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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Chapter.2 Master is Indolent Wizard(6)


“정말?”
“뭐, 메롱법사라고는 해도 마법만은 이 나라 최고 중 하나니까. 드래곤 소환 같은 얼토당토않은 주문이야 없겠지만, 적어도 레서 데몬이나 헬하운드 같은 걸 소환할 수 있는 주문은 한두 개 정도 가지고 있을 거야.”
“메롱법사?”
“그런 게 있어.”
그렇게 말한 단설은 푸욱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왠지 더는 묻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류드나르는 단설이 가리킨 상자를 뒤적였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래도 상자를 오랫동안 열어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콜록거리며 한참 동안 상자를 뒤적거린 류드나르는 적갈색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들었다. 소환 주문이 적힌 두루마리였다.
“……이거 뭐 이렇게 복잡해?”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이 적힌 두루마리를 본 류드나르는 입을 쩍 벌렸다. 적어도 2만 자는 넘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거 정말 외우라고 만든 주문이야?”
류드나르는 그렇게 말하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단설은 그게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제일 힘든 게 소환 주문이잖아. 아마 난이도는 운석 낙하하고 비슷할걸?”
“라이팅은 겨우 한 줄인데?”
“그거야 초급 주문이니까 그렇지. 뭐, 저 소환술도 익숙해지면 주문을 다 외울 필요는 없겠지만 말야.”
그렇게 말한 단설은 류드나르가 든 두루마리를 빼앗듯 가져가 손에 들었다.
“휘유, 이거 외우려면 머리깨나 아프겠는데.”
“그냥 보고 하면 되잖아.”
“아, 그렇지.”
단설은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말아 품속에 넣었다.
가슴께를 툭툭 쳐 두루마리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단설은 몸을 돌리며 이를 갈았다. 다시 나이델에 대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놈의 메롱법사를 빨리 잡아서…….”
“그런데 아까 그거, 뭘 소환하는 거야?”
“글쎄.”
고개를 갸웃거린 단설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곧 손을 빼낸 단설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길어서 보기 싫다.”
“…….”
“그나저나 이놈의 메롱법사, 도대체 어디 숨은 거냐!”
또 한 번 분개한 단설의 눈이 사방을 훑었지만, 당연히 나이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설은 부드득 이를 갈고는 주먹을 쥐며 말했다.
“왕성 안에 없으면 갈 곳이야 뻔하지.”
“응?”
“좋아! 잡으러 가는 거다!”
단설은 의욕이 넘치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마스터 잡으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도서관 청소를 미루는 거야!”
“결국 땡땡이칠 수 있게 돼서 좋다는 거였어?”
“에, 에잇. 아무렴 어때!”
버럭 소리를 지른 단설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방이어서인지 부근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단설은 류드나르를 향해 손짓했다.
“자, 가자.”

* * *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거대한 공동(空洞)을 울렸다.
어스름한 빛이 사방을 밝혔다. 진녹색 물이끼가 호숫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정체 모를 무언가가 빛을 향해 다가왔다 흩어져 갔다.
또각, 또각.
굽 높은 구두가 물이끼 낀 바위를 밟고 지나갔다.
발소리의 주인이 짧은 말 몇 마디를 토해 내었다. 청백색 광구(光球)가 그의 손에서 나타나 빛을 발했다.
떠오른 광구가 공동을 밝혔다.
드넓은 호수가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었다. 족히 작은 성 하나는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넓은 호수. 그 앞에 선 흑색 인영(人影)은 몸을 굽혀 호숫물 속에 손을 넣었다.
우유를 풀어 넣은 것처럼 탁한 잿빛. 그 물을 두 손 가득 떠 올린 그의 눈이 호수 중앙으로 향했다.
한동안 호수 중앙을 바라보던 그는 입을 열었다.
“…….”
작은 목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작게만 들리던 소리가 조금씩 커져 갔다. 두 손에 고였던 물이 모두 아래로 떨어질 무렵엔 공동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졌고, 그 소리는 은은한 진동을 일으켜, 잔잔하던 호수는 격한 파랑(波浪)에 몸을 떨었다.
갑자기, 그 소리가 멎었다.
입을 다문 흑색 인영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잿빛 물방울이 맺혀 있어야 할 손바닥에 자리 잡은 것은, 누구도 부인치 못할 붉은 핏물이었다.
“이제…….”
피에 절은 두 손을 들어 올린 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는, 두 손을 잿빛 호수에 집어넣었다.
탁한 잿빛을 머금고 있던 호수가 붉게 변했다. 그 안에서 헤엄치던 것들은 갑자기 변해 버린 호수에 적응하기 힘든지 자꾸만 몸을 뒤틀어 댔다. 그 바람에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호수 위 종유석에 닿았고, 그 종유석들은 급격히 녹아들어 가더니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호수 속으로 빠져 들었다.
호수 전체가 붉게 변했다. 그러자 갑자기 호숫물이 끓어올랐다.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끓어오르던 호수의 움직임이 멎었다.
호수는 다시 잿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헤엄치던 것들은 어딘지 모르게 변해 있었다.
그것들은 호숫가를 향해 빠르게 헤엄쳤다. 수십, 수백…… 만 단위를 훌쩍 넘은 그것들은, 수면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수면 밖을 향해 몸을 내밀었다.
흑색 인영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머물렀다.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호수 안을 헤엄치던 것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폭발적인 속도로 몸을 일으켰다.
차분히 그것을 지켜보던 흑색 인영은 몸을 돌렸다.

* * *

“우아아악!”
“갚을래, 안 갚을래?”
“자, 잠깐만! 이것 좀 놓고 말해!”
“시끄러워!”
버럭 고함을 내지른 스티아는 단설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백오십 마르크 갚기 전엔 도망갈 생각 하지 마.”
“우아아악!”
버둥거리며 손을 마구 휘젓던 단설은 류드나르를 향해 도와 달라는 뜻이 담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류드나르는 슬쩍 고개를 돌려 단설을 외면했다. 배신감을 느낀 단설은 류드나르를 노려보았지만, 또다시 양 볼에서 느껴진 통증에 스티아를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이, 이거 놔아아아!”
“백오십 마르크. 내∼놔.”
“아아악!”
“하아―.”
테이블에 앉아 홍차를 쭈욱 들이켠 류드나르는 숨을 토해 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건지.’
절레절레 고갯짓을 한 류드나르는 다시 단설과 스티아를 바라보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델이 있을 곳이야 뻔하다며 이곳으로 달려온 단설은 스티아에게 붙잡혀 저렇게 두 볼을 꼬집힌 채 버둥거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자, 잠깐만! 마스터 잡으면 줄게!”
“도망가려고?”
“아악! 우리 예산은 전부 마스터가 가지고 있단 말야!”
눈물을 찔끔 내보인 단설은 항변했다. 그 말을 들은 스티아는 ‘흐음’이라는 의미 없는 소리를 내뱉고는 단설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
“아악!”
단설의 볼을 쭈욱 늘어뜨린 스티아는 갑자기 손을 놓고는, 얼얼해진 볼을 문지르는 단설에게 말했다.
“아저씨는 너희들 오기 삼십 분 전에 도망갔어.”
“응?”
“열흘 치 식량 싸 들고 도망갔다구.”
“…….”
할 말을 잃은 단설은 스티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르비크 지부로 간다고 했어. 한 열흘쯤 있다 돌아온다고 하던데?”
“이놈의 마스터를 그냥!”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소리 지르는 단설의 모습에, 스티아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냥 뭐?”
“에휴―.”
푸욱 한숨을 내쉰 단설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갈게. 마스터 오면 연락 좀…… 아악!”
“어딜 은근슬쩍 빠져나가려고?”
“이, 이거 놔!”
“백오십 마르크 내놔.”
“아아악!”

토끼 눈처럼 빨개진 볼을 문지른 단설은 툴툴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류드나르는 그런 단설을 보며 눈앞의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단설은 그 모습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거 뭐야?”
“스티아 씨가 준 거. 먹을래?”
단설은 잠시 류드나르가 내민 주머니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보나마나 유통기한 지난 거겠지. 안 먹어.”
“뭐 어때. 맛있는데.”
초코칩 쿠키를 꺼낸 류드나르는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단설은 다시 볼을 문지르며 말했다.
“으으, 쫓아갈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갈 줄이야.”
“왜 못 쫓아가는데?”
“우린 수도를 못 벗어나니까 그렇지. 허락 안 받고 빠져나가면 사형이야.”
“으엑?”
사형이라는 말을 들은 류드나르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럼 늙어 죽을 때까지 이 도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냐는 표정을 지은 류드나르는 단설을 바라보았고, 단설은 그것을 느끼고는 푹 하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괜찮아. 의무 복무 기간만 채우면 되니까.”
“의무 복무 기간?”
“지난번에 5년 동안 연봉 이천 마르크 받으면서 일해야 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난 4년, 넌 5년 더 여기서 일해야 된다구.”
“난 또…….”
‘평생 이런 곳에서 일해야 되는 줄 알았잖아’라고 중얼거린 류드나르는 다시 쿠키를 입에 물고는 단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5년만 일하면 돼?”
단설은 류드나르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너 말이야, 참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구나.”
“응?”
“난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는데 말야.”
푸욱 한숨을 내쉰 단설은 천장을 바라보며 말을 토해 냈다.
“마스터는 허구한 날 메롱질이지, 그나마 남아 있던 선배들은 전부 풀려나거나 다른 곳으로 영업 나갔지, 그래서 남은 건 나 혼자인데 마스터는 계속 메롱이고, 편집장들은 애꿎은 날 볶아 대고!”
“저기, 메롱이 뭘 말하는 건데?”
“우아아악! 이놈의 마스터, 잡히기만 해 봐!”
류드나르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은 채, 단설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댔다.
그런 모습을 보던 류드나르는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는 단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죽 쌓인 게 많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라?”
쿠키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류드나르는 주머니가 비었다는 것을 확인하곤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다시 단설의 고함이 들려왔다.
“이게 다 로베르 그놈 때문이야!”
“하아―.”
또다시 로베르 후작에 대한 성토를 늘어놓는 단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류드나르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방 한구석에 쌓여 있는 마법서들이라도 읽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니까…… 아, 이게 좋겠다.”
‘흑마법 개요’라고 적힌 책을 꺼내 든 류드나르는 차분한 표정으로 책을 읽어 나갔다.
책 넘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본 단설은 흥미를 느끼고는 류드나르가 읽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제목에서 흑마법이라는 단어를 발견한 단설은 눈살을 찌푸리며 뭔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류드나르가 그 책에 깊이 빠져 있어, 단설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는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