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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공자 1권(23화)
7장 호걸(豪傑) 팽소뢰(4)
팽소뢰가 진심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칼을 뽑아 들자 건소길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장일봉이 기겁하며 외쳤다.
“그깟 쇳덩이 좀 잠시 갖고 있었다고 사람을 죽이려 드나? 팽가가 양산박 못지 않은 호걸들의 가문이라더니, 그것도 옛말이구나! 인심 한 번 야박하다, 인심 한 번 야박해!”
“닥쳐라, 도적! 목숨과도 같은 가문의 신물이 겨우 쇳덩이와 같겠나!”
“돌려줬잖아! 그러면 됐지!”
“건씨세가에 피해가 가게 할 수는 없다!”
“끄응, 그건 그렇지만!!”
장일봉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여기서 도망쳐야 할지, 아니면 묵묵히 벌을 받는 게 옳은 일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흐음.”
한편, 건소길은 사색이 된 장일봉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망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예전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는 게 아니라, 건씨세가에 피해가 갈까 봐 저어하는 모습만 봐도 장일봉이 처음과 달리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 아저씨, 많이 변했네.’
잠시 과거를 회상한 건소길은 결국 칼을 빼 든 팽소뢰를 다시 한 번 가로막았다.
“잠시만요!”
“컥!”
말을 거는 시점이 얼마나 절묘한지, 팽소뢰는 막 끌어 올리려던 철혈패왕공이 역류할 뻔하였다.
“또 왜 그러는 거요!”
“팽 공자, 장 아저씨를 살려 주세요.”
“대체 왜?! 건 공자, 이게 다 건씨세가를 위한 일이오!”
“사람을 죽이는 게 세가를 위한 일이 될 수는 없어요.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어요. 누군가의 억울한 목숨을 대가로 이룩한 일은 절대로 오래갈 수 없는 법이라고. 저는 가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억울하게 죽어야만이 유지될 수 있다면 그런 가문은 차라리 없어지는 게 더 나아요.”
“허어?”
팽소뢰는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버렸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진흙탕 싸움이 매일 벌어지는 곳이 바로 무림이다.
영원한 동지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그런 곳에서 가문을 만들고 번영시키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팽가도 마찬가지.
무림오대세가라는 큰 명예를 얻는 데까지 수많은 선조들의 피가 제물로 바쳐졌다.
올바른 일이라면 목숨 걸고 나서서 싸웠고, 때때로는 가문의 이득을 위해 억울한 죽음을 쉬쉬하며 덮기도 했다.
사람의 목숨과 명예조차 값만 맞으면 팔아 버릴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정치다.
아무리 협(俠)을 바탕으로 일어난 가문이라도 규모가 커지면 정치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수천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어쭙잖은 협사 놀이를 한답시고 그 목숨들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팽소뢰는 팽가의 이공자로서 언제든 대공자가 변을 당할 경우를 대비해 어릴 적부터 제왕학을 배워 왔다.
손해(損害)보다는 이득(利得)
감정(感情)보다는 이성(理性).
그에게는 그게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고, 주변에 있는 다른 오대세가의 직계들을 보면 그들 역시 똑같은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건소길의 말은 더더욱 충격적인 팽소뢰였다.
‘뭐? 누군가의 억울한 목숨을 대가로 성공한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맞는 말이지.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순진해. 지나치게 순진한 이야기다. 지금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중에 그 정도로 깨끗한 곳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팽소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작은 문파니까 가능한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건씨세가가 중급 문파 이상으로 커지지 못하는 건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를 일이군.’
멍청한 가훈이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팽소뢰는 어쩐지 건소길이, 아니, 건소길과 건씨세가 전체가 부러워졌다.
철컥.
팽소뢰는 결국 속으로 말할 수 없는 의문에 휩싸인 채 칼을 허리춤의 칼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칼날을 감추자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조금이나마 무뎌지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그의 살기 어린 눈동자는 장일봉에게서 잠시도 벗어나지 않았다.
“건 공자, 아무리 그래도 겨우 도적 하나를 위해 가문의 안위를 위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오. 건 공자는 건씨세가의 유일한 아들이 아니오? 만약 나의 형님이셨다면…….”
“할 수 없죠.”
“……할 수 없죠?”
팽소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보시오, 건 공자! 그렇게 낙천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오! 낙양건씨세가는 정도의 문파. 그런데 구대문파가 쫓는 자를 숨겨 주면 어찌 될 것 같소?”
“가문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 말이죠?”
“당연한 거 아니오!”
팽소뢰가 막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찰나, 건소길의 눈동자에서 영리한 빛이 번뜩였다.
“팽 공자님은 은원을 아는 분이시죠?”
“……무슨 뜻이오?”
팽소뢰가 상체를 조금 뒤로 뺐다.
“전에 시장에서 마차로 저를 들이받을 뻔하셨죠?”
“그, 그건 사고로…….”
“게다가 방금 전에는 그 칼로 저를 거의 벨 뻔하셨구요.”
“……!!”
팽소뢰는 그제야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눈치챘다.
건소길은 그의 잘못을 빌미로 이 사태를 묻으려고 하는 것이다.
“잠깐! 그렇게 따지면 나도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소!”
“뭔데요?”
팽소뢰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으로 건소길의 미간을 가리켰다.
“그 눈!”
“예?”
“그 눈 말이오! 마차 사고가 벌어졌을 때 새카맣게 변했잖소!! 그거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어……?”
이번엔 건소길이 당황했다.
사람을 만나서 검은색으로 변하는 눈.
그건 건소길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제가요? 눈이 검은색으로 변했다구요?”
“그렇소! 마치 염소처럼 흰자위까지 전부 검게 변해 버렸단 말이오! 그리고…… 이건 내가 말하면서도 이상하지만, 그 눈과 마주친 뒤로…… 내가 이상하게 변해 버렸소!”
팽소뢰는 그때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치를 떨었다.
대충 그 말의 의미가 짐작이 간 건소길은 쓰게 웃을 뿐이다.
“뭐가 이상해졌는데요?”
“그게…… 고생을 했소!”
“무슨 고생이요?”
팽소뢰는 마땅히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온갖 이상한 일을 다 당했단 말이오!”
“이상한 일?”
“에잇!”
쿵!
팽소뢰는 표현할 만한 방도가 없어 답답하다는 듯 들고 있던 대도를 바닥에 내려쳤다.
가볍게 내려친 것 같았는데 단단한 돌바닥이 쩍 갈라졌다.
“설명할 방법이 없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니까! 하지만 말이오, 무공을 익힌 내가 멀쩡한 길에서 넘어지질 않나, 튼튼했던 마차 바퀴가 갑자기 내려앉아서 발등을 찧고! 그뿐인가! 하늘에서 떨어진 새똥까지 맞았소!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그걸 다 한꺼번에 당했어요?”
“물론! 그것도 한 시진 내내! 방금 말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당했소! 그 덕분에 만신창이가 되어 객잔에 기어서 들어갔더니 점소이한테는 생전 처음으로 거지 취급을 당했지!”
팽소뢰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 듯 숨을 씨근거렸다.
“근거는 없소.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고, 이건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니까. 그런데 말이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이 모든 게 건 공자랑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단 말이오.”
팽소뢰는 이제 진실을 말해 보라는 듯 당당한 얼굴로 건소길을 바라봤다.
“그러니 남자 대 남자로 솔직하게 한 번 말해 봅시다. 건 공자, 건 공자는 정말로 이 일과 전혀 관련이 없소?”
잠시 간의 침묵 후, 마침내 건소길의 입이 열렸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