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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Chapter.4 Siege Warfare(2)
갑자기 단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류드나르는 단설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러자 머리를 붙잡고 있는 단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넌 뭔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 빨리 제 구역으로 안 가?”
“으으.”
아마도 단설의 머리를 쥐어박았을 사내를 본 류드나르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류드나르를 발견한 사내는 류드나르를 향해 다가왔다. 그때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단설이 갑자기 사내를 걷어차 버렸다.
“어, 어어……!”
성벽 아래로 떨어질 뻔한 사내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곧 핏기 가신 얼굴로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단설이 독기를 가득 품은 눈을 뜬 채 손바닥 위에 엄청난 화염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이 건방진 자식이 감히 누굴 때려?”
“자, 잠깐만…….”
“평민 주제에 감히 이 단설 님의 머리를 쳐?”
“으억!”
괴상한 소리를 지른 사내는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단설은 넙죽 엎드린 사내를 다시 한 번 걷어차고는 화염을 지워 냈다.
“쳇. 운 좋은 줄 알라구.”
“가, 감사합니다.”
사내는 단설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빠르게 도망치듯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던 류드나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한 거 아냐?”
“운 좋은 거야. 로베르 같은 놈이었다면 바로 목을 쳐 버렸을걸?”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단설을 본 류드나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단설은 그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왜 그래?”
“…….”
고개를 내저은 류드나르는 다시 말했다.
“저기, 나도 평민인데, 그럼 반말하면 안 되는 거야?”
“네가 왜 평민이야?”
“응?”
“마법사는 무조건 귀족 대접이라구. 여긴 엄연히 마법사를 인정하는 국가란 말야.”
그렇게 말한 단설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단지 무허가 마법사라는 게 좀 걸릴 뿐이지. 그래도 여기서 5년만 버티면 정식 마법사 자격증을 얻으니까 별 상관없잖아.”
또 한 번 한숨을 내쉰 단설은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투덜거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로베르 후작에 대한 악담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것을 듣던 류드나르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저주라도 걸지 그래?”
“로베르 그놈도 마법사를 고용하고 있다구. 후작령 수석마법사가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그 마법사만 없다면 당장에라도 저주를 걸어 버리겠다는 투의 대답을 들은 류드나르는 식은땀을 흘렸다.
단설은 계속 로베르 후작에 대한 악담을 퍼부어 댔다. 계속 이어지는 악담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류드나르는 단설에게서 시선을 돌려 성벽의 경계 상황을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이 성벽에 늘어서 있었다. 단설이 말한 오십 명을 훨씬 넘기는 숫자라는 걸 확인한 류드나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사람은 다섯에 한 명꼴이었다. 아마도 나머지 넷은 임시로 징집한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한 류드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한 류드나르는 성벽 아래를 내다보았다.
“…….”
류드나르는 입을 쩍 벌렸다.
성이 세워진 언덕 아래는 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성벽 위에서 힘껏 돌을 던져도 괴물들이 늘어선 곳을 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류드나르는 당황을 지우지 못했고, 그런 류드나르를 본 단설은 고개를 갸웃거리곤 류드나르가 바라본 곳을 향해 눈을 돌렸다.
“으엑.”
단설 역시 당황한 기색을 띠며 입을 벌렸다.
“한꺼번에 들이닥치면 절대 못 막겠는데.”
“동감이야.”
그렇게 말한 류드나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굳건한 성벽이 버티고는 있지만, 저 괴물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성벽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일 것 같았다. 아니, 굳이 성벽을 무너뜨릴 이유도 없었다. 초기 전투에서 성벽 아래 쌓일 시체들만 밟아도 성벽을 쉽게 타 넘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류드나르는 다시 성벽의 방어 상태를 살펴보았다.
“후우―.”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류드나르도 전쟁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익힌 지식으로도 지금 상황이 비관적이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병사 오십에 어중이떠중이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 이백여 명. 그리고 엘라인이 끌고 온 기사 약 삼백 명이 전력의 전부였다. 겨우 그 정도 병력으로 오천이 넘는 괴물들을, 그것도 베어 버리면 무기를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 엘라인 경이다.”
단설의 말을 들은 류드나르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성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녹아 버린 갑옷을 벗어 던진 채 홀가분한 차림으로 성벽을 오르는 엘라인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엔 투구나 모자로 가리고 있던 긴 금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어깨 어름까지 오는 금발이 눈을 가리는 것에 신경이 쓰였는지, 엘라인은 눈살을 찌푸리고선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묶었다. 그러고는 연녹색 눈동자를 들어 성벽을 살펴보다 류드나르가 있는 방향에 시선을 고정시키곤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얼마 후, 류드나르와 단설이 있는 곳에 도착한 엘라인은 단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설명은 끝났나?”
단설은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엘라인을 보았다. 그러자 엘라인은 표정을 굳히며 다시 말했다.
“알라다이스 경에게 충분한 설명을 했는지 묻고 있다.”
“아, 예. 했어요.”
엘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성 밖을 배회하는 괴물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시 괴물들을 바라보던 엘라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단설을 향해 말했다.
“저 괴물들에겐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했다. 보여 줄 수 있나?”
“에? 하지만 그랬다가 공격해 오면요?”
“뒤쪽에서 홀로 떨어져 있는 괴물을 노려라. 그럼 주의를 끌지 않을 수 있을 거다.”
단호한 명령을 들은 단설은 류드나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류드나르는 슬쩍 그 시선을 피했다. 단설은 배신감을 느낀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멀리 있는 괴물을 노려서인지, 단설의 손에 떠오른 화염은 구형(求形)이 아닌 화살의 모양을 띠고 있었다.
다시 목표로 삼은 괴물을 노려본 단설은 떠오른 화염을 날렸다.
그것은 약 200야드(약 183m)를 날아가 홀로 떨어져 있는 괴물을 맞췄다. 화염에 직격당한 괴물은 잠시 몸부림을 쳤지만, 곧 멀쩡한 모습으로 화염을 뚫고 걸어 나왔다.
“으음.”
엘라인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단설이 날린 화염은 잘 훈련된 기사도 한 방에 거꾸러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엘라인 자신이라면 자신의 몸에 닿기 전에 베어 버렸겠지만, 그런 기사는 백 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런데 저 괴물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 화염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오천 마리나 되는 괴물 모두가 저렇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엘라인은 다시 한 번 신음을 흘리곤 자신의 어깨 부분을 매만졌다. 그러나 갑옷의 느낌은 없었다. 엘라인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상체를 바라보았고, 갑옷을 벗어 놓았다는 것을 떠올리곤 입술을 깨물었다.
“……투석(投石)밖에 없나.”
“예?”
“난 알라다이스 경을 만나고 오겠다. 그때까지 대처 방법을 생각해 두도록.”
“자, 잠깐만요!”
단설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엘라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엘라인은 그런 단설을 무시한 채 그대로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나보고 어쩌라고!”
단설은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 질렀고, 류드나르는 그런 단설에게서 고개를 돌려 성 밖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평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괴물들이 보였다. 일렬로 세운다면 지평선을 넘어갈 것만 같은 숫자. 지금 성안에 있는 병력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사나 지휘관 수업을 꾸준히 받아 온 사람이라도 자신과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을 한 류드나르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성벽 위에 올라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대충 깎아 만든 목창이나 손도끼, 망치 등을 든 채 괴물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어째서인지 공격해 오지는 않고 있지만, 저 괴물들이 달려들기만 하면 성이 무너질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성벽 아래 나뒹구는 괴물의 시체를 본 류드나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단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것 좀 봐.”
“……왜?”
머리를 감싸 쥔 채 주저앉아 있던 단설은 류드나르가 가리킨 것을 바라보곤 말했다.
“시체잖아.”
“좀 더 자세히 보라구.”
“살아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 생각을 정리한 류드나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 상처가 없는데 죽어 있잖아.”
“늙어 죽었나 보지.”
“성벽 아래에서?”
“그럴 수도 있지, 뭐.”
단설은 그게 뭐 어떠냐는 듯이 답했다. 류드나르는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괴물의 시체를 가리킨 후, 손을 움직여 비슷한 모습으로 그 주변에 죽어 있는 다른 괴물들을 가리켰다.
“저것들은?”
“생일이 같은 괴물들인가 보지.”
“…….”
류드나르는 입을 살짝 벌리곤 어이없다는 듯이 단설을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 돼?”
“아님 말지, 뭐.”
툴툴거린 단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기가 정점에 달한 시간이기 때문인지 괴물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느려져 있었다. 성벽 위에서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사람들도 더위에 지쳐 늘어지고 있어,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열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이었다.
“하아.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단설은 짜증 섞인 탄식을 토해 냈다. 엘라인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나이델 정도의 마법사라면 모를까, 간신히 초보 티를 벗은 자신 같은 마법사로서는 어떤 답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스퀘이크(Earthquake)라도 쓸 수 있다면 모를까, 마법도 안 통하는 놈들을 어쩌라는 거야?”
“그 주문 몰라?”
“몰라.”
단설은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주문이 너무 길어서 아직 못 외웠어. 내 방에 있는 스펠 북(Spell Book)에 적어 놓긴 했는데, 엉겁결에 끌려오느라 그것도 못 가지고 왔고.”
머리를 벅벅 긁은 단설은 다시 말했다.
“공격 주문도 안 통하는 놈들이니까, 그냥 땅을 가라앉혀서 생매장시켜 버리는 게 제일인데 말야.”
단설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