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헤론의 영주 1권(21화)
제9장 키클롭스 파의 숨은 후원자(2)
“해서 내가 도움을 다시 주고자 하는데…….”
“흥! 또 크락슨 같은 놈이면 됐수다. 기껏 일 잘한다고 치켜올려 줬더니 주인을 물어 버리는 놈은 없느니만 못하우.”
노인의 제안에 싸이클롭은 콧방귀를 뀌며 거절했다.
“어허, 고놈 참. 지난 일로 말이 많구나. 걱정 말거라. 이제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그럼 확실한 아이로 하나 붙여 주실 생각이우? 뭐 내 힘으로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서두… 아무래도 시장통 전체를 장악하는 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노인이 크락슨의 문제는 완전하게 일단락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싸이클롭은 슬쩍 속마음을 열어 보였다.
싸이클롭이라고 시장통을 장악하고 싶지 않겠는가. 능력만 된다면야 당장에라도 시장통 전체에 군림하고 싶은 마음뿐인 것이다.
“그 아이도 술이 과해서 그렇지 실력은 제법이지 않았느냐?”
“뭐 실력은 제법이었지만 그 정도로는 솔직히 힘들었을 거유. 동부 지역에 대머리 파나 서부 지역의 꼬챙이 파 그리고 북부 지역의 칼잡이 파 놈들은 보통내기들이 아니란 건 아시지 않수?”
싸이클롭은 시장통을 장악하고 있는 조직들의 계보에 대해서 언급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노인에게 상기시켰다.
사실 키클롭스 파가 있는 남부 지역 외에 동부와 서부, 그리고 북부의 중심 조직은 남부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곳을 대표하는 조직들은 단순한 불량배들의 패거리 정도로 치부하지 못할 만큼 그 세력이 컸고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크락슨을 능가하는 인물들이 부지기수라는 소문들도 심심찮게 나도는 실정이었다. 그것이 처음 싸이클롭이 노인의 도움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던 이유였다.
“다 감안하고 데려온 아이이니 네놈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게다. 나와 보거라.”
저벅저벅.
노인의 부름에 제법 날렵하면서도 강해 보이는 인물이 걸어 나왔다. 그는 얼핏 보기에도 꽤나 강해 보였고 얼굴에서는 냉정함이 묻어 나왔다. 일견하기에도 크락슨이 풍기는 기세와는 차원이 다른 듯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샤프라고 하오. 잘 부탁하오.”
노인의 부름으로 나온 사내는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크흠, 만지면 따갑겠구만.”
싸이클롭은 사내의 소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굴을 찌푸리고는 손을 저었다.
“무슨 말이오?”
뜬금없는 이야기에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 코, 입이 죄다 뾰족하게 생겼다는 말이지 무슨 말?”
싸이클롭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사내의 얼굴 조목조목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뭐, 뭐요?”
순간 사내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며 벌겋게 달아올랐다. 면전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기는 처음이 아닌가. 사내의 날카로운 눈빛에는 어느새 살기마저 어른거렸다.
싸이클롭에게는 상대를 흥분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껄껄껄! 영 틀린 말도 아니구먼. 그 아이의 검은 더 뾰족하니 걱정 끼칠 일은 없을 게야. 이후로 시키는 일은 뭐든 다 들어주도록 하거라. 같이 할 일이 많을 게야.”
당장에라도 일이 터질 듯 험악한 분위기로 변해 갈 때 노인의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노인은 격하게 흥분하는 사내를 제지하고는 싸이클롭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알겠습니다, 로드.”
사내는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의 냉혹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에 네놈들과 괭이 아이들이 다퉜는데 괭이들만 모조리 달려갔다고? 무슨 뒷거래라도 있던 게야?”
노인은 타이거 파와의 전쟁에서 경비대가 편파적으로 키클롭스 파를 도와준 일을 끄집어냈다.
“그… 그거야 뭐… 뻔한 걸 묻고 그러슈? 이 바닥이 다 그렇지.”
싸이클롭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뜨금했는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뻔하지만 내 물었으니 대답해야 할 게야. 뭘 주었누?”
싸이클롭이 대충 넘어가려 하자 노인은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요구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궁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커허험! 경비대 급료를 우리가 지불하기로 했수. 뭐 이제는 경비대도 내 수하들이라 생각하면 되니 신경 끄슈.”
싸이클롭은 이 상황을 어찌 모면해야 할지 엄청나게 머리를 굴리다가는 그저 나오는 대로 지껄어 버렸다. 자신이 이야기하고도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지만 이제는 내뱉은 말이니 어쩔 수 없었다.
“껄껄껄껄! 과연 내가 사람은 잘 본 모양인 게야. 눈깔은 하나인데 두 개 달린 놈들보다 더 많이 보니 말이야.”
싸이클롭의 걱정 어린 마음과는 달리 싸이클롭의 대답은 노인을 무척이나 흡족하게 만들었다. 폭력 조직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발상으로 뒷거래를 한 것이 매우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사실 어떤 조직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그것은 관료 조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누가 돈을 주느냐, 곧 누가 밥줄을 쥐고 있느냐가 결국 그 조직을 부릴 수 있느냐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넓게 보고 경비대의 급료를 지불하기로 한 것은 분명 키클롭스 파에게는 매우 현명한 선택인 것이다. 적어도 노인의 생각은 그러했다.
“자꾸 눈깔 얘기하지 마슈. 빌어먹을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나?”
노인의 만족하는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싸이클롭은 눈깔이 하나라는 말에 울컥해서는 저도 모르게 막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평소 외눈에 대해 열등감이 있는 싸이클롭으로서는 이성적으로 자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쉬이이이익.
“허어억!”
그 순간 마차를 호위하던 사내의 검이 순식간에 뽑혀서는 싸이클롭의 목에 닿아 있었다.
싸이클롭은 기겁을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 검이 뽑혔는지조차 모를 만큼 사내의 검은 빨랐고 마음만 먹었다면 싸이클롭은 반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싸이클롭의 등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과연 저 노인의 정체는 자신이 범접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 번만 더 무례하면 죽인다.”
사내는 나지막하지만 살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싸이클롭에게 경고했다.
“이, 이거 좀 치우고 말하슈. 실수로라도 벤단 말이오. 어, 얼른!”
싸이클롭은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부두목 위스커 앞에서 겁먹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싸이클롭은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미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거두거라.”
“예, 로드.”
노인의 명에 사내는 검을 거두었지만 싸이클롭을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커허험! 괜히 눈깔 얘기해서 사람을… 쯧.”
싸이클롭은 무안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목을 어루만졌다.
사내도 사내였지만 자신을 흥분하게 만들어 위험을 자초하게 만든 노인이 더 얄미운 싸이클롭이었다.
“주거라.”
털썩.
노인의 명에 사내는 마차 옆에 놓아 두었던 커다란 보따리를 싸이클롭 앞에 내려놓았다. 소리만으로도 상당히 묵직하다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넉넉할 게야. 대신 시간을 아끼거라. 기대에 못 미치면 네놈이 바라는 대로 나를 보게 될 게야.”
노인은 처음처럼 싸이클롭의 일을 대신할 인물은 물론 조직을 크게 확장시킬 자금까지도 건네주었다. 지난번보다 보따리가 큰 것이 그 액수 또한 더 많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목줄을 움켜쥐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이게 얼마냐 그러니까… 커허험! 걱정 마슈. 내 후딱 시장통을 접수해 버릴 테니. 아무튼 잘 쓰겠수다.”
싸이클롭은 꽤나 듬직한 보따리를 얼싸 끌어안고는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못 잡아도 지난번 받은 액수의 두 배는 족히 넘어 보였다.
싸이클롭은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노인의 위협은 이미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장 이렇게 넘치고도 남을 돈이 있는데 뒷일까지 걱정할 싸이클롭이 아닌 것이다.
싸이클롭은 호기 어린 목소리로 가슴을 탕탕 치며 노인의 기대에 부응하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가자꾸나.”
“출발하겠습니다. 로드.”
히히히힝!
돈 보따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싸이클롭을 남겨 둔 채 노인을 실은 마차는 창고를 떠나갔다.
노인이 떠나가든지 말든지 싸이클롭은 보따리를 부둥켜 앉은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
하노스의 끊임없는 독촉으로 공사는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었고 드디어 카라스가 영주로서의 업무를 수행할 건물이 완공되었다. 하노스는 손수 커다란 명판을 만들어 입구에 걸어 두었다.
헤론 본부.
장차 남작 카라스가 헤론 영지를 다스리며 철혈영주라 불리게 될 그 시발점이 되는 곳이었다.
똑똑.
“영주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영주님께서 신경 써 주셔서 가족들이 모두 이사해 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러셀 총관은 꾸뻑 인사를 하며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러셀 총관이 영지의 일을 맡으면서 그 가족들은 카라스의 집에서 머물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집과 헤론 본부는 걸어서 십 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기에 러셀 총관으로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르노와르 상단의 주인이 머무는 저택이라면 그보다 더 안전한 곳은 이곳 헤론 영지에서 없는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감사는요, 당연한 일인데.”
“제게 시키실 일이 계시면 언제든 하명해 주십시오. 신명을 바쳐 일하겠습니다.”
“후후. 그럼 잘 부탁합니다.”
러셀 총관과 카라스는 서로 간에 예를 차리며 한껏 화기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둘의 만남은 카라스에게도 러셀 총관에게도 모두 도움이 되는 일이었기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한데 영주님. 드릴 말씀이… 아니,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실례가 안 되신다면요.”
러셀 총관은 밝았던 얼굴색을 고치고는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카라스의 얼굴을 살피는 것이 상당히 말하기 곤란한 내용인 듯했다.
“물어보세요. 뭐가 궁금하지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영주님께서는 부족한 게 없는 분이십니다. 르노와르 상단이라면 이곳에서도 행세하는 상단이고 헤론 영지에서 행세한다는 말은 대륙 그 어느 곳에서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르노와르 상단의 위치입니다.”
러셀 총관은 카라스에게 묻기 전에 장황하게 서두를 시작했다.
사실 카라스의 위치는 영주라는 것보다는 르노와르 상단주의 아들이라는 것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고 헤론 영지의 주민들 역시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헤론 영지에서의 상단의 위치는 상당했고 르노와르 상단의 힘도 막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르노와르 상단의 규모야 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카라스는 부인하지 않았다.
여느 귀족들 같으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처음부터 신분에 대해서 별다른 욕심이 없느 카라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다.
“르노와르 상단 만으로도 도련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실 텐데 왜 이곳의 영주가 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음… 글쎄요. 아무래도 첫 번째 이유는 뭐 이곳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아버님의 뜻이겠지요. 제가 귀족이 되기를 누구보다 바라셨으니까요.”
러셀 총관의 직접적인 물음에 카라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버지 하노스의 오랜 숙원이라는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고 그 이유가 바로 카라스가 영주직을 수락한 첫 번째 이유인 것이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걸 여쭌 것 같습니다. 상단주님께서 그토록 기뻐하시는 걸 알면서도 어리석은 질문을 해 버렸습니다.”
카라스의 너무도 솔직한 대답에 러셀 총관은 오히려 얼굴이 붉어지며 무안한 기색이 되었다.
“후후. 그런데 왜 그런 걸 묻지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카라스는 러셀 총관의 무안함을 풀어 주기 위해 가볍게 웃어 주고는 이러한 것을 묻는 진의에 대해서 물었다. 러셀 총관이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음…….”
러셀 총관은 무척이나 망설이고 있었다. 과연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말씀하세요. 어려워하지 마시고.”
“영주님께서는 이곳을 어떻게 다스리고 싶으십니까? 아니,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카라스가 다시 한 번 안심을 시키며 묻자 러셀은 용기를 냈는지 카라스의 장차 포부에 대해서 물었다.
“계획이라… 글쎄요. 뭐 사실 특별한 계획은 없다고 해야겠군요. 그저 영주로서의 기본적인 업무 위주로 할 생각입니다. 게으름 피우다 짤리기라도 하면 아버님 얼굴을 뵐 용기가 안 나거든요.”
카라스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영주가 되려는 욕심이나 포부가 없었듯이 영주가 되어서도 그저 기본적인 역할 외에는 특별하게 뭔가를 추진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카라스가 걱정하는 것은 오직 영주직을 잃는 것뿐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뭐 지금처럼 특별한 무리 없이 운영하실 계획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카라스의 솔직한 대답에 러셀 총관의 얼굴이 환해졌다. 러셀 총관이 바라는 대답인 듯했다.
“뭐 그렇게 해 두지요.”
“아, 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영주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아무런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러셀 총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척이나 안도하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