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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공자 1권(17화)
6장 천벌사신(天罰死神)(2)


건소길은 종이를 받자마자 펼쳐 보았다.
필묵으로 특징만 그려 놓은 용모파기와 그 밑에 주르륵 적어 놓은 죄목이 눈에 들어왔다.
“납치, 살인, 고리대금업에 불법 염상(鹽商)까지? 이러고도 아직 멀쩡하다고?”
“모청조(暮淸操). 대단한 인간이야. 한왕(漢王)의 밑에 있는데, 그 사람에게 가진 수입의 반을 바쳐서 엄청난 특권을 쥐고 있어.”
“한왕이라면 영락제의 둘째 아들인가 그렇잖아!”
“그래, 그 사람.”
오칠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얼마 전에 잔인하게 죽은 일가족 사건 알지? 그, 남문 쪽에 있던…….”
“황가네 포목점집?”
“그래, 거기. 강 포두님이 거길 수사하셨는데, 유력한 범인으로 모청조의 심복 중 한 사람이 지목되었어. 물론, 그 심복은 취조도 제대로 받기 전에 풀려났고.”
“한 번 맞춰 볼까? 새로 온 현감 때문이지?”
“그래. 하 현감(縣監)은 사람은 좋은데 무능해서 주변의 눈치만 살피는 전형적인 소인배야. 한왕을 등에 업은 모청조 같은 여우를 당해 낼 리가 없지.”
건소길은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하여간 세상엔 부조리한 게 너무 많아.”
“그러게 말이다.”
“법은 공평해야 해. 왕후장상의 씨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어야만 진정한 법이지.”
건소길은 용모파기를 접어서 품 안에 넣으려고 했는데, 오칠이 갑자기 손목을 붙잡았다.
“그런데…… 내가 이걸 너한테 줘도 될는지 모르겠다.”
“왜?”
“모청조는 뒷세계에서 유명한 염상의 우두머리야. 내가 듣기로 호위로 데리고 있는 사람도 범상치 않은 실력의 고수라고 했어.”
“괜찮아. 나는 살수가 아니잖아. 호위랑 싸울 일 없어.”
“그래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걱정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야. 나는 강 포두님께 그렇게 배웠어.”
“강 포두님이?”
“누군가에게 벌을 주려면 자신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벌을 주고 나서는 그 결과에 대해……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간단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강 포두의 본명은 강석(姜石).
이름 그대로 단단하기가 차돌 같은 사람이라 평생 포두 이상의 관직으로 진급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백성들을 생각하고 범죄자들을 싫어해서 정의감 충만한 포졸들 중에는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뿐인가.
강 포두는 머리가 좋고 눈썰미가 뛰어났다.
그는 범죄자들이 남긴 작은 흔적 하나조차 허투루 넘기지 않았고, 언제나 귀신같이 증거를 찾아내서 잡아내기 일쑤였던 것이다.
오칠이 포졸이 된 이유도 그런 강 포두를 존경하기 때문.
오칠은 강 포두가 한 모든 말과 행동을 항상 기록하여 외우고 있었다.
“난 가끔 걱정돼. 네가 타고난 능력을 이용해서 범죄자들에게 벌을 주기로 결심한 이후, 너를 돕는다는 게 오히려 잘못된 건 아닌지.”
건소길은 걱정스러워하는 오칠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아니야. 걱정할 것 없어.”
“소길아…….”
“걱정 마. 내가 포졸들 사이에서 뭐라고 불리는지 알지?”
“……알지.”
“난 괜찮아.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니까?”
오칠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품 안에서 곱게 접혀 있는 서찰을 하나 더 꺼냈다.
“이것도 받아.”
“이건 뭔데?”
“모청조의 심복들 명단과 조심해야 할 사항.”
“이런 것도 준비해 뒀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아직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는 서찰에서 오칠의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건소길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큰 도움이 될 거야.”

***

낙양은 황하(黃河)의 지류인 낙하(洛河) 유역에 위치한 도시였다.
중심가에서 조금만 움직이면 곧 낙하 유역의 포구가 나오고, 물건과 사람을 운송해 오는 배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돈이 움직인다는 뜻이고, 돈이 움직이는 곳엔 언제나 유흥이 발달하는 법.
늦은 밤, 다채로운 색상의 연등에 불을 붙인 화선(花船)들이 서로 화려함을 견주듯 강물 위에 떠 있었다.
기녀들이 술과 웃음을 파는 간이 기루가 바로 화선인데, 낙양을 빈번하게 찾아오는 뱃사람들만큼이나 그들의 장사는 번창하고 있었다.
그렇듯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딱 한 곳.
기녀들의 교성과 아름다운 기악 소리가 닿지 않는 장소가 있다.
이름은 낙하상방(洛河商幇).
뒷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모청조가 겉으로 내세운 사업체였다.
겉으로 보기엔 포구에 위치한 여느 상방이나 다름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유독 낙하상방의 주변만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것이 첫 번째.
취객은 물론이거니와, 행인들조차 낙하상방 근처를 지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살벌한 눈빛을 지닌 덩치 큰 문지기가 두 명이나 지키고 있는데다, 대문의 높이는 일 장이 넘고, 담벼락의 중간 중간엔 불을 밝힌 횃대가 꽂혀 있어 사각지대가 없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세 번째였다.
주변의 다른 상방들이 문을 닫고 불까지 다 꺼 버린 것과는 달리 낙하상방은 손님도 없으면서 마치 전쟁 중인 군대마냥 한껏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대단하네.”
시끌벅적한 낙하 유역의 행인들 사이에 숨어서 낙하상방을 지켜보던 건소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칠이 말한 그대로야.”
낙하상방은 웬만한 무가(武家)보다 더 경계가 철저하다더니, 정말인 듯했다.
문지기들은 단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고, 담장 뒤에선 경계를 도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뚫기 힘든 곳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건소길은 인근의 골목으로 들어가 두꺼운 천으로 만든 수투를 끼고 검은색 복면과 두건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인적이 드물 때를 기다려 담벼락을 향해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상체는 살짝 앞으로 숙이고 두 개의 다리는 뒤쪽으로 쭉쭉 뻗어 낸다.
골반을 좌우로 비틀 때마다 무릎과 발목이 유연하게 꺾이는데, 건소길은 등 뒤에 날개라도 달린 양 빨랫줄처럼 앞으로 뻗어 나갔다.
낙양건씨세가의 청류공(淸流功) 중 하나인 청류무한보(淸流無限步)였다.
담벼락에 다다른 건소길은 한 손으로 붙잡고 단번에 뛰어넘었다.
안쪽은 고요했다.
횃불이 타오르는 지글거리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겹쳐서 들려올 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건소길은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어두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건물을 향해 다가갔다.
경계를 도는 병사를 피해 숨을 죽이고, 병사들이 지나가고 나면 움직이는 행동이 반복되었다.
“이봐, 좀 으스스하지 않아?”
“으스스하다니, 뭐가?”
“그냥. 기분이 좀 묘한데?”
“감기라도 걸렸나 보구만.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건소길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뒤로 몸을 날렸다.
처마를 붙잡고 몸을 뒤집어 지붕 위로 물구나무를 섰다.
“응?”
“뭐야, 왜 그래?”
“아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무슨 소리?”
“으음, 아닌가?”
“이 사람 참, 오늘따라 예민하구만.”
병사들은 잠시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이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후우…….”
건소길은 천천히 허리에 힘을 빼고 지붕에 발을 댔다.
이마에서 절로 땀이 흘러내린다.
힘들다기보다는 긴장해서 그렇다.
아직 열여섯.
어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 자란 것도 아니다.
그는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능숙하게 벽을 타고 올라 이층의 창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다섯 명.’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몸속에 가득한 뇌기(雷氣)가 주변의 상황을 감지해 준다.
이층을 지키고 있는 것은 다섯 명.
그리고 천장 너머로 세 명의 인기척이 더 느껴졌다.
‘삼층이라니, 교묘하네. 밖에선 이층까지밖에 안 보이던데.’
잠시 계단으로 올라갈까 고민했지만, 계단 앞에 큰 칼을 찬 호위 두 사람이 지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마음을 바꿨다.
건소길은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다시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건물의 지붕 위.
차가운 기왓장 몇 개를 들어내자 숨겨진 방이 의외로 쉽게 드러났다.
‘보통 사람들은 삼층이 있는 줄도 모를 테니까 그걸 믿고 방심한 건가?’
건소길은 고개를 갸웃하며 작은 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대들보에 매달린 채 잠시 굳어버렸다.
“아……! 아아……!”
신음이 들려온다.
침상엔 세 사람이 있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모청조와 풍만하면서 낭창낭창한 허리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이다.
세 사람은 얇은 비단 홑옷 하나씩만 걸친 채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한창 피 끓는 나이의 건소길은 그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오오! 우오오오!”
특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청조가 허리를 꿈틀대면서 출산하는 소마냥 희한한 소리를 내는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시선을 느낀 것일까?
모청조와 함께 있던 두 여인 중 한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위를 쳐다보다가 건소길과 눈이 마주쳤다.
“……!!”
여인의 눈에 경악의 기색이 떠오른다.
건소길은 손가락 하나를 입에 가져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인은 갈등하는 듯이 보였다.
복면을 하고 대들보에 매달려 있는 괴한과 그녀의 몸을 탐하던 뒷세계의 거물 중 누굴 믿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건소길은 청류무한보(淸流無限步)를 사용해 재빨리 바닥에 내려섰다.
침상에 가까이 다가가자 후끈하면서 비릿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그는 손을 가리고 있던 수투를 벗은 뒤, 허리를 꿈틀대고 있는 모청조의 등 뒤에 맨손을 가져갔다.
여인은 그때까지도 혼란스러운 얼굴로 굳어 있었다.
“우오오! 우오오오오!”
환희의 절정에 이른 모청조는 계속해서 희한한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건소길은 속으로 다섯을 셀 정도의 시간 동안 모청조를 응시하다가 손을 떼어냈다.
“허억! 후욱!”
손을 떼자 모청조가 몸을 부들부들 떤다.
건소길은 여인을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대들보 위로 펄쩍 뛰어올라 곧바로 지붕 위로 빠져나갔다.
기왓장을 다시 얹어 원상태로 돌려놓고 그가 들어갔던 경로를 되짚어 가며 담장을 넘어갔다.

달빛이 유난히 환하던 밤에 벌어진 단 한 번의 방문.
그리고 그다음 날, 낙양 염상(鹽商)들을 지배하던 낙하상방(洛河商幇)은 문을 닫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