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Chapter.1 Unlicensed magician(2)


전장 곳곳에서 거친 숨결이 토해진다.
미친 마법사가 풀어놓은 이계의 마물. 파괴신이라는 이름마저 얻은 마물을 쓰러뜨리기 위한 전쟁.
수없는 패전으로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던 인간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기사, 바실리카의 카이딘마저도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고함을 내질렀다.
라코니아 반도 끝 자락까지 몰렸던 인간들의 마지막 병력. 그들을 이끌고 있기에,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을 절실히 느낀 카이딘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어렵겠어.’
칠만이나 되는 병력을 끌고 나왔다. 그러나 남은 병력은 겨우 이만 칠천. 이대로는 저들을 몰아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마법사만 있었어도 희생을 대폭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파괴신을 불러들인 것이 바로 마법사. 그런 그들을 신뢰할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다섯 차례의 큰 전투에서 승리하고서도 전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지금의 전투도 승리가 눈앞에 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카이딘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그저 눈앞의 적을 쓰러뜨리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던 카이딘의 눈에 얼마 남지 않은 적들이 보였다. 눈앞까지 왔던 승리가 손에 잡히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멸망한 제국의 수도, 알바세테에 틀어박힌 파괴신을 쓰러뜨리는 것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전장을 바라본 카이딘의 동공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어째서!”
구름. 그 짙은 회색 사이에서, 잔혹한 붉은빛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크게 벌려진 입. 날카롭게 깎인 산봉우리 같은 거대한 이빨 사이로 푸른 불꽃이 넘실거렸다.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강철 갑옷도, 20피트나 되는 파이크도 푸른 불꽃을 막지 못했다.
마치 벼락처럼 내리꽂힌 푸른 불꽃이 수천 명이 넘는 병사들을 태워 버렸다. 그마저도 모자랐는지, 아직도 후끈하게 남아 있는 열기가 바닥의 돌을 녹여 용암의 강을 탄생시켰다.
다시 한 번 내리꽂힌 푸른 불꽃.
조금 전의 참상이 재현되었다.
“아, 아아…….”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허탈함. 어째서 저 마물이 파괴신이라 불리는지 명확히 보여 준 푸른 화염.
저런 존재에게 대항하려 했던 자신이 너무도 바보같이 느껴져, 카이딘은 말의 갈기를 붙잡으며 낮게 흐느꼈다.
신은, 어째서 저런 존재를 부르도록 허락하신 건가.
그런 비명을 소리 죽여 내지를 때,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로엔?”
“아직 일만이나 남아 있어.”
“하지만 그거로는…….”
“뒤에 남은 사람들은 백만이 넘어.”
차가운 표정으로, 로엔은 카이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영웅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상, 넌 그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단호한 말. 막 대답을 내뱉으려던 카이딘을 그냥 지나친 로엔은 말문이 막힌 카이딘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뒤는, 맡긴다.”
몇 걸음. 무겁게 발을 내디딘 로엔의 몸에서 하얀빛이 쏟아졌다.
하늘을 뒤덮은 회색 구름 사이에서 푸른 뇌광이 일렁였다. 구름 사이를 유영하던 붉은 존재의 몸이 떨렸다. 아마도 당황한 것 같다고 생각할 무렵, 구름 사이를 맴돌던 푸른 뇌광이 붉은 존재를 향해 내리꽂혔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귀를 막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영혼이 울리는 듯한 소리. 귀가 터질 것만 같다고 생각한 카이딘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 뇌광은 끊이지 않았다. 붉은 거체가 하늘에 있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는 듯이, 뇌광은 붉은 거체를 거칠게 유린하며 기세를 더했다.
귀를 통해 전해지는 고통에 잔뜩 얼굴을 찌푸린 카이딘이 로엔을 바라본 순간, 로엔 역시 고개를 돌려 카이딘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로엔의 입이 열렸다.
‘…….’
그 순간, 구름 사이를 맴돌던 붉은 거체가 추락했다.
거친 파열음. 검붉은 핏물이 터져 나와 붉은 대지를 더욱 붉게 물들였다.
―캬아아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터져 나온 푸른 불꽃.
그것이 로엔의 몸을 지운 순간,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쏟아 내던 로엔의 입이 닫혔다.
쿠르르르…….
천둥을 방불케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발원지는 하늘이 아니었다.
붉은 거체를 짊어진 대지의 비명. 서서히 갈라지던 대지에서 수많은 가지가 뻗어 나왔다.
―캬아아악!
뻗어 나온 가지에서 작은 가지들이 갈라져 나왔다.
거체를 꿰뚫은 바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검붉은 핏물은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세상을 모두 터뜨려 버리려는 듯한 고함도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거체를 파고들던 대지의 창이 그 움직임을 멈췄다.
“아아…….”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곧, 뻗어 나온 대지의 창날에 구속되어 있던 파괴신이 그것들을 부수고 날아오르리라고.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갔다.
잠시 꿈틀거리던 붉은 거체의 움직임이 멎었다.
붉은 피부가 회색으로 변해 갔다. 마치 거대한 조각상처럼, 대지의 창에 꿰뚫린 파괴신의 몸이 싸늘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너무도 거대한 탓이었을까.
그 거체가 완전히 굳어 버린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이후였다.
“하, 하하…… 하하하하…….”
허탈한 웃음을 토해 낸 카이딘의 얼굴은 하루 만에 십 년을 보낸 것처럼 변해 있었다.
전투로 인해 푸석해진 얼굴 탓이 아니다. 지쳐 버린 심신 때문만도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변해 버린 이유는, 그것들이 아닌 다른 것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던 카이딘의 입이 열렸다.
“마법, 마법사…….”
카이딘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간의 일이 머릿속을 스치며, 마지막으로 조금 전에 보았던 장면이 뇌리를 스치고는 사라져 갔다.
마법사.
파괴신을 불러 모든 것을 망쳐 놓은 자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지려 할 때, 다시 희망을 붙잡게 해 준 자.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카이딘의 눈이 석화된 파괴신으로 향했다.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비어 있는 허공. 로엔이 서 있었던 자리였다.

그로부터 5년 뒤인 트리에스테력 1146년.
파괴신을 몰아낸 바실리카의 기사 카이딘은 신생국 아캄의 왕으로 등극했다.

* * *

‘우리나라 건국신화를 이곳에서 들을 줄이야.’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뭔가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어, 류드나르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눈앞의 사내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마법사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소리 지를 것까지는 없는데.’
말 곳곳에 강세를 넣으며 소리 지르는 사내를 본 류드나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그때, 청천벽력 같은 말이 사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네놈들같이 등록되지 않은 무허가 마법사들은 척결 대상이야!”
“에엑!”
‘척결’이라는 단어에 한껏 들어간 강세를 느낀 류드나르는 상체를 조금 물리며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번들거리는 눈매에서 어떤 결의가 느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바짝바짝 침이 말라가는 것을 느낀 류드나르의 목울대가 거칠게 꿈틀거렸다.
긴장. 그것을 느낀 류드나르의 시선이 사내의 입에 머물렀을 때, 멈춰 있던 사내의 입술이 가볍게 열렸다.
“그러나 마지막 기회를 주도록 하지.”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류드나르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사내는 헛기침을 몇 차례 하더니 굳은 의지가 서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만 마르크의 성의만 보인다면 풀어 주도록 하마.”
“이만…… 마르크?”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오른 류드나르의 모습에, 사내는 고뇌하는 듯한 얼굴로 한참을 망설였다.
아무래도 그런 큰돈은 무리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오랫동안 망설이던 사내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에잇, 그럼 오천 마르크 깎아 주마!”
“…….”
큰 선심을 베푼다는 듯이 말한 사내를 바라본 류드나르의 얼굴에 당혹이 감돌았다.
뭔가, 상당히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저, 저기.”
“오오, 그래. 낼 테냐?”
“그런 돈 없는데요.”
“……없어?”
류드나르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사내는 잠시 고뇌하더니 다시 말했다.
“으으. 그럼 일만 마르크는 어떠냐.”
“그것도 없는데요.”
“…….”
사내는 멍한 표정으로 류드나르를 바라보더니 고함을 내질렀다.
“아악! 이런 쓸모없는 놈!”
비명을 방불케 하는 고함을 내지른 사내는 불끈 쥔 두 주먹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 바람에 책상에 금이 가 버렸지만, 사내는 그것도 알지 못한 채 류드나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같은 놈은 그냥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서 화형시켜 버리겠…….”
고함을 지르다 류드나르를 바라본 사내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슬쩍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사내는 차분한 걸음으로 류드나르를 향해 다가갔다. 뭔가 기분 나쁜 느낌을 받은 류드나르는 몸을 움찔했지만,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탓에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린 류드나르의 앞에서 발을 멈춘 사내는, 오른손으로 류드나르의 턱을 붙잡고는 살짝 들어 올렸다.
“흐음.”
‘뭐, 뭐야.’
“콧날도 제법 오뚝하고, 입술이 좀 얇은 게 흠이긴 하지만 이런 취향도 적지 않으니 상관없겠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89점. 뭐, 나쁘지 않군.”
갑자기 불안해진 류드나르는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죠, 그거?”
“자, 결정해라.”
“예?”
류드나르의 눈이 사내를 향했다. 도저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류드나르를 살피던 사내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화형당할 테냐, 아니면 순순히 호스트로 팔릴 테냐!”
“……호스트?”
“그래, 호스트.”
잠시 호스트의 정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류드나르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묶여 있지만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하이킥을 날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너무도 간절해, 자신의 처지마저 망각한 류드나르는 고함을 내질렀다.
“우아아악! 당신, 도대체 뭐야! 왜 당신 같은 사람이 날 심문하는 건데!”
“시끄럽다, 범죄자!”
“당신이 더 범죄자 같아! 아니, 당신 범죄자 맞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야!”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