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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이젠 1(20화)
Chapter 7 마샬 아트(2)
“여기 받아라. 잘 챙기고.”
행정관에게서 일곱 개의 패를 취한 카이젠은 그중 한 개를 카투에게 건넸다. 그러자 카투는 아무런 말 없이 그것을 챙겼다.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카이젠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 후보생인 네 녀석에게 이 패는 임시적인 것이라 생각해라. 이곳을 잘 막고 있으면 네 녀석을 정식 기사단원으로 승급시켜 주지. 죽을 각오로 이곳을 지켜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문을 지키란 말에 카투는 뜨끔했다. 카이젠의 음성이 너무나 사나웠던 것이다.
“그럼 이만 가 봐.”
카이젠은 손을 까닥거리며 파우스트에게 말했다.
그러자 파우스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비록 고위 기사라 할지라도 황실의 행정관에게 이렇게 무례한 단어를 쓰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는 기사. 행정관은 행정관. 각자의 영역이 달랐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행정관들이 괜히 업무 수행을 지연시키거나 절차 등을 이유로 트러블을 일으키면 기사들도 귀찮았기에 가능한 그들을 존중해 주었다.
이번 일처럼 그가 빠르게 움직인 것도 물론 황태자가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이기도 했고 윗선에서도 빠르게 일 처리를 하라고 독촉하긴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파우스트로서도 이번 일을 맡게 된 것을 기회로 나름대로 숨겨진 기사단이란 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카이젠은 너무나 퉁명스럽게 그를 내친 것이다.
‘눈치 없는 놈.’
파우스트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건방진. 황태자의 직속 기사라고 지금 위세를 떠는 건가?’
고개를 돌린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자신의 인명록에서 카이젠의 이름 옆에 칼을 그려 넣었다.
앞으로 최대한 비협조적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파벌에 속해 있는 다른 행정관들도 마찬가지가 될 터였다.
‘얼마나 황실의 일 처리가 깐깐한 것인지 느껴 봐라. 나중 되면 그제야 기어 오겠지.’
자신들이 손을 놓으면 기사단원들의 업무 처리가 막힌다는 것을 카이젠에게 조만간 각인시키리라 생각하며 젊은 행정관 파우스트는 재빨리 돌아갔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지금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자 앞에서 재롱을 떠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나중의 이야기.
“어디로 가시나요?”
카이젠이 움직이려 하자 카투가 궁금한 듯 물어보았다.
“어젯밤 잡은 쥐새끼의 새끼를 잡으러.”
그 말과 함께 카이젠의 몸이 홀연히 사라졌다. 카투가 눈을 깜박거리는 사이에 카이젠의 몸은 어느새 복도 끝으로 이동해 있었다. 너무나 빠른 움직임에 카투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와. 뭐가 저리 빨라. 언제 움직인 거지?”
“이 녀석, 어디 한눈팔고 있어.”
“아얏. 할아범은 또 언제 왔어요?”
카투는 누가 자신의 옆구리를 치자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알론소가 있었다. 그도 자신같이 뇌격 기사단의 마크가 박혀 있는 검은색 갑옷에 귀신 가면을 쓰고 있었다.
“교대다. 잠시 쉬어라.”
“할아범이 들어가세요. 저는 끄떡없습니다.”
“네 녀석, 먹지도 싸지도 않을 거냐? 교대시간은 십 분이다. 그사이에 일 다 봐라.”
딱 십 분 교대해 주겠다는 알론소의 말에 카투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사람이 십 분 만에 그걸 어찌 다 봐요.”
“구 분 남았다.”
알론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투는 옆에 마련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호위 기사들의 대기실이었다.
카투가 사라지자 가면 사이로 알론소의 안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 서 있었던 카투와는 다른 진득한 살기였다.
만약 이곳을 함부로 범접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척살하겠다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 * *
“그러니까 말이야. 나 어제 유령을 봤다니까.”
“뭐? 유령? 그런 게 어디 있어?”
시녀 둘이 커다란 빨래 바구니를 든 채 조잘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날씨도 화창하고 햇살도 따사했다. 오늘 같은 날은 잔뜩 쌓여 있는 빨래들을 말리기 좋은 날이었다.
어젯밤 황실에 어떤 변고가 있었는지는 그녀들이 알 바 아니었다.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지만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시녀장님이 정해 준 일과표에 따라 오늘 하루를 실수 없이 그대로 움직이면 될 터였다.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이 무슨 일을 벌이든지 간에 자신들의 안위만 무사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궁이란 곳은 항상 심심한 곳. 시녀들은 자신이 겪은 신기한 일들을 이야기 나누곤 했다.
“서쪽의 별궁에서 분명히 희멀건 것들이 움직였다니까. 밤에 보고 놀랐어. 근데 다시 보니 안 보이더라. 보이다가 갑자기 안 보이면 그게 귀신이지.”
유령, 귀신 이야기는 황궁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윗선에서는 허튼소리라고 치부했지만 이곳이 원래 많은 사람들이 은밀히 움직이는 곳이었기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런 잡담이 시녀들에게 있어서는 바쁜 일과 도중에 놀 수 있는 하나의 유희거리이기도 했다.
“네가 헛것을 봤나 보지. 그리고 거긴 원래 좀 으스스했잖아. 이제 쓰지 않는 곳이라 창고로 쓴 지 벌써 수년째인데. 괜히 허튼소리 하다가 시녀장님한테 혼나지 말고.”
“말은 그렇게 해도 너 무섭지?”
휘익.
“엇?”
“뭐지?”
그때 순간 바람이 불어 시녀들의 뺨을 간질였다. 무언가 휙 지나간 듯한 느낌에 마침 유령 이야기를 하고 있던 두 여자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두리번두리번.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 네가 이상한 이야기 해서 기분이 이상하잖아.”
“으응. 빨리 가자.”
해가 뜬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기분이 풀리지 않아 시녀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았다. 언제나 황궁은 일거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스르륵.
시녀들이 자리를 떠나자 건너편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서쪽의 별궁이라. 대공의 잔당이 모여 있는 곳이군.”
나타난 자는 카이젠. 그의 손에는 작은 메모지가 있었다. 거기에는 알론소가 적어 준 다양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어느새 브레도 대공의 세력과 연결점까지 만들어 두다니. 생각보다 대단한데.”
새벽에 이퀼라스의 앞에서 황가의 일에 대하여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지만 그래도 실상 의외로 대공의 세력에 대해 세밀하게 조사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론소는 대공의 거사에 포섭된 자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중요한 역할은 아니었지만 대공은 7인의 기사단에게 지원받은 자금으로 황실의 상당수 인원에게 돈을 뿌리고 자신의 편으로 회유했다.
속칭 눈 먼 돈의 일부가 알론소에게도 접근했고 대공의 세력을 조사하기 원했던 알론소는 연락망 중 한 명으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덕분에 가짜 편지를 만들어 그들을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었다.
“다 모였을 테니 이제 쓸어버릴까. 으음. 놈들을 어떻게 활용하지?”
알론소가 만든 대공의 가짜 편지로 인해 지금 그들은 비밀 아지트에 모두 모여들었을 터였다.
황궁에 남아 있는 이들은 카이젠의 먹잇감이었다. 그들을 그냥 죽여 버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잘 활용할지를 정해야 했다.
“참, 그리고 다른 녀석도 마침 그곳에 있겠군.”
카이젠이 들고 있던 종이에는 준비된 다른 자들의 목록도 같이 적혀 있었다.
* * *
서쪽에 위치한 잊혀진 별궁. 그곳은 약 백 년 전부터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새로운 궁들이 하나 둘 건설되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창고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성의 내부는 넓었고 수백 년 전에는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을 공간에 지금은 황궁에서 쓰는 여러 가지 물자들을 적치하고 있었다.
끼이익.
끼익.
“조심, 조심하라고. 손상되지 않게 천천히!”
감독관으로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명령에 따라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열 명의 남자들이 커다란 짐을 나르고 있었다. 그들의 오른쪽 어깨에는 흰색의 천이 묶여져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황궁에 소속된 인부들이란 것을 의미했다.
황궁에는 다양한 직급의 인부들이 있었다. 황궁 근처에 집단 거주하면서 황실의 땅을 소작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그렇게 황실의 땅을 사용하는 대신 일주일에 며칠씩 조를 나눠 황궁에 들어와 황궁의 여러 가지 잡무를 도와야 했다. 나름대로 황궁의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대신에 황실의 땅을 소작하는 것은 소작료도 거의 없었기에 그들은 대대손손 그 일을 하면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깐깐한 감독관을 만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으음. 좀 삐딱한데.”
뚱뚱한 감독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 그러자 힘들게 짐을 가져온 인부들이 살짝 인상을 썼다.
“이거 다시 들어서 빼 봐. 어디에 넣을지 좀 더 생각해 보고 넣어야겠다.”
퉁명스럽게 손을 들어 조금 전에 집어넣은 네모난 상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작업 인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벌써 세 번째였던 것이다.
제대로 각이 잡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지라 인부들은 투덜거리며 다시 옮기려 했으나 한 남자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감독관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아 정말. 뭐가 삐딱하다고 그래요.”
“응? 넌 뭐야.”
감독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자신에게 따지느냐는 표정.
“니키오, 참아.”
니키오라 불린 남자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감독관에게 따지자 그의 옆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그를 말렸다.
“삼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니에요.”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려니 짜증이 나는 것이다. 아무리 황궁에 와서 일을 하는 것이지만 이건 아니었다.
“어디서 지금 눈을 부라리고 있는 거야. 일 그만두고 여기서 쫓겨나고 싶어?”
감독관이 호통을 쳤다. 그러자 니키오의 삼촌 울파란이 재빨리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감독관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처음 일을 하러 왔기에 이곳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울파란이 사과를 하자 니키오는 이를 악물며 뭐라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녀석아, 감독관님께 사과해라. 앞으로 여기서 일 계속하고 싶으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삼촌이 말을 걸자 니키오는 마지못해 감독관에게 사과했다.
어쨌든 그가 상관이었고 자신은 이곳에 일을 하러 온 인부였다. 그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큼. 오늘 처음 왔다고 하니 넘어가지만 다음부터 또 이러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짐 하나를 놓더라도 제대로 각을 잡아 놓아야 황궁의 위엄이…….”
니키오가 사과를 하자 그제야 감독관이 주절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짐 하나를 적재하는 데 뭔 말이 이렇게 많은지 알 수 없었지만 니키오는 깐깐하고 답답한 감독관을 만나서 하루 일진이 영 종쳤다고 생각했다.
‘제길, 첫날부터 뭐가 이래. 하필이면 이런 감독관이 걸리냐.’
니키오는 감독관의 설교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이곳 인부들을 관리하는 감독관은 모두 예순다섯 명. 인부들은 열 명씩 조를 짜서 움직였고 감독관이 한 명씩 배치되었다. 물론 감독관들도 파트를 나누고 조별로 움직였다.
보통 일거리에 따라 인부 조와 감독관이 변했다.
다음에는 절대 이 깐깐하고 답답한 감독관을 만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니키오는 속으로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제길. 처음부터 좀 제대로 일하면 되지.’
니키오가 보기에 각이 제대로 맞지 않기보다는 애초에 이곳의 상자들이 각각 크기와 모양이 달라서 서로 맞추려 해도 제대로 맞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퍼즐을 맞추듯 각각 눈대중으로 대충 비슷하게 맞춰지는 곳에 맞춰 넣고 있는데 조금 모자라거나 조금 튀어나오거나 하는 식으로 쉽게 맞추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른 곳에 쌓여 있는 짐들을 보니 라인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들어간 상자들도 많았다. 대충 맞춰서 쌓아 두는 것 같은데 하필 니키오가 일을 하고 있는 곳의 감독관은 어떻게든 선을 맞추려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일이 끝나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니키오는 여기서 성실히 일해서 황실의 땅을 받아 농사를 짓겠다는 꿈이 있었다.
어려운 시절에 노후 보장으로는 최고의 직장이었던 것이다. 철밥통 직장이라 불릴 법했다. 사실 이렇게 깐깐한 감독관만 아니라면 일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들었던 것이다.
“응?”
그때 니키오의 눈에 무언가 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껌벅껌벅.
“뭐지?”
분명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에 분명 누군가가 지나가는 것이 잡혔던 것이다.
“빨리 움직여. 다시 뽑아서 제대로 선을 맞춰 보자.”
하지만 감독관의 호통에 니키오는 조금 전 봤던 것을 잊어버린 채 다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