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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공자 1권(21화)
7장 호걸(豪傑) 팽소뢰(2)
***
화창한 가을날의 하늘은 푸르다.
교외로 나가면 추수 직전의 벼가 황금색으로 물결치고, 낙양 성문을 살펴보면 지방 곳곳에서 수레 한 가득 곡식을 싣고 들어오는 상인들을 볼 수 있다.
괜히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 아닌 것이다.
본래 곳간이 가득 차면 마음도 풍요로워지는 법.
그 이치는 다리 밑의 거지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라서, 이틀에 한 번 꼴로 굶어야 하는 거지들도 가을 추수철이 되면 매일 든든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건소길이 다리 밑에 찾아갔을 때도 그랬다.
누더기를 입은 소년들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소면 국물에 식은 밥을 말아서 나눠 먹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저마다 행복한 미소를 한가득 짓고 있던 것이다.
“소길 형님!”
“형님!!”
한 명과 눈이 마주치자 논밭에서 메뚜기 뛰듯 펄쩍 뛰어오른 아이들이 건소길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건소길은 한 명, 한 명에게 각자 반갑게 인사를 해 준 뒤, 느긋하게 다리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배를 두드리고 있는 종팔과 그 옆에 앉아 있는 오칠에게 다가갔다.
“어이쿠, 도련님 오셨습니까?”
“괜찮아요. 쉬고 계세요.”
종팔은 언제나처럼 호들갑을 떨며 맞아 준다.
반면에 절친한 친구인 오칠은 건소길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으며 탐색하는 시선을 보냈다.
“괜찮냐?”
“안 괜찮을 리가 있겠어?”
“방심하지 마. 너 그러다 크게 당한다.”
“나 아홉 살 땐가, 한동안 떨어지는 낙엽도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적이 있었잖아? 기억나?”
“기억하지.”
오칠은 눈에서 힘을 빼며 과거를 회상했다.
“너 이상하게 군다고 가주 어르신이 호위까지 붙여 줬잖아?”
“그때 깨달은 게 있거든.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타고난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걸. 난 꽤 운이 좋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쉽지도 않겠구나라는 걸 느꼈지.”
“아이구, 도인 납셨네, 도인 납셨어.”
평소에 농담도 잘 안 하는 오칠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들의 나이가 이제 겨우 열여섯이다.
그런 주제에 대체 무슨 세상사 달관한 도사나 할 법한 말을 하느냔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신경 써 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 대충 살겠다, 뭐 그런 이야기냐?”
“요약하자면 그럴지도.”
“후우, 너 때문에 내가 팍 늙는 것 같다.”
한숨을 푹 쉬는 오칠의 이마엔 정말로 주름이 몇 개나 생겨 있었다.
건소길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야! 너야말로 나이가 몇인데 벌써 주름이야?! 자꾸 인상 찌푸리지 마. 한 번 주름 생기면 평생 안 없어진다?”
“남자가 주름 좀 있으면 어때?”
“이 녀석 보게? 장가가기도 전에 주름부터 만들려고? 젊고 아름다운 소저들이 주름 가득한 애늙은이를 좋아할 것 같아?”
“남자의 내면이 아니라 얼굴만 보는 여인은 내 쪽에서 사양이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오칠이다.
그런데 그 말이 지극히 맞는지라 건소길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뭐, 어쨌거나 너무 걱정 마. 위험한 일은 안 하고 있으니까.”
“그래, 조심해라.”
얼핏 무뚝뚝해 보이지만 건소길은 오칠이 얼마나 그를 아끼는지 잘 알고 있다.
빙긋 웃은 건소길이 이번엔 옆에서 모르는 척 배만 두드리고 있는 종팔을 바라봤다.
“왕초, 다른 소식은 없어요?”
“사실은 있습니다요, 도련님.”
종팔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예? 무슨 소식인데요?”
“건씨세가에서 도련님을 찾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누가 세가로 도련님을 찾아왔다던데요.”
“저를요……?”
건소길은 고개를 갸웃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를 찾아올 만한 사람이 있는지 떠올려 보는 것이다.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는데…….”
“중요한 손님인 것 같았습니다요. 세가에서 연락이 닿는 대로 바로 돌아오라고 하던데요.”
“으음, 그래요?”
건소길은 의아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바로 가 봐야겠네요. 참, 왕초. 여기.”
“어이쿠, 뭘 이런 걸 다!”
건소길이 등 뒤에 메고 있던 봇짐을 통째로 건네주자 종팔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봇짐 안엔 아직 뜨끈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 열댓 개와 주먹밥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무리 사람들 인심이 후해졌다지만, 그래도 돈 받고 파는 음식만 할까?
소면 국물에 찬밥을 말아 먹던 아이들도 벌써 냄새를 맡았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종팔만 주시하고 있었다.
“얘들아! 도련님이 맛난 것을 가지고 와 주셨다! 잔치다!”
“와아아아―!”
아이들이 함성을 내지른다.
그 행복한 모습을 보자 건소길은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왕초. 이건 왕초 거예요.”
건소길은 또다른 봇짐에서 호리병을 하나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러자 졸린 듯 나른해져 있던 종팔의 눈이 동그래진다.
“수, 술입니까?!”
“쉿! 애들 몰래 드세요. 객잔에 갔다가 왕초 생각이 나서 사 온 거니까요.”
“도련님!”
종팔은 감동을 받은 듯 만세를 불렀다.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앞으로도 뭐든 알게 되는 대로 도련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요!”
“하하, 잘 부탁드려요.”
건소길은 손을 흔들며 건씨세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
“이 녀석, 왜 이렇게 늦은 것이냐!”
나이가 제법 들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푸른색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건소길을 꾸짖고 있었다.
건소길은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아버지인 건청호.
건씨세가의 현 가주이자 낙양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자상한 성품을 지닌 분이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무섭기 그지없기에 넉살 좋은 건소길이라 해도 공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함부로 밖으로 나다니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제는 마차 사고가 났었다면서!”
건소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셨…… 어요?”
“왜 이야길 하지 않았어!”
건청호가 건소길에게 성큼 다가온다.
“너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더냐.”
건소길은 열여섯의 소년치고는 꽤 키가 큰 편이었지만, 훤칠하니 큰 건청호보다는 아직도 머리 하나는 작았다.
턱, 하니 머리위로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건청호가 건소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 아비를 걱정시키는 것이냐.”
“……하지만 저도 밖에서 할 일이 있어요.”
건소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소심한 반항을 해 보았다.
“다리 밑의 아이들 말이냐? 아니면 낙양대로의 노점상들?”
“그들도 그렇지만, 저도 밖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구요.”
“알지, 알고 있다. 하지만 건씨 집안의 유일한 아들 노릇도 중요해.”
“공부는 매일 하고 있어요. 훗날 세가를 이끌어 가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지식을 익혀 둘게요.”
“그 이야기가 아니다.”
건청호의 양손이 건소길의 머리를 붙잡았다.
“네가 이 아비의 아들이고, 네 어미의 아들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 줬으면 하는 거다.”
“…….”
“네가 밖에서 무엇을 하든 허튼짓은 아니겠지. 나는 너를 믿는다. 하지만 매번 아비와 어미를 걱정시켜서야 좋은 아들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느냐.”
순간, 건소길은 마음이 찡해져 왔다.
유서 깊은 세가의 아버지들 중에 좋은 가주가 되는 법보다 좋은 아들이 되는 법을 더 중하게 가르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다.
스스로의 가족을 바르게 다스리는 일이 천하를 다스리는 첫걸음이라는 뜻.
그런 면에서 건청호는 모범적인 가장이자 가문의 가주였다.
건소길은 스스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좀 더 주의할게요.”
“그래, 주의해 다오.”
건청호가 어깨를 두드린다.
그러고는 그걸로 끝이라는 듯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널 찾는 손님이 왔더구나. 하북팽가의 이공자다.”
“하북팽가?”
건소길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하북팽가의 이공자가 왜 찾아왔는지 도저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왜 왔대요?”
“어제 벌어진 마차 사고의 당사자라더구나.”
“네?”
“마차를 몰았던 게 자신이고, 말이 날뛰는 바람에 너를 칠 뻔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너에게 사과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더구나.”
건청호는 하북팽가의 이공자가 썩 마음에 드는 듯한 눈치였다.
건소길은 그제야 어제 마차 사고가 난 직후에 자신을 붙잡으려 했던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생각났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이름도 안 물어보고 일방적으로 도망쳤는데, 아마 그 청년이 하북팽가의 이공자였던 모양이다.
“솔직한 사람이네요. 그냥 갔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했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호탕한 성격 같더구나.”
“가 볼게요. 지금 그 사람 어디에 있어요?”
건청호는 세가의 담장 너머, 논밭이 펼쳐지는 택지(宅地)를 가리켰다.
건소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설마, 행운각(幸運閣)에?”
“그래. 행운각에서 기다리고 있다.”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낀 건소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