체가 다른데 과연 셀이라는 인물이 잘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다를 게 뭐가 있느냐?”
하노스는 왜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그게 아니라… 당장 세금 문제만 해도 언제 어떻게 거둬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거둔 세금을 어떻게 위로 보내야 하는지도 깜깜하거든요. 그밖에도 영주로서 기본 업무를 하긴 해야 하는데…….”
카라스는 기껏 아버지가 도움을 주는데 이것저것 따지고 들기는 싫었지만 당장 급한 일이었기에 이런저런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셀에 대해서는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푸하하하! 아들!”
이때 아버지 하노스의 큰웃음이 터져 나왔다. 혹시나 서운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하노스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했다.
“예, 아버님.”
“내가 누구냐?”
“제 하나뿐인 훌륭한 아버님이시지요.”
카라스는 눈치를 살짝 보며 말했다.
“그럼 고민할 게 있느냐?”
“예?”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영주를 아들로 둔 마찬가지로 훌륭한 아비가 있지 않느냐? 내가 그래서 셀을 데려왔다니까. 푸하하하!”
하노스는 다시 한 번 크게 웃어 젖히고는 셀을 가리켰다. 헤론의 위대한 영주 카라스를 보좌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이 바로 셀이라는 뜻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카라스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저렇게나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데 더 이상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카라스는 그저 끙끙 앓으며 어찌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셀! 자네가 우리 상단에 오기 전에 어디에 있었다고 했지?”
하노스는 카라스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아는 듯 셀에게 과거사 전력에 대해서 물었다.
“예. 제가 르노와르 상단에 들어온 것이 십오 년 전이니까… 그때까지는 돌아가신 영주님의 총관으로 있었습니다.”
셀은 르노와르 상단으로 오기전 자신이 있던 곳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했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헉! 저, 정말인가요? 십오 년 전의 총관이라면… 이름이 러셀이라고…….”
카라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찾고 있던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비슷하기는 해도 이름이 다른 것이다.
“제 본명은 러셀입니다. 르노와르 상단에 들어오면서 이름을 조금 바꿨지요. 아무래도 불길해서…….”
셀의 본명이 바로 러셀인 것이다. 러셀은 르노와르 상단으로 온 것과 이름을 바꾼 것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대략적인 테두리만 언급했다. 뭔가 내키지 않는 부분이 있어 보였다.
“아버님. 이 말이 사실인가요?”
카라스는 하노스를 바라보았다.
어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인물을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데려온 것인지 카라스는 놀랍기만 했다.
“당연하지. 내가 그래서 이 친구를 거둔 것인데. 장차 네가 영지를 이끌어 가려면 실질적인 관료가 필요할 것 아니냐? 이 아비가 미리 다 준비해 두었느니라. 어떠냐? 도움이 좀 되겠느냐?”
하노스는 무척이나 뿌듯한 얼굴로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다. 하노스는 이미 십오 년 전부터 카라스를 영주로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을 착수했던 것이다.
“그럼요. 도움이 되고 말고요. 역시 아버님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시고 멋지신 제 아버님이신걸요? 헤헤.”
그제야 카라스는 집으로 장소를 바꾼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자신의 아버지였다. 말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카라스는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카라스의 귀여운 척하는 모습이 절로 튀어나오며 카라스는 한껏 재롱을 부렸다.
“푸하하하하! 아드으으을!”
“아버니이이임!”
와락.
하노스는 하노스대로 카라스는 카라스대로 서로에게 감격하며 부자간의 뜨거운 포옹이 뒤를 따랐다.
“커험. 그런데 영주님. 드릴 말씀이…….”
제삼자는 도무지 끼어들 틈조차 없이 죽이 잘 맞는 부자지간을 바라보며 러셀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자지간에 너무도 기뻐하는지라 차마 말을 꺼내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말은 해야 했다.
러셀은 르노와르 상단을 떠나 영주의 총관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왠지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말해 보세요.”
“저는 사실 불안합니다. 제가 르노와르 상단에 들어오면서 이름을 바꾼 것도 그런 이유 때문에…….”
러셀은 무척이나 불안한 기색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기도 한 것이 카라스의 일을 돕는 것이 별로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러셀의 얼굴에는 한층 그늘이 짙어졌다.
“불안하다니요? 뭐가요?”
카라스로서는 러셀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혹사시킬 일도 없었다. 그저 형식적인 업무만 처리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헤론 영지에서 어느 놈이 감히 내 아들을 위협해? 내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것이야. 자네는 아무 걱정할 것 없으니 내 아들을 잘 보좌하면 되는 것이니 그리 알게.”
이때 하노스가 나서서 러셀의 어깨를 탕탕치며 호기 있게 이야기했다. 러셀이 십오 년 전 영주가 살해당한 일을 마음에 두는 것이라면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라 장담하는 하노스였다.
사실 르노와르 상단과 원수가 될 것이 아니라면 헤론 영지에 누가 있어 카라스를 적대할 것인가. 이는 르노와르 상단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었다.
과거에 영주가 살해당한 일이 러셀 총관에게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그전에도 몇몇의 영주가 이미 그런 일을 당했었고 헤론 영지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십오 년간 영주 자리가 공석이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영주가 왔고 그 영주는 다름 아닌 르노와르 상단의 아들이었다. 헤론 영지에서 르노와르 상단의 위치는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러셀 총관의 걱정은 단순히 기우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예, 상단주님.”
러셀도 르노와르 상단의 힘을 익히 알기에 그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노스가 버티고 있는 이상 카라스에게 해를 가할 존재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평소 아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하노스라는 건 헤론 영지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르노와르 상단을 무너뜨리기 전에 카라스를 먼저 공격하는 짓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러셀 총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사무실에 가서 합시다. 아무튼 환영합니다.”
카라스는 뭔가 자신이 모르는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궁금했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이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 봤자 아버지 하노스의 걱정만 끼치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하노스가 그랬듯이 카라스 역시 집에서는 항상 좋은 일만 행복한 분위기만 조성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험한 일, 힘든 일은 모두 밖에서 처리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