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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Chapter.4 Siege Warfare(4)


“……뭐라고 한 거지?”
류드나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건성으로 들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엘라인의 말소리가 너무도 작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엘라인이 했던 말을 생각하려던 류드나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지쳤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눈을 감은 류드나르의 귀에, 이제야 울려 퍼지기 시작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한동안 조용하던 괴물들은 저녁이 되자 다시 성 근처로 몰려들었다.
경계를 서던 초병이 황급히 종을 울렸다. 안도하며 성벽을 내려갔던 병사들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급히 성벽 위를 향해 내달렸다. 그들은 성벽 밖을 향해 잘 다듬어지지도 않은 창을 들이대며 대열을 이루었지만, 괴물들은 그저 성 근처를 배회하며 간간이 괴상한 울음을 토해 내는 것이 전부였다.
다시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다. 그 대치는 아침까지 이어졌고, 그런 상태로 밤을 꼬박 새운 수비군들은 지친 표정으로 성 밖의 괴물들을 쳐다보았다.
어제의 전투로 수는 많이 줄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포위는 풀리지 않았다.
“제기랄. 저놈들, 무슨 속셈인 거야?”
성벽 아래를 내다본 사내 하나가 지친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 사내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성 밖의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괴물들은 여전히 멀찍한 곳에서 성을 포위한 채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정 범위 이상은 움직이지 않아, 포위는 풀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괴물들을 바라보던 단설이 투덜댔다.
“하아. 빨리 저놈들이 사라져야 케이크를 먹을 수 있을 텐데.”
“여긴 없어?”
“전투 중이라면서 배급제를 시행하더라구. 여기서 먹을 수 있는 건 그 맛없는 수프뿐이더라.”
그렇게 말한 단설은 성 밖의 괴물들을 향해 이를 갈았다.
“으아아. 저놈들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외상값도 다 갚고 케이크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응? 연봉은 연말에 받는다며?”
“그래도 아버지가 준 조그만 영지가 하나 있거든. 백 번째 자식이라고 마을 하나 물려주셔서 일 년에 이천 마르크 정도는 충분히 들어와. 게다가 그제나 어제쯤이 돈 들어오는 날이었으니까, 이런 곳에 끌려오지만 않았으면 당연히 지금쯤은 케이크 더미에 파묻혀 있었을 거라구!”
갑자기 소리를 지른 단설은 다시 성 밖 괴물들을 향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더럽게 맛없는 수프 따위 먹고 싶지 않아아아!”
“그런 수프도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언동에 좀 더 신경 쓰도록.”
“…….”
눈을 부라리며 뒤를 돌아보았던 단설은 갑옷을 걸쳐 입은 엘라인을 보곤 흠칫하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최소한 소금이라도 좀 쳐 줬으면 한다는 말이었는데요…….”
단설은 말끝을 흐리며 엘라인의 눈치를 보았고,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단설을 보던 엘라인은 짧게 말했다.
“영주에게 건의해 보겠다.”
그렇게 말한 엘라인은 몸을 돌렸다. 단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후아. 죽는 줄 알았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말이.”
고개를 저은 단설은 다시 부드득 이를 갈았다.
류드나르는 그런 단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단설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류드나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류드나르는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야, 이러다가 여기서 못 나가는 거 아냐?”
“설마. 아마 세금 안 올라가면 수도에서 반란으로 규정하고 병사들 끌고 올 테니까, 그때쯤 되면 어떻게든 나갈 수는 있을 거야.”
단설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류드나르는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데?”
“그야 연말…… 아악! 그럼 그때까지 맛없는 수프나 먹으면서 버텨야 된다는 거잖아!”
“어쩌면 그것도 못 먹을지도 몰라.”
“……왜?”
아주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단설을 본 류드나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 엘라인 경이 한 말 못 들었어? 그런 수프도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고 했잖아.”
“아아악!”
단설은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난 배고픈 건 못 참는단 말야!”
절규하듯 고함을 내지른 단설은 급히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괴물들이 물러갈 기색이라도 보이는지 확인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성벽 위에서 본 괴물들은 여전히 멀찍한 곳에서 포위만 한 채 늘어서 있었고, 그것을 확인한 단설은 입을 쩌억 벌리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늦게 성벽으로 올라온 류드나르는 그런 단설을 보며 실소했다. 그러나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대로 지루한 대치가 계속해서 이어져서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아아, 레모네이드 마시고 싶다.’
단설의 모습에 실소하긴 했지만, 사실 류드나르 역시 맛없는 수프에 질리긴 마찬가지였다. 고작 두어 번 먹었을 뿐인데도 밀가루를 그냥 물에 풀어 마시는 듯한 느낌에 질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류드나르는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옮겼다.
끝도 없이 늘어선 괴물들이 보였다. 지난번에 많이 줄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천 마리 가까이 되는 듯했다.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괴물들까지 더한다면 족히 삼사천은 넘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류드나르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류드나르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나이델의 집무실에서 발견했던, 소환 주문이 적힌 스크롤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 생각을 떠올린 류드나르는 단설을 바라보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단설은 멍하니 앉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아, 케이크…… 딸기, 생크림, 쉬폰…….”
“…….”
중얼거리는 단설을 본 류드나르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이대로 둔다면 계속해서 저럴 것만 같아, 류드나르는 주저앉아 중얼거리는 단설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왜?”
단설은 허무감 섞인 눈으로 류드나르를 바라보았다. 그걸 본 류드나르는 단설의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너 말야, 소환 주문 적힌 스크롤 가지고 있지?”
“응?”
“왜 있잖아, 성에서 발견했던 거.”
단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품속을 더듬었다. 그러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나이델의 집무실에서 가지고 나온 두루마리가 떨어졌다.
그것을 집어든 단설은 류드나르를 보며 말했다.
“이거?”
“이거 한번 써 보자.”
“뭐?”
“어쩌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주문이 긴 걸 보니까 뭔가 대단한 게 나올 것 같은데 말야.”
류드나르의 말을 들은 단설은 눈을 빛냈다.
“에잇, 그래! 저놈들 전부 다 쓸어버리고 케이크 먹으러 가는 거야!”
갑자기 의욕에 넘치는 표정을 지은 단설은 어깨를 쭉 펴며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으에, 너무 길다.”
2만자 가까이 되는 주문에 질려 버린 단설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나 성 밖 괴물들을 바라본 단설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쯤 읽어 내려가자, 단설의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잠시 후, 이제 조금만 더 읽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 단설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바람에 잠깐 정신이 흩어졌던 단설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두루마리에 적힌 주문을 읽어 갔다. 주문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설은 주문을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갑자기 곳곳에서 습격을 알리는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아악! 뭐 하는 짓이야!”
종루를 쳐다본 단설은 길길이 날뛰며 소리 질렀다. 이제 사분의 일만 더 읽으면 될 일이었건만, 종소리 때문에 집중이 깨져 버려 소환 주문을 외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내 이놈들을 당장…….”
“차, 참아.”
“왜!”
자신의 팔을 붙잡은 류드나르를 노려본 단설은 류드나르가 손을 들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성벽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괴물들이 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본 단설은 비명을 내질렀다.
“으엑! 저놈들 왜 또 몰려오는 거야!”
단설의 질문에 답을 내려 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괴물들은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 바로 앞까지 발을 디뎠다.
어느새 성벽 바로 아래에 도달한 괴물들을 본 단설은 부드득 이를 갈며 주문을 외웠다.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렬한 번개가 괴물들을 향해 내쏘아졌다. 잔뜩 독이 오른 상태여서인지 단설의 마법은 어제 사용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순식간에 서른 마리가 넘는 괴물이 감전사했고, 그것을 본 다른 괴물들의 진격이 한순간이나마 멈췄다.
“와!”
단설의 마법에 감탄한 류드나르는 단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단설은 의기양양한 표정 대신 힘들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띤 채 헥헥거렸다.
“왜 그래?”
류드나르는 갑자기 헥헥 거리는 단설을 바라보며 말했고, 그 소리를 들은 단설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너, 너무 무리했나 봐.”
“…….”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류드나르는 다시 성벽을 향해 달려드는 괴물들을 바라보며 주문을 외웠다. 금세 강한 돌풍이 류드나르의 손에 맺혀 맴돌았고, 류드나르는 막 성벽에 손을 댄 괴물을 향해 그것을 날렸다.
빠르게 날아든 돌풍이 괴물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아직 성벽에 오르지 못한 상태였던 탓에, 찢긴 괴물의 피는 다른 괴물들을 향해 쏟아졌다.
피를 뒤집어쓴 괴물들의 몸에서 누런 연기가 뿜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괴물들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모습으로 성벽을 기어올랐다.
“쳇. 별 소용없잖아.”
혹시나 했던 류드나르는 단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그 주문, 나 좀 가르쳐 줘.”
“헥헥…… 그러니까…….”
단설은 숨을 헐떡이며 주문을 말했다. 잠시 동작을 멈춘 채 그것을 듣던 류드나르는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리고는 다시 단설을 향해 말했다.
“한 번만 더.”
“어렵지?”
단설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류드나르의 대답은 단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나왔다.
“아니, 숨소리 때문에 못 알아듣겠어.”
류드나르의 말을 들은 단설은 투덜거리면서도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호흡이 진정된 것을 확인한 후 조금 전에 사용했던 주문을 다시 류드나르에게 말해 주었다.
류드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들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하얀 번개가 류드나르의 손에 맺혀 이글거렸다.
“아아, 역시 신은 불공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