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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Chapter.2 Master is Indolent Wizard(5)
“두 시간 뒤에 올 테니까, 그때까지 오백 장은 써 놔요.”
“웁, 웁웁!”
아마도 말도 안 된다는 뜻의 반항이겠지만, 단설은 환하게 웃으며 나이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미루지 않으면 될 거 아닙니까.”
어쩐지 암울한 오오라가 단설의 뒤에 서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이델 역시 그것을 느낀 듯,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고지 뭉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단설은 한 번 더 나이델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도무지 안심을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석의 상자에서 밧줄을 꺼냈다.
“우웁! 웁웁!”
“나 나가면 재갈 풀 생각이었죠?”
투덜거리며 밧줄을 들어 올린 단설은 책상에 나이델의 팔을 묶었다. 팔꿈치를 고정시켜 재갈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해 놓은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그것을 보던 류드나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묶어 놓고도 안심을 못한 단설은 계속해서 매듭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던 도중 밧줄의 일부를 잡고 있는 나이델의 손을 보곤 도끼눈을 뜨며 손목을 비틀었다. 웁웁 거리며 반항하던 나이델의 손엔 새빨간 멍이 들었고, 그제야 밧줄을 놓은 나이델을 본 단설은 새로 매듭을 묶어 나이델이 만들어 놓은 여유 공간을 없애 버리고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해 놓으면 도망은 못 가겠지.”
단설은 두 손을 탈탈 털었다.
“그럼 일하고 옵니다.”
반쯤 사무적으로 말한 단설은 류드나르를 향해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류드나르는 단설과 나이델을 번갈아 바라보며 망설이다 단설을 따라 나갔다.
“어디 가는 거야?”
“일하러 간다니까. 못 들었어?”
“무슨 일인데?”
질문을 받은 단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정원 손질.”
“응?”
“정원 손질이라구.”
“정원 손질?”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류드나르는 곧 단설의 말을 이해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저 넓은 정원을 우리 둘이서 손질해야 되는 거야?”
“후우―.”
한숨을 내쉰 단설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응. 한 다섯 달 전까지는 정원사가 있었는데, 재무장관이 우리 놀고먹는 게 눈꼴 시렸다고 해고해 버렸어. 덕분에 우리가 정원 손질까지 하게 된 거고.”
“……그게 뭐야.”
류드나르는 당황 섞인 눈으로 단설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따지려면 재무장관한테 따져!”
움찔하며 물러서는 단설을 본 류드나르는 한층 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고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단설은 작게 투덜거리더니 말했다.
“어, 어쨌든 지금 나가야 돼. 안 그럼 이천 마르크밖에 안 되는 연봉도 삭감된다고.”
그렇게 말한 단설은 집무실 한쪽 구석을 뒤적거렸다.
몇 개의 상자를 들어 내던진 단설은 계속 짜증을 냈다. 그걸 본 류드나르는 아무래도 찾는 물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투덜거리던 단설은 드디어 찾던 물건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들어 류드나르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들어.”
정원 손질에 쓰이는 가위를 받아 든 류드나르는 입을 살짝 벌렸다. 이런 일에 너무도 익숙해 보이는 단설의 모습이 왠지 처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류드나르는 고개를 저었다.
단설은 잠시 류드나르를 빤히 바라보다, ‘별일 아니겠지’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말했다.
“자, 손질하러 가자.”
정원엔 장미가 가득 피어 있었다. 처음엔 진한 장미향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코가 마비되었는지 아무 냄새도 느낄 수 없었다.
꽤 오랜 시간동안 삐져나온 잔가지를 쳐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왕성 정원이 넓었던 것이다.
가위를 든 채 잔가지를 쳐내던 단설은 허리를 쭉 폈다. 장시간의 노동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내가 왜 이런 잡일을 해야 되는 거야…….”
가위를 내려놓고 한숨을 푹푹 내쉰 단설은 류드나르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이런 쪽에 흥미가 있는지, 류드나르는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열심히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잔가지들을 쳐내던 류드나르는 고개를 돌려 단설을 바라보았다.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단설은 움찔하며 가위를 들어 올렸다.
“하, 하면 되잖아!”
“저 사람 누구야?”
“응?”
잔가지에 가위를 가져가던 단설은 뜬금없는 말에 놀라며 류드나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앗! 체스트 씨!”
단설은 무의식적으로 고함을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체스트라 불린 사내는 단설을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아, 단설 군.”
“여긴 또 뭐 하러 온 겁니까.”
단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체스트를 바라보았고, 단설의 시선을 느낀 체스트는 별 기대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델 공 있나?”
“지금 원고 쓰고 있을걸요.”
“정말인가!”
사내의 표정엔 불신이 서려 있었다. 단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표정은 이해가 간다는 심정을 담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단설을 본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단설은 가슴을 쭉 펴며 당당히 말했다.
“도망 못 가게 묶어 놨거든요.”
“오오!”
체스트는 감격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뭔가를 떠올린 그는 단설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런데 단설 군이 여기 있으면 누가 감시하는 건가?”
“그야 아무도 없…….”
“이런!”
체스트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왕성 안으로 마구 내달렸다.
“왜 저러지?”
“글쎄.”
은근슬쩍 가위를 내려놓은 단설은 머리를 긁었다. 그러다 갑자기 왕성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설마?!”
“응?”
류드나르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단설은 체스트와 마찬가지로 왕성 안을 향해 달려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잔가지를 쳐내던 류드나르는 곧 가위를 내려놓고 그들을 따라갔다.
“으으…….”
집무실에 도착한 류드나르가 본 것은 허무한 표정을 지은 체스트와 몸을 부르르 떠는 단설의 모습이었다.
왠지 이상한 느낌에 의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 류드나르는 쩌억 입을 벌렸다. 나이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설이 그렇게나 꼼꼼하게 확인을 했는데도 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류드나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단설을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단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체스트의 목소리가 류드나르의 귀를 파고들었다.
“또 도망쳤군.”
체스트는 품속에서 껌을 꺼내 질겅질겅 씹어 댔다.
“웬 껌이에요?”
“금연 중이거든.”
신경질적으로 껌을 씹는 체스트는 주인이 사라진 의자를 향해 걸었다.
의자의 손 받이엔 다섯 번 휘감긴 밧줄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러나 책상과 연결되어 있던 부분은 불규칙한 단면을 보이며 끊어져 있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체스트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펜촉으로 밧줄을 끊고 도망갔구만. 이거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한 근성이야.”
“지금이 감탄할 땝니까.”
단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체스트는 담담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몇 년이나 미룬 원고, 좀 더 미뤄진다고 달라질 거 있나.”
책상 위에 놓인 원고지 하나를 집어 들어 껌을 뱉은 체스트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난 단설 군만 믿고 가네.”
“아아악!”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간 체스트를 보던 단설은 털썩 주저앉았다.
“또 어디로 도망간 거냐아아아!”
엎드린 채 바닥을 긁던 단설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 단설의 눈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느낌에 몸을 움찔한 류드나르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단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고는 부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이놈의 마스터! 잡히기만 해!”
“이봐…….”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입장이 완전히 바뀐 것 아니냐는 말을 하려던 류드나르는 입을 다물었다. 히죽히죽 웃고 있는 단설의 얼굴에선 광기마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웃던 단설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구석에 놓인 항아리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들고는 키득거렸다.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 둔 게 있었지.”
“응?”
“에잇, 마스터! 내 원한을 받아라아!”
단설은 한껏 소리 지르며 두루마리를 찢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단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고, 류드나르는 두 조각으로 찢긴 두루마리를 들어 보았다.
‘에?’
찢긴 두루마리 구석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류드나르는 두루마리를 눈 가까이 갖다 대었다. 그러자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냈고, 류드나르는 무의식적으로 그 글자를 읽어 갔다.
“내가 이런 것도 모를 줄 알았냐?”
“뭐야!”
“아니, 그게 아니라…….”
류드나르는 흥분한 단설에게 두루마리를 보여 주었다. 주먹을 들어 올렸던 단설은 류드나르가 내민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는 그것을 읽었다.
아마도 나이델이 적어 놓았을 글을 읽은 단설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소리 질렀다.
“아아악!”
한껏 소리를 내지른 단설은 입에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류드나르는 당황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류드나르는 두어 번 고개를 내젓고는 쓰러진 단설이 쥐고 있는 찢어진 두루마리를 빼내 그 둘을 서로 맞춰 보았다.
“…….”
류드나르는 고개를 돌려 쓰러진 단설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단설은 이 두루마리를 찢으면 나이델의 옷에 불이 붙도록 해 놓았다. 그러나 단설보다 몇 수 위의 마법사인 나이델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뭐, 그래도 덕분에 주문 하나 외웠네.”
두루마리 속에서 불꽃을 일으키는 주문을 발견한 류드나르는 그것을 조용히 외워 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서 성냥불만 한 불꽃이 화악 일었다 사그라졌다.
“어라?”
왠지 모를 이상한 느낌을 받은 류드나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류드나르는 나이델의 책장 옆에 놓인 상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열어 한참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제 보았던 책은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한데…….”
“으으, 이놈의 마스터…….”
살짝 표정을 찌푸렸던 류드나르의 귀에 단설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이마를 짚은 채 몸을 일으키는 단설이 보였다. 단설은 한동안 고개를 마구 흔들었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 힘겹게 일어섰다.
한참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단설은 부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안 되겠어. 이번에 잡으면 소환수라도 한 마리 붙여 놔야지.”
“소환술도 쓸 줄 알아?”
“몰라.”
단설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참에 소환 주문 하나 익히지, 뭐. 어차피 주문 하나만 외우면 되는 건데 뭐가 문제야?”
“……소환 주문이 그렇게 구하기 쉬운 거였냐.”
“저 구석 어디에 있을걸?”
단설은 손가락을 들어 조금 전까지 류드나르가 뒤지고 있던 상자 더미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