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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공자 1권(4화)
1장 파락호 오대수(4)
***
적룡보라는 곳은 무림문파가 아니다.
낙양 땅과 그 인근 스물두 개 마을의 상권을 관리하고 있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파락호들이 모여 있는 흑사방에 불과했다.
낙양에는 그곳을 관리하는 명문세가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낙양건씨세가가 있고, 해검진가(解劍秦家)와 협도이가(俠刀李家), 맹창벽가(猛槍碧家)가 있었다.
무림문파라 자신있게 칭하기엔 세가에 상주하는 무인들의 숫자가 적은 곳들.
그래도 모두 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오래된 명문이며, 그들이 가진 인맥과 힘 역시도 흑사회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출중한 세가가 네 개나 있는 땅에서 적룡보가 낙양의 상권을 관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명문세가들은 주변 상가에서 직접 보호비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보호비를 받는다는 것은 주변 상가들을 지키는 것에 대한 생색을 낸다는 것인데, 협의(俠義)를 따르는 정도문파로서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정도무림인으로서 주변의 이웃들에게 패악을 부리는 자들은 무력으로 징치해야 한다.
하지만 명문세가가 관부의 포졸마냥 항상 상가를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객잔이나 기루에서 술을 마시다가 벌어지는 일들.
도방에서 벌어지는 싸움, 시전에서 일어나는 다툼.
그런 싸움엔 협의가 없다.
어찌 명문세가 무인들이 그런 곳에 끼어들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대리인이 필요했다.
상가의 사람들을 지켜 주고,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싸움을 다스리는 자들 말이다.
네 개의 명문세가는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뒤, 당시 낙양에서 암중에 활동하던 흑사방 중 파락호이면서도 민초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만큼 의협심(義俠心)이 있던 적룡보의 활동을 용인했다.
무림의 싸움은 세가의 몫.
민초의 관리는 적룡보의 몫.
강인하고 사납지만 절대로 민초들을 괴롭히지 않으며 오히려 외지의 패악한 자들을 스스로 나서서 징치하니, 백성들은 적룡보를 한 가족처럼 아끼고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적룡보를 허용한 낙양의 세가들에게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위수분지에 있는 흑선파나 화북평원(華北平原)의 혈화방(血華房) 같은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적룡보는 최소한의 보호비만 걷었고, 다른 파락호들이 얼씬도 못하게 사시사철 사람들을 지켰다.
그렇게 오십여 년.
전국에 유례가 없을 만큼 역사가 길어진 적룡보는 흑사회의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설마, 이곳은?”
얼굴이 잔뜩 굳은 오대수는 덜덜 떨리는 입술만큼이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왜 그래, 아저씨?”
“너, 너, 왜 여기로 온 거냐? 아니,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오대수는 복화술을 하듯이 이를 악문 채 물었다.
그런데 소년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웃할 뿐이다.
“여기가 왜? 그냥 아는 곳인데?”
“너 같은 어린애들이 알 만한 곳이…… 휴우, 아니지. 화를 낼 일이 아니지. 평범한 꼬마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으니. 혹시 너, 여기의 보주와 무슨…….”
오대수가 본격적으로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보는 사람이 위압감을 느낄 만큼 지붕부터 입구까지 온통 새카맣게 옻칠이 되어 있던 전각 안에서 칠 척의 거한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도련님!”
“석웅(石熊)?”
“으하하! 오늘은 오시는 날이 아닌데 어쩐 일이십니까? 도방(賭房)에라도 가고 싶으신 겁니까?”
밤송이 같은 수염을 가진 칠 척 거한은 온 골목이 떠나갈 것처럼 큰 목소리로 웃으며 소년을 반겼다.
붉은 바지에 흰색 두건.
그것만 봐도 상대가 적룡보의 일원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양팔은 쇳덩이를 연상시킬 만큼 강인해 보였고, 목덜미 부근에서 불끈거리는 근육과 태산처럼 넓은 어깨에선 장대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분명히 싸움도 잘할 것이다.
평범한 졸자들과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그런 사람이 소년에게 깍듯하게 대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꼬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오대수는 석웅이라 불린 거한이 성큼 다가와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자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석웅의 웃고 있는 얼굴에선 엄청난 박력이 뿜어져 나왔다.
“응? 그런데 도련님, 이 사람은 누굽니까?”
소년과 즐겁게 인사를 나누던 석웅이 오대수를 발견하곤 고리눈을 크게 떴다.
오대수는 옷매무새를 바로하며 허리를 곧게 폈다.
“아, 저는…….”
“쫓기고 있는 아저씨야.”
소년이 대뜸 내뱉은 말에 오대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적룡보에 몸을 의탁할 마음으로 낙양에 온 사람이다.
잘 보여도 모자랄 판국에, 첫인상부터 안 좋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꼬마가 결국 내 앞길을 막는구나!’
“무슨, 그런…….”
“객잔에서부터 쫓기고 있었어. 내가 아니었으면 잡혔을 거야.”
“안 도와줘도 알아서 잘 도망쳤을 거다!”
“그 몸으로?”
흥분해서 씩씩거리던 오대수의 입이 꿀먹은 벙어리마냥 붙어 버렸다.
그는 석웅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었다.
“쫓기고 있다고?”
지옥의 야차처럼 낮은 목소리.
섬뜩한 시선이 그를 향한다.
오대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심정으로 주춤주춤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쫓기고 있는 거요?”
“흑선파에서 저를 제거하고 싶어 하는…… 으헉!”
콰앙!
석웅의 주먹을 얻어맞은 건물 벽이 썩은 나무둥치마냥 박살 나서 흩어졌다.
“흑.선.파?”
“그, 그렇습니다.”
‘무시무시한 힘이다!’
오대수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과 무슨 관계이기에 쫓기고 있는 거요?”
“…….”
“혹시 한패였소?”
오대수는 갈등했다.
철근도 씹어먹을 것 같은 석웅이란 사내는 흑선파에 원한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도 좋은 것일까?
나중에 밝혀질지언정 일단은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되었다.
“내, 내부에서…….”
“내부에서?”
“……장부 관련된 일을 조금.”
“장부우?”
성큼 걸음을 내딛은 석웅의 두 눈이 오대수의 이마 앞까지 다가왔다.
성질이 난 숫소처럼 뜨거운 입김이 코에 닿았다.
“장부라는 게 혹시 돈 계산한 것들을 적어 놓는, 그 장부를 말하는 거요?”
“그, 그렇습니다.”
“그럼 흑선파의 돈 거래 내역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뜻이네?”
오대수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이것 봐라?’
석웅은 덩치만 봐선 우둔한 듯 보이지만, 절대로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장부의 중요성과 효용성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이 순간에 하는 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물론! 얼마 전에 이층 전각을 산 것부터 시작해서 근처에서 속곳 하나 산 것까지 다 꿰고 있습니다!”
“호오, 그 정도로 자세하게?”
“이래 봬도 그쪽으로 제법 재능이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흑선파가 요새 사람들을 끌어모은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건 새로 온 총사가 하는 짓입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나는 보주님께서 관심이 있어 하실 이야기를 한 가지 알고 있어요.”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매담자(賣談者)들이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줄이듯이.
하지만 마지막 말이 실수였을까?
처음엔 흥미로운 듯이 잘 듣고 있던 석웅이었으나, 갑자기 슥―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차가운 눈빛이 되었다.
“보주님께 말씀드릴 비밀을 나에게 말하면 쓰나.”
‘실수다! 정말로 충성스러운 자야!’
오대수는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여기서 버림받으면 뒤쫓아온 흑선파 놈들에게 귀가 잘릴 것 같아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난 아직 말하지 않았소!”
“비밀이 있다는 것도 비밀인 법이지.”
“그러니까, 당신한테는 괜찮은 거잖소! 척 보니 적룡보주의 충신이구만!”
“글쎄, 어떨까? 내가 충신이라는 걸 알고 말했으려나?”
석웅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오대수는 속이 탔다.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는 얼굴의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 위의 눈빛에선 얼핏 사냥감을 바라보는 듯한 잔인한 냉정함마저 감돈다.
‘죽었구나.’
오대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석웅, 너무 놀리지 마.”
“흐흐. 알았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들어야죠.”
한겨울 칼바람처럼 싸늘했던 석웅의 표정이 눈 녹 듯이 사르륵 녹아내리더니, 곧바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그 모습에 오대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대체 이 꼬마가 누구기에? 설마 적룡보주의 아들이라도 되는 거야?’
처음엔 설마 했던 상상이 현실감있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십쇼. 보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고, 오대수는 얼떨떨하게 서 있다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쿵!
육중한 문이 닫힌다.
오대수에게 있어선 오늘 재수가 없던 날인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 날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세 사람이 사라진 뒷골목.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어두운 골목길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