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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20화)
제8장 하노스의 전폭적인 지원(3)
“감사합니다, 영주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러셀 총관은 하노스와 카라스의 설득에 결국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아버님, 리아 말인데요? 아까 얼핏 이야기하기로는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던데… 아버님께서 정하신 일이라도 있으세요?”
“사실 리아가 집안일을 하고는 있지만 어릴 때부터 너와 같이 키워 왔으니 너한테는 동생이고 우리에게는 딸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하노스는 말하면서 슬며시 카라스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어떤 대답을 유도하는 것처럼.
“그렇지요. 저도 리아를 남이라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카라스는 순순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리아의 위치는 이미 집안에서는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리아가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그동안 집안 허드렛일을 계속하기는 했다만 나는 상단의 지부 하나를 맡길 참이었거든.”
하노스는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오자 손뼉을 치며 카라스의 이야기에 동의했다. 그러면서 리아에 대한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카라스는 영주가 되어 영지를 다스려야 하니 상단을 리아에게 맡길 생각인 것이다.
밝은 성격하며 총명한 머리와 꼼꼼한 성격, 무엇보다 카라스를 끔찍하게 위하는 것을 본다면 충분히 잘해내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지부장부터 시작한다면 나중에 르노와르 상단의 본단을 맡기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상단 지부를요? 좋은 생각이시네요. 리아처럼 꼼꼼한 성격이라면 잘할 거예요.”
카라스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리아 성격이라면 계산을 잘못한다거나 어리바리한 실수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휴우우, 그런데 싫다는구나.”
하노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세상이 꺼질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 좋은데 본인이 싫다고 하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싫다니요? 그럼…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는데요?”
카라스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는 했는데 지부장 말고 더 좋은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처럼 네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 주고 싶다는구나. 그런데 네가 영주가 되어 집에 있는 시간이 아무래도 줄어들지 않았느냐?”
“영주로서의 업무를 어느 정도라도 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아직은 처음이라 모르는 것도 많구요.”
카라스도 서운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러셀 총관이 도와준다면 더욱 바빠질 테고 아무래도 집에 머무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리아가 상단 일을 맡지 않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카라스는 어떻게든 리아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해서 말인데… 네가 리아를 데려가야겠구나.”
하노스는 잠시 고민에 잠기는 듯하더니 카라스에게 제안(?)을 했다. 상단도 싫고 집에 있기도 싫다는 리아가 갈 곳은 딱 한 군데였다. 바로 카라스의 곁.
“제, 제가요? 어디로요?”
카라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당황했다.
“이제 영주 관할 본부가 완공되면 너도 그곳에 머무는 일이 많을 텐데 리아가 곁에 있어야지. 해서 네가 직함 하나 만들어 주거라.”
하노스는 저택 앞에 짓고 있는 본부 건물에 리아의 자리를 하나 만들어 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공식적으로.
“지, 직함이라면… 어떤 걸로…….”
카라스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은 일부를 경비대의 사무실로 쓰겠지만 장차 영지 전반의 살림을 꾸려 가자면 다른 인력들도 채용해야 했다.
그런데 리아를 어느 곳에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거니와 리아가 과연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뭐 비서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느냐?”
하노스가 슬쩍 운을 떼었다.
“비, 비서요?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경비대도 늘리고 행정 관료들도 따로이 뽑을 예정인데… 이제 총관은 있으니 그 외에…….”
카라스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비서를 둘 일이 뭐가 있겠는가. 행정적인 일은 총관이 알아서 할 테고 치안은 경비대가 알아서 할 것이다.
자신은 그저 영주 자리만 지키며 지금처럼 살 생각이 아닌가. 따로이 비서를 둘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리아를 비서로 둔다면 그때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카라스는 어떻게 해서든 이번 일만큼은 결사 반대할 각오였다. 아마 리아가 비서로 오는 순간 자신의 자유로운 삶은 곧바로 끝장날 것이 틀림없었다.
“저는 비서실장 시켜 주세요.”
이때 리아가 불쑥 끼어들며 자신이 원하는 직함을 말했다.
“비, 비서실장?”
카라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좋구나. 비서실장이라… 아무래도 평비서보다는 비서실장이 낫겠지. 아들! 그렇게 하자!”
하노스는 리아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딱이라는 얼굴로 카라스에게 밀어붙였다.
“아… 예, 아버님.”
아버지 하노스가 너무나도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서자 카라스는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따라야 했다.
카라스의 머릿속은 점차 하얗게 변해 갔다. 비서실장 리아. 앞으로 카라스의 영주로서의 삶에 태클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꺄아아아! 고마워요, 도련님. 고마워요, 나리.”
폴짝폴짝.
리아는 그렇게도 좋은지 폴짝거리며 방방 뜨고 난리였다. 이제는 어디엘 가도 카라스의 곁에 꼭 붙어 있을 수 있으니 그보다 좋은 자리는 없는 것이다.
리아는 벌써부터 카라스에게 뭘 먹이고 뭘 입힐지 고르느라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하아.”
카라스의 입에서는 긴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저 영주 자리만 지키며 평온한 삶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갈수록 일이 꼬여 가는 것이 앞으로는 또 무슨 일이 닥칠까 겁부터 났다.
제9장 키클롭스 파의 숨은 후원자(1)
타이거 파와의 전쟁 이후 키클롭스 파와 주변 조직들의 충돌은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부분 타이거 파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지만 경비대의 개입이 그 결과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 타이거 파의 조직원들만 모두 잡혀간 것인지 주변 조직들은 정보원들을 총동원하여 알아보고 있었지만 자세한 이유는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중하는 분위기였다.
반면에 키클롭스 파의 분위기는 급상승 중이었다. 전쟁 소식을 듣고 도망갔던 조직원들이 모두 돌아와 충성을 맹세했고 싸이클롭의 권위는 한층 더 올라갔다.
물론 싸이클롭과 경비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부두목 위스커를 비롯해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경비대가 자신들의 편에 서 준다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경비대의 위상 역시 이전과는 달랐기에 과거처럼 경비대를 무시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제법 세력이 있다는 타이거 파가 경비대에 완전히 제압당한 이후 이제 웬만한 크기의 조직이 아니라면 경비대의 눈치를 살피는 실정이 되었다.
키클롭스 파의 싸이클롭은 어려운 위기를 넘긴 것에 뿌듯해하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세력을 확장시키기 어려운 현실에 남모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크락슨의 죽음은 싸이클롭에게는 분명 커다란 손해였고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지금 싸이클롭은 다시 한 번 시장통 재패라는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해 부두목 위스커만을 대동한 채 비밀스레 회동을 하고 있었다. 으슥한 창고 같은 건물 안에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조악한 의자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커허험! 거 왜 사람을 오라가라 그러슈? 내가 이래 봬도 키클롭스 파의 두목 싸이클롭요!”
싸이클롭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마차를 향해 투덜대는 중이었다. 번번히 이런 곳으로 불러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례하게 굴지 말고 거기 앉아라.”
마차 옆에는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인물이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는 싸이클롭에게 사나운 표정으로 의자를 건넸다.
“뭐시여? 이 싹퉁머리 없는 놈 좀 보소! 네 주인과 이야기 중인데 어디서 종놈이 나서는 거여?”
싸이클롭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사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무랐다.
“죽고 싶나?”
사내의 얼굴이 찌푸려지더니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아따, 이 써글넘이 어디서 콱!”
“그 입 다물고 앉아라.”
다시 한 번 싸이클롭이 욕설을 내뱉으며 한 대 칠 듯 손을 들어 올리자 사내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경고하듯 말했다.
“두목! 이 개념을 스푸 끓여 처먹은 놈은 뭐유?”
이때 부두목 위스커가 나서며 싸이클롭의 편을 들었다. 아무리 모자란 두목이라도 남들이 두목을 업신여기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낸들 알겄냐? 모가지가 무거운가 보지.”
싸이클롭은 비아냥거리며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주둥이로 밥이라도 처먹고 싶으면 성질 죽여라, 잉?”
“이놈들이 정말.”
싸이클롭과 위스커가 콤비를 이루며 연타로 조롱을 날리자 사내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며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클클클! 그만두거라. 고놈들 참 귀엽구나.”
사내가 막 출수하려는 순간 마차 안에서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소리나 말투로 보아 마차 안의 인물은 제법 나이가 있는 듯했다.
“우리가 한두 번 거래한 사이도 아닌데 이제 얼굴 좀 보이는 게 예의가 아니겄소?”
싸이클롭은 가로막는 사내를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마차 속의 노인에 대해 궁금증을 나타냈다.
“네놈 명이 다하는 날 보게 될 게야. 그러니 그렇게 재촉하지 않는 게 오래 사는 지름길인 게지. 클클클. 지금 보여 주길 원하는 게야?”
“커허험! 됐수. 늙은이 얼굴 봐서 뭐 좋다구. 그래 부른 이유나 말해 보슈.”
노인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이야기에 싸이클롭은 뜨끔해서는 정색을 하며 거절했다. 궁금증 풀고 빨리 죽는 것보다야 궁금한 채 오래 사는 게 낫지 않은가.
“일전에 네놈한테 붙여 줬던 아이가 죽었다고?”
“젠장! 내 그놈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판이우!”
노인의 물음에 싸이클롭은 무척 화가 나는 듯한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 아이가 아무리 방심했기로 네놈에게 당할 정도는 아닌데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노인은 싸이클롭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크락슨의 실력이라면 제아무리 싸이클롭이 날고 기어도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 무시하는 거유? 내가 바로 키클롭스 파의 두목 싸이클롭이요. 울던 아이들도 뚝 그친다는 바로 그 싸이클롭.”
싸이클롭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가슴을 탕탕치며 자신의 이름을 연발했다.
“껄껄껄! 네놈 이름은 익히 알고 있으니 그만 좀 하거라. 귀가 멍멍거리는구나.”
싸이클롭의 오버스러운 행동에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저 재밌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왜 불렀수? 설마 크락슨 그놈 죽은 걸 내 책임으로 돌리려는 거유? 이건 그 뭐시냐, 정당방위요, 정당방위. 그러니 나는 받은 돈 돌려줄 생각 없수. 아니, 이미 다 썼수.”
싸이클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설마 크락슨이 죽은 책임을 자신한테 묻거나 일전에 주었던 돈을 도로 내놓으라고 할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정말 그 아이가 술에 취해 네놈 수하를 죽이고 네게 죽은 것이 맞는 게야?”
노인은 다시 한 번 크락슨의 죽음에 대해서 물었다.
도무지 믿기 힘든 결과가 일어난 것에 대해 과연 자신이 모르는 뭔가 비밀이 숨어 있을까 확인하려는 심산이었다.
“아 거참, 속고만 사셨나? 맞다니까 왜 그러슈?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그놈을 죽이겠수? 그놈이 죽는 바람에 지금 키클롭스 파가 얼마나 어려운 지경에 처했는데? 내가 오히려 배상받아야겠수다.”
싸이클롭은 마음속으로는 덜컥하며 혹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끝까지 잡아떼기로 했다.
어차피 사실대로 말한다면 누구 손에 죽든 자신이 죽는 것은 확실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속일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속이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그 아이가 술이 좀 과한 구석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실수를 할 줄이야… 아무튼 그 아이 문제는 넘어가기로 하지.”
싸이클롭을 찬찬히 살피던 노인은 싸이클롭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그저 크락슨의 실수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평소에도 술이 좀 과했고 때로는 폭주를 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이번에 키클롭스 파의 일을 도와주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게 넘어간다고 될 일이유? 지금 개나 소나 우리 파와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데?”
노인이 속아 넘어가는 분위기가 되자 싸이클롭은 더욱 방방뜨며 오히려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그래 네놈이 이길 자신은 있는 게야? 지난번 약속은 시장통 전체를 장악하겠다고 한 것 같은데.”
“지금 상태로는 시일이 걸리겠지만 뭐 결과는 변함없수.”
싸이클롭은 투덜거림을 뚝 그치고는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난번 노인이 크락슨을 소개해 주고 돈까지 주었던 것이 바로 키클롭스 파로 하여금 시장통을 장악하도록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