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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19화)
Chapter 6 황궁의 암투(4)
이퀼라스는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확실히 못을 박았다.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혹시 딴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뉘앙스를 풍긴 것이다.
“현재 대공의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는 타국의 세력과 손을 잡을 수도 있으며 또는…….”
잠시 중얼거리던 이퀼라스는 여러 공작들과 화족들을 보며 말했다.
“제국 내부의 또 다른 동조자의 도움을 받아 반격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제국을 향한 우리의 충정은 영원합니다.”
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퀼라스가 다른 이들을 모조리 의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일곱 가문의 대표자들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브레도 대공, 어디 숨은 거냐.’
그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뭐, 당장 내일이라도 브레도 대공의 행방을 찾고 그를 압송하거나 확실히 목을 베어 버려 가져올 수 있다면 비상사태는 종결될 테니까.’
비상계엄의 약속된 기간은 한 달이었다. 한 달 정도라면 상관없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잠시 숨을 죽여도 괜찮았다. 그리고 한 달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며칠 내로 브레도 대공만 해결된다면 비상사태는 끝날 터였다.
뇌격 기사단의 경우는 그 이후에도 이퀼라스가 위험한 상황이라 주장한다면 그들의 권한이 유지되겠지만 이 부분은 대공에 대한 문제만 해결되면 조치가 가능할 것 같았다.
“황태자전하의 현명한 조치를 따르겠습니다.”
공작 가문에서 동의를 하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두 만장일치로 가결된 것이다.
이퀼라스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행정관은 모든 권한을 비상사태로 전환시키는 조치를 하기 바라오. 기간은 한 달. 다만 반역자의 행방을 그때까지도 알 수 없다면 그 기간은 연장될 수 있소.”
이퀼라스가 다시 한 번 말을 꺼내자 모든 귀족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비상사태가 한 달 이상 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갑자기 죽고 황실의 계승자가 그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는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브레도 대공은 이제 끝이었다. 더구나 제국의 일곱 가문도 여전히 정통성이 유지되는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일곱 가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공을 지지한다면 당장이라도 바뀔 수 있겠지만 그들이 굳이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할 리는 만무했다.
일곱 가문이 제국에서 지지를 받는 것도 언제나 제국의 정통성을 지키며 이끌어 가는 기둥이라는 인식 덕분이었다. 설사 가식적인 것이라도 그들이 그런 것을 포기할 리는 만무했다.
“그럼 나머지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제국 행정재무관 파뮤란이 몸을 일으켰다. 그 외 몇 가지 관련된 나머지 보고를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퀼라스는 이제 할 말 다 했다는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다른 보고는 집무실로 가져오기 바랍니다. 그럼 나는 비상사태 선포를 확인하였고 뇌격 기사단의 존재를 각인시켰으니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퀼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다른 이들은 한발 늦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낙 이퀼라스의 몸이 빨랐기에 일어나는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쿠웅.
“황태자전하께서 퇴청하셨습니다.”
문이 닫힌 후 시종의 낭랑한 목소리가 끝나고 나서야 귀족들은 참았던 숨을 다시 내쉴 수 있었다.
“황태자전하 많이 변하셨군요.”
“다른 사람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어쨌든 앞으로 한 달간은 바쁠 것 같네요.”
“우리가 바쁠 것이 있나요. 어차피 뒷마무리밖에 남지 않은 일인데.”
“그래도 브레도 대공이 정말로 타 왕국의 힘을 끌어들이거나 하면 매우 곤란합니다. 서쪽에서 변란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몇몇은 꽤 큰 전란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팽배해 있었다. 하지만 다수의 귀족들은 오히려 너무나 태평한 모습을 보였다.
어차피 그들은 새롭게 황위에 등극한 자에게 충성을 다하면 그만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 제국의 모든 행정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설사 어떤 자가 황제에 등극하더라도 그들을 모두 배제하고는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
운이 좋게도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이퀼라스는 뇌격 기사단이라는 마지막 패가 있었고 그로 인해 브레도 대공은 지난 3년간 준비했던 것을 모두 날려 버린 것이다.
이미 황태자가 무사히 이곳에 등장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게임은 거의 끝난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허술하게 준비한 브레도 대공을 속으로 비웃었다.
“황태자 한 명만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다못해 별동대로 움직일 자들도 준비하지 않았나 보군요.”
황태자 제거가 실패했다면 대공으로서는 즉각 별동대를 움직여 황실이라도 장악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마 지금쯤 오늘 집회를 소집한 것은 브레도 대공이 됐을 터였다. 그리고 상황을 보아 귀족들은 브레도 대공과 이퀼라스를 앞에 두고 저울질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잘된 일이죠. 만약 애매모호하게 일이 돼 버렸으면 더욱 고민되었을 것입니다.”
속삭이며 귀족들이 이야길 나누었다.
이미 황실에 대한 권위는 떨어진 상태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황제는 제국을 이끌어 가는 정신적 구심점 그 이상의 존재가 되지 못했다.
만약 황제가 죽고 황실의 가계가 끊어진다면 제국이 분열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Chapter 7 마샬 아트(1)
“후아악. 하악.”
“잘했다.”
“하악. 그래요? 후욱.”
집무실로 돌아온 이퀼라스는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며 몸을 쭉 뻗었다.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카이젠이 가르쳐 준 대로 조치를 취하긴 했으나 말을 하는 순간순간마다 너무 떨렸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실수하지 않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회의장에서는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지만 실상 속으로는 엄청 떨었던 것이다.
“앞으로 한 달간은 뇌격 기사단이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겠지요?”
이퀼라스가 눈을 반짝이며 카이젠을 바라보았다. 과연 자신이 제대로 일처리를 했는지 확인하였고 카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퀼라스가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보게 된 것은 제국 행정 전반에 대한 자료를 쭉 훑어보던 카이젠의 어이없어 하는 모습이었다.
이퀼라스가 깨어나기가 무섭게 카이젠은 이퀼라스에게 말했다. 이미 제국은 분열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황제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라고.
절대 황권을 유지하던 카이젠의 눈에 귀족들의 영향력에 휩쓸려 다니는 제국이란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없는 법이었는데 이것은 태양 아래 태양들이 줄줄이 서 있는 상황. 그야말로 오랜 평화시대이기에 가능했던 통치였다.
이퀼라스로서는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을 카이젠이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하니 자신이 얼마나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름대로 꽤 많이 생각하고 노력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정해진 원 안을 빙빙 돈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후 카이젠은 몇 가지 지시를 내렸고 이퀼라스는 실수하지 않고 그가 지시한 대로 귀족들과의 회의에서 명령을 내렸다.
“그럼 앞으론 어떻게 할 거죠? 숙부를 따르는 자들이 분명 아직도 황궁에 있습니다.”
쉴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공이 죽어서 잠시 그들이 행동을 머뭇거리고 있지만 이곳 황궁에는 숙부를 따르는 자들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대공의 영지에서 온 자들은 당연한 것이고 나머지 대공에게 포섭된 자들은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초조해 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미 대공의 직속 부하들은 모조리 모습을 감춘 모양이더군요.”
“그래. 바보들이 아닌 이상 거사가 실패했다고 느낀 순간 태양 아래에서 고개를 내미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지. 아마도 자신들의 소굴로 빨리 돌아가고픈 마음밖에 없을 거야. 아니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난동을 피우거나.”
이미 카이젠의 조작으로 인해 그들은 황궁 내의 비밀 아지트에 숨은 상태였다. 적어도 오늘 하루 동안은 그들의 발을 붙잡을 수 있었다.
“으음. 최대한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추가적인 소란이 벌어지면 곤란합니다.”
황가가 둘로 나뉘어 싸우는 모습은 결코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이퀼라스는 카이젠이 손을 썼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대공의 잔당이 벌일 난동을 걱정하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집무실에 와 있는 것도 그들이 일을 벌일까 봐 걱정되어 취한 조치였다.
그때 카이젠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오늘 하루.”
“예?”
갑자기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카이젠을 바라보며 이퀼라스가 무슨 말인지 물었다.
“나는 바쁜 사람이다. 그런 녀석들과 투닥거리며 놀아 줄 시간이 없어.”
“그게 무슨?”
“대공을 따르는 녀석들은 오늘 하루 끝장내 주지. 그리고 그 다음.”
이번에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렸다. 이퀼라스의 질문을 받아 줄 시간은 없다는 표정.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퀼라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카이젠이 웃으며 말했다.
“감히 주제를 모르고 주인을 물려고 하는 개들을 처단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주인을 몰라보고 물려고 하는 개?”
잠시 카이젠이 말하는 것이 누구인지 생각하던 이퀼라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다이제스 제국과 싸우겠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럼 이제 제가 할 일은 무엇이죠?”
이퀼라스의 질문에 카이젠은 짤막하게 말했다.
“담대하게 말하는 목소리 연습을 하고 있어.”
은막의 배우가 연극을 잘해야 매니저가 편한 법이었다. 카이젠은 그 말을 남긴 채 밖으로 나섰다.
이미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권한은 기한부로 뇌격 기사단에 넘어온 상태.
기왕에 움직일 바에는 그냥 움직이는 것보다는 권력을 등에 업고 움직이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카이젠은 익히 알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뭐.”
카이젠이 중얼거렸다. 잠시만 기다리면 뇌격 기사단이란 신분과 권한을 증명하는 제국의 인증서를 행정관이 곧 이곳으로 가져올 것이다.
* * *
이퀼라스가 긴급 어전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집무실로 이동할 때 이윽고 당황한 표정의 행정관이 뛰어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카이젠이 천천히 물어보니 그는 뇌격 기사단의 인원수에 맞춰 신분 패를 작성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느린 행정업무와 비교하면 너무나 빠른 일 처리였다.
카이젠은 그것이 뇌격 기사단의 실체를 하나씩 파악해 나가기 위한 조치라 생각했지만 굳이 손해 볼 일은 아니었기에 모두 7개의 패를 요청했다.
생각보다 너무나 적은 개수에 행정관은 조금 의아해 했지만 적으면 적을수록 자신이 처리할 일이 적어 좋다는 생각에 곧 집무실로 가져오겠다는 말과 함께 돌아갔다.
‘아마도 패의 숫자로 뇌격 기사단원의 수가 몇 명인지부터 파악하려 했겠지. 하지만 사실 아직 그것을 다 채우지 못한 상태이긴 하지.’
일곱 개도 너무 많았다.
당장 일을 처리하려면 3개만 있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굳이 현재의 인원수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일단 받아 두고 나중에 인원수를 늘리면 될 것이기 때문.
카이젠이 잠시 행정관을 기다리는 사이 옆에 서 있던 카투가 심심한 듯 발을 또각거렸다. 그러자 카이젠이 나직하게 주의를 줬다.
“누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바르게 서 있어라.”
우뚝.
카이젠이 지적하자 카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리를 모으며 긴장한 자세로 변했다. 그때 누군가가 복도 끝에서 나타났다.
“빠르군.”
어느새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나이에 비해 빠른 나이에 출세하여 이곳에 들어온 것 같았다. 가문도 좋고 실력도 좋아야 가능한 일.
“카이젠 경.”
그가 정중한 태도로 카이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이미 카이젠의 이름은 황실 행정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상당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황태자의 전권을 위임받은 뇌격 기사단의 단장 카이젠을 모른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구보다도 권력과 가까우며 그것의 향방을 주시하는 자들이 황실의 행정관들이었다.
“저는 파우스트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뇌격 기사단 단장인 카이젠 경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황태자전하의 칙명으로…….”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파우스트의 말을 카이젠이 끊었다.
“빠르군. 일 처리가 마음에 들어.”
괴물 가면 사이로 카이젠의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오자 파우스트는 흠칫했다. 가면이 움직이면서 말을 하는 것이 흡사 실제 사람이 입술을 움직이며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이리 주도록.”
자연스럽게 하대가 흘러나왔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와 가면 때문에 파우스트는 움찔하며 자신이 가져온 패를 넘겼다.
“일곱 개 모두 맞군. 단장인 나의 패는 색깔이 조금 다른 이것인가?”
“그렇습니다.”
다른 패들은 푸른색이었지만 한 개의 패만 붉은색이었다. 그 색깔이 마음에 드는지 카이젠은 패를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