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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Chapter.4 Siege Warfare(3)


류드나르는 그런 단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류드나르는 다시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멀쩡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괴물들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류드나르는 멀찍한 곳에 서 있는 사내를 향해 걸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류드나르의 인사를 받은 사내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 단설에게 걷어차인 동료의 말을 들었던 탓에, 자연히 경계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마법사님.”
잠시 사내를 빤히 쳐다보던 류드나르는 손가락을 들어 성벽 아래의 사체(死體)를 가리켰다.
“저 괴물들, 왜 저렇게 죽어 있는 거죠?”
어째서인지 당황하던 사내는 류드나르가 가리킨 사체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 저놈들 말씀이십니까.”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끓는 기름을 퍼부었더니 저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안의 기름이 다 떨어져서…….”
“기름?”
류드나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류드나르의 머릿속을 스쳤다. 류드나르는 몸을 돌려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앞으로 쭉 뻗고는 주문을 외웠다. 숲에서 나무를 벨 때 단설이 가르쳐 주었던 주문이었다.
“윈드 커터(Wind Cutter).”
작은 돌풍이 류드나르의 손을 맴돌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살을 찌푸린 류드나르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류드나르의 손을 맴돌던 돌풍이 갑자기 커졌고, 그것을 확인한 류드나르는 멀리 떨어진 괴물을 향해 그것을 날렸다.
100야드(약 91.4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괴물의 몸이 두 동강 나 쓰러졌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흩날려, 그 괴물 주변은 완전히 초토화된 채 누런 연기를 뿜어 댔다.
“어, 어라?”
그 모습을 본 단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류드나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뻔하잖아. 마법이 안 통하는 게 아니야. 불이 안 통했던 거지.”
“뭐?”
단설은 의문 섞인 표정으로 류드나르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류드나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불을 막을 수 있는 액체가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아. 아마 기름에 가까운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어.”
“기름?”
“기름이 다 잘 타는 건 아니야. 내가 살던 곳에 있던 두꺼비 기름만 해도 불이 잘 안 붙었거든.”
류드나르의 말을 들은 단설은 표정을 찌푸리곤 말을 꺼냈다.
“으엑. 그런 걸 뭐 하러 짜?”
“선생님이 가끔 마법 시약 만든다고 짜 오라고 했었으니까. 그래서 몇 번 만져 봤어.”
“으으.”
몸을 부르르 떤 단설은 괴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저놈들도 그런 종류라는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얼굴을 잔뜩 찌푸린 단설은 오른손으로 이마 어름을 긁으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던 단설은 손을 들어 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단설의 두 손 사이에서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타닥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일었다.
잠시 그것을 보던 단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표적으로 삼을 괴물을 찾으려는 생각이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대던 단설의 눈에 서서히 성벽을 향해 다가오는 괴물이 보였다. 왠지 그 모습이 기분 나쁘다고 생각한 단설은 그 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단설의 손에서 뻗어 나온 하얀 번개가 괴물을 덮쳤다.
단설의 마법에 직격당한 괴물은 갑자기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쓰러져, 간질에 걸린 것 같은 행동을 보이며 거품을 뿜어 댔다.
잠시 몸을 떨던 괴물의 움직임이 멎었다. 단설은 침을 꿀꺽 삼키곤 그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괴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됐어! 마법만 통하면 저런 녀석들 따위야…….”
기세 좋게 말하던 단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저 성 주변을 배회하고만 있던 괴물들이 갑자기 성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아악! 이건 반칙이야! 하나씩 몰려오라고!”
단설은 움찔하며 소리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괴물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었고, 성벽 곳곳에서는 공격을 알리는 종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지친 기색으로 쉬고 있던 병사들과 징집된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종소리는 계속 커졌고, 성 아래 있던 사람들도 조잡한 무기를 들고선 급히 성벽 위를 향해 내달렸다.
단설은 움찔하더니 류드나르를 향해 말했다.
“왜, 왜 그렇게 봐! 내 탓 아니라구!”
“……누가 뭐래?”
필사적인 모습으로 자기 탓이 아니라고 중얼거리는 단설을 본 류드나르는 고개를 젓고는 괴물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괴물들은 성벽을 타오르고 있었다. 그 전진을 늦추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나 성벽 전체를 방어하기엔 수가 너무 부족했다. 어느새 성벽을 넘어 들어온 괴물도 있어, 성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익!”
성벽을 막 타 넘은 괴물이 채 다듬어지지도 않은 몽둥이를 휘두르는 사내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앞쪽의 괴물을 몽둥이로 쳐 낸 사내는 뒤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보다 괴물이 먼저 사내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다급한 고함이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괴물이 사내의 몸을 찢어 놓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설의 마법이 그 괴물을 다시 성벽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을 한 단설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파이어 볼!”
한숨을 내쉰 단설은 기겁했다. 류드나르가 자신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린 것이다.
“나, 날 죽이려고!”
고함을 내지른 단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주저앉았다. 그러나 류드나르가 날린 파이어 볼은 단설의 옆을 스쳐, 단설을 향해 달려들던 괴물을 덮쳐 성 밖으로 밀어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 응?”
“무슨 헛소리야?”
고개를 든 단설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본 류드나르는 다시 손에 화염을 맺었다. 단설은 다시 움찔했지만, 그 화염은 막 성벽을 타 넘은 괴물을 향해 내쏘아졌다.
기괴한 소리를 내뱉은 괴물은 화염에 휩싸인 채 떨어졌다. 불에 타 죽지는 않더라도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단설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건 말하고 써. 정말 죽는 줄 알았잖아.”
“말하는 사이 죽었을 텐데?”
“아무튼!”
투덜거린 단설은 다시 주문을 외웠다.
성벽을 막 타 넘은 괴물이 단설의 눈에 들어왔다. 화풀이할 대상을 찾고 있던 단설은 이를 부드득 갈며 마법을 날렸다.
“윈드 커터!”
“앗! 안 돼!”
단설이 날린 마법을 본 류드나르는 소리 질렀다. 그러나 한발 늦어, 이미 단설의 마법은 성벽을 넘어온 괴물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갈가리 찢긴 괴물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졌다.
“아아악!”
피 몇 방울이 묻은 자신의 신발이 급격히 녹아 가는 것을 본 단설은 기겁하며 발을 차올려 신발을 날렸다. 조금만 늦었다면 발까지도 녹아 버렸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피 안 튀는 걸로 해!”
“좀 빨리 말해!”
이를 간 단설은 다시 성벽 위를 올라오는 괴물들을 향해 소리쳤다.
“제기랄! 저 신발이 얼마짜린지 알기나 해!”
단설의 두 손에서 강렬한 빛과 스파크가 일었다.
“죽어 버려, 이 돈도 안 되는 놈들아!”
엄청난 양의 번개가 단설의 손을 통해 마구 뿜어졌다. 순식간에 여덟 마리나 되는 괴물이 번개에 직격당해, 온몸을 격하게 떨다 쓰러져 갔다.
강한 마법을 쓴 탓인지 숨을 몰아쉰 단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느새 성벽의 절반이 괴물들에게 점령당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류드나르 역시 그것을 확인했다. 입술을 깨문 류드나르는 빠른 속도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왼손과 오른손 모두에 붉은 화염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본 괴물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류드나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에엑!”
당황한 류드나르는 손에 맺힌 화염을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금세 다시 화염이 두 손에 맺혔고, 그것들은 연신 괴물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공격이 시작된 지 십 분도 안 되었는데도, 마치 이삼십 년은 지난 것 같았다.
“하아, 하아.”
계속해서 마법을 날린 류드나르의 얼굴에 힘든 기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한 마법을 몇 번이나 퍼부은 탓에, 단설의 안색은 류드나르보다 나빠 보였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가 모두의 귀를 울렸다.
“후우―.”
다시 한 번 파이어 볼을 날린 류드나르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시 깊숙한 곳에서부터 달려온 기사들의 검이 괴물들을 꿰뚫었다. 피가 튈 것을 우려해 베는 대신 찌르고만 있었지만, 검이 녹아내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몇 번 괴물을 찌르던 기사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내던지고는 건틀렛을 낀 주먹으로 괴물들을 두들겼다. 오히려 그게 더 타격이 컸던지, 검에 몇 번이나 찔리고도 멀쩡했던 괴물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아직도 숫자는 괴물들 쪽이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달려온 기사들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였다. 덕분에, 반 이상 괴물들에게 점령당해 있던 성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한동안 공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괴물들이 물러났다. 잔뜩 지쳐 있던 수비군들은 환성을 내지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성벽 위에 주저앉았다. 뒤늦게 전투에 참여한 기사들 역시, 무거운 갑주를 입고 있어서인지 잔뜩 지친 모습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휴― 살았다.”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단설은 혀를 빼물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류드나르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숨을 내쉬었다. 체력은 물론 정신력마저 완전히 고갈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쉬고 있던 류드나르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응?’
은빛 레깅스를 신은 누군가가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그 레깅스의 주인은 조금 전 단설이 갈기갈기 찢어 놓았던 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류드나르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 괴물을 바라보는 엘라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땀에 젖은 금발이 이마에 눌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엘라인은 그것을 느끼지도 못하는 듯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괴물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그러고 있던 엘라인은 작은 소리로 뭔가를 말하고는 몸을 돌려 성벽에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