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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공자 1권(22화)
7장 호걸(豪傑) 팽소뢰(3)


***

건소길이 행운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단이 벌어진 뒤였다.
소담스럽게 꽃을 피웠던 국화밭이 시커멓게 뒤집어져 있었고, 깨지고 박살 난 대죽(大竹) 울타리들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아아…….”
건소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이렇게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쓰러질 것 같은 울타리 위에 올라가서 엄지발가락만 걸친 채 버티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한 명.
그리고 그 울타리 밑에서 커다란 대도를 뽑아 든 채 당장에라도 피를 볼 것처럼 살기등등한 청년이 한 명이다.
두 사람은 용쟁호투를 연상시키는 자세를 취한 채 서로를 노려보며 빽빽 소리치고 있었다.
“이놈아! 날 언제 봤다고 이리 핍박하느냐! 힘만 세면 다인가! 하북팽가에선 무공이 강하면 아무나 핍박해도 된다고 자식을 그리 가르치더냐!!”
“뭣! 도적놈 주제에 어디서 감히 하북팽가를 들먹여! 언제 봤느냐니! 바로 이틀 전에 봤다! 내가 우리 가문의 신물을 훔쳐간 놈도 못 알아볼 만큼 등신인 줄 알아!!”
“신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거짓말하지 마라!!”
건장하다 못해 옷이 터질 것처럼 튼튼한 육신을 지닌 청년이 호통을 쳤다.
“그 목소리! 그 체구! 내가 꿈에서라도 잊을 것 같으냐! 너는 석가장 출신으로 위장해서 신물을 훔쳐간 그 도적놈이 분명하다!”
“허어, 그게 누군지 몰라도 사내놈에게 그리 열렬히 기억되어 봐야 기쁘지 않다네, 젊은 친구.”
“당장 못 내려와!”
쾅!
청년이 발을 구르자 대나무 울타리가 당장에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못 내려가! 내려가면 죽을 것 같은데!”
“안 죽인다!”
“하! 살기나 지우고 말하시지!”
팽가의 청년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걱정 마라. 신물만 돌려주면 양손만 자르고 살려 주마!”
그에 장씨가 기겁을 했다.
“뭣! 손을 잘라?! 이런 쳐 죽일 잔악한 놈. 아직 젊은 놈이 왜 그리 잔인하냐!”
“그럼 팽가의 신물을 훔쳐간 놈을 멀쩡히 돌려보내야겠나! 목을 자르지 않는 것을 감사히 생각해라!”
“웃기지 마! 죽으면 죽었지, 이 몸의 귀한 손은 절대로 못 줘!”
“좋다!”
팽가의 청년이 크게 인심 쓴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럼 발로 하지!”
“뭣?! 더 안 된다! 이 몸의 발은 천금보다 귀해!”
“그럼 뭘 어쩌자는 거냐!”
“아, 글쎄, 누굴 찾는 건지 몰라도 내가 아니라니까! 왜 자꾸 뭘 자르려고 그래!”
“거짓말 마라! 그럼 날 처음 봤을 때 왜 도망갔나!”
“네놈이 무섭게 생겼으니까 그렇지!”
“내가 하북팽가 출신인 건 또 어떻게 알았고!”
“어……?”
순간, 대나무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던 장씨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그야…… 그런 커다란 대도를 막무가내로 휘두를 만한 인간은 하북팽가 출신밖에 없으니 그렇지!”
“무림천하에 대도를 쓰는 무림인이 팽가 사람뿐이던가!”
팽가의 청년이 양손으로 대로를 붙잡고 자세를 낮췄다.
“마지막 기회다. 셋 셀 때까지 내려와서 신물을 내놓지 않는다면 울타리와 함께 베어 버리겠다.”
“하! ‘예를 들어’ 내가 그 도적놈이라고 치자. 그럼 울타리를 벤다고 해서 날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인간이 새가 아닌 이상 언젠가 바닥에 떨어지겠지. 그 순간 베어 버리면 된다.”
팽가 청년의 목소리는 정말로 진지했다.

―땅에 발을 닿는 순간 베어 버린다.

그럴 수 있는 자신감도 있고, 상대를 베어 버릴 의지도 충분히 갖고 있었다.
“하나!”
“못 내려가!”
“둘!”
“못 내려간다니까!”
“셋!”
단호하게 숫자를 세는 것과 동시에 팽가 청년의 손에 있던 대도가 잿빛의 광채를 흩뿌리려는 찰나,
“잠깐―!”
건소길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쉬이익―!
대도를 휘두른 팽가의 청년도, 대나무 위에서 버티고 있던 장씨도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엇?!”
“으악! 도련님!!”
쾅!
잿빛 광채를 흩뿌리는 대도가 건소길의 새끼발가락 바로 옆을 후려쳤다.
만약 한 치라도 어긋났다면 발가락이 날아갔을 것이다.
건소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청년은 대도를 옆으로 비껴낸 자세 그대로 한참이나 멈춰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마침내 정신을 차린 청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건소길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일단 진정하세요. 여긴 건씨세가입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아무리 팽가에서 온 분이라도 이곳에서 함부로 피를 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에요.”
“…….”
과히 틀린 말이 아닌지라 팽씨세가의 청년이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울타리 위에 올라가 있던 장씨에게는 그 말이 꽤나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훌쩍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건소길을 향해 허리를 굽실거렸다.
“아이고,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제가 결백하다는 것을 어찌 아시고 이리 저의 편을 들어 주십니까?”
“장씨 아저씨 편을 들어 주는 게 아니에요. 중재를 하는 것뿐이죠.”
건소길이 빙글 몸을 돌려서 장씨를 똑바로 응시했다.
쥐상의 얼굴에 얍실하게 기른 콧수염, 두툼한 눈꺼풀 아래에 있는 조그만 눈이 영리하게 데굴데굴 회전하고 있었다.
“아저씨.”
“예, 예! 도련님.”
“이곳에 온 첫날, 제가 아저씨한테 분명히 말했죠. 나쁜 짓을 하면 그에 따른 대가를 받게 될 거라고.”
“아니, 그게……!”
장씨는 더듬거렸다.
“저, 저는…… 나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요, 도련님.”
“그럼 손 이리 줘 봐요.”
“히익!!”
“손, 이리 줘 봐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한다.
그리고 묵묵히 손을 내밀 뿐인데도 장씨는 기겁을 하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마치 손이 닿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한 분위기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아저씨, 물건을 훔쳤어요?”
“…….”
“물.건.을. 훔쳤어요?”
장씨는 목에 칼이 닿아 있는 듯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크윽! 예, 팽가의 신물을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가지고?”
“아니, 훔쳤습니다! 석가장 출신의 공자로 위장해서 친해진 뒤 슬쩍했습니다! 도적놈이 제 버릇 못 버린다고 그만…… 제가 죽일 놈입니다! 도련님!”
장씨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팽가의 청년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이게 무슨……?”
그는 납득이 안 간다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건소길이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자 그제야 장씨가 품속에서 고급스런 비단천으로 둘둘 말린 손바닥만 한 물건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도련님.”
건소길은 그걸 받아서 열어 보았다.
묵직하고 거무튀튀한 철판에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새겨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호신패(五虎神牌)!”
팽가의 청년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게 잃어버리신 물건이 맞아요?”
“맞소! 그게 바로 하북팽가의 신물인 오호신패요!”
“다행이네요. 자, 받으세요.”
건소길이 순순히 건네주자 팽가의 청년은 황급히 칼을 집어넣고 얼떨떨한 얼굴로 받았다.
그는 세심한 눈길로 오호신패를 몇 번이나 살펴본 뒤 다시는 놓칠 수 없다는 듯 품 안에 잘 갈무리했다.
크게 안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양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는 모습이 지극히 공손했다.
“인사가 늦었구려. 나는 하북팽가의 둘째 아들인 팽소뢰라 하오.”
“저는 낙양건씨세가의 건소길이라 합니다.”
건소길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이미 제 소개를 했군요.”
팽소뢰가 건소뢰의 눈언저리를 힐끗 쳐다보는데, 어쩐지 경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건 공자, 일단 정식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소. 공자가 중재를 해 주지 않았더라면 오호신패를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워졌을지 모를 일이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귀영신도의 신법은 일절이라고 하던데, 오늘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소. 정말로 공자가 없었다면 신패를 되찾기는 힘들었을 것이오.”
팽소뢰는 사실을 숨기지도, 남의 공을 깎아내리지도 않는 사내였다.
건소길은 빙긋 웃었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인정해 주면 기분이 나쁠 수가 없다.
“그야 물론이지! 팽가의 느려 터진 신법으로 어떻게 나의 비룡풍운보(飛龍風雲步)를 잡을 것인가!”
“아저씨!”
건소길이 주의를 주자 장씨는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건 공자.”
“예?”
“팽가의 신패를 훔쳐 간 자를 처벌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요.”
팽소뢰는 강건한 눈빛으로 건소길의 뒤에 서 있는 장씨를 쏘아보았다.
팽소뢰도 그리 나이가 많은 청년은 아니다.
기껏해야 건소길보다 한두 살 많을까.
많아 봤자 약관에 불과하단 뜻이다.
그런데도 팽소뢰가 한 번 무서운 표정을 짓자 상당한 위압감이 흘러나온다.
어깨가 부풀어 오르고 키도 더 커진 듯한 모습이다.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소름이 오싹 돋았다.
‘과연, 무림오대세가의 직계라는 거구나.’
건소길은 화내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흥분하지 마시고, 좋게 좋게 해결해요.”
“좋게 좋게라…… 좋소, 나도 같은 정도의 무림인들끼리 얼굴을 붉히는 건 싫으니까. 하지만 건 공자, 그전에 한 가지 묻겠소. 귀영신도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요?”
“…….”
“그가 구대문파의 대부분에게 쫓기는 자라는 건 알고 있소?”
건소길은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장씨가 귀영신도였어요? 그것까진 몰랐네요.”
“몰랐다고?”
팽소뢰가 건소길 뒤에 있는 장씨를 쏘아본다.
그러자 장씨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귀영신도(鬼影神盜) 장일봉. 각 지역 부호의 보물은 물론이고, 거대 문파의 무공 비고를 털어서 사람들의 원한이 하늘 끝까지 닿은 자요. 더군다나 그가 잠입했던 장소 중에는 소림사도 있소!”
“소림사까지? 이야, 장 아저씨가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물론이오! 무공으로는 이존사왕삼괴의 삼괴(三怪)가 유명하지만, 단순히 괴이(怪異)한 걸로 따지면 귀영신도가 항상 수위에 드는 인물이 아니오?”
“물론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죠.”
건소길이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장씨를 쳐다보니, 그는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흐흐, 제가 소싯적에 이름을 좀 날렸습니다, 도련님.”
“휴우.”
그 속없는 모습에 건소길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사태 파악이 좀 되시오, 건 공자?”
“…….”
“나는 이번 일을 아버님께 보고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아버님도 귀영신도가 건씨세가에 식객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오. 결국 무림에 이야기가 흘러가게 될 것이고, 그럼 건씨세가가 곤란해지지 않겠소?”
“으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건 공자의 반응으로 봐서는 저자의 정체를 그동안 모르고 있던 것 아니오?”
“실력이 좋은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라는 것은 알았지만 거기까진 몰랐네요.”
팽소뢰가 건소길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는 건 공자를 믿겠소.”
“…….”
“그러니까 답은 하나요. 이 자리에서 귀영신도를 베는 것. 그럼 그 누구도 추궁받을 필요 없고, 건씨세가에 피해가 갈 일도 없을 거요.”
팽소뢰는 아직 젊은 데도 불구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는 사내였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거고, 어떻게 생각하면 고집불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