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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7화)
3장 용아천(4)


“크윽!”
일각 정도 걸어서 들어온 곳은 작은 공터였다. 그는 공터 가운데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흐흑, 장문인 어르신! 어, 어찌 이리도 허망하게 가신단 말입니까! 예! 대답이라도 해 보십시오! 제발!”
그는 하늘에 대고 그렇게 외쳤다. 아직도 비가 내리는지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청령은 천유한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청성파가 무너진다면 그도 가문과 함께 뼈를 묻을 위인이었다.
청령은 비급서를 너무 늦게 내민 것을 진정으로 후회했다.
“제기랄!”
청령이 주먹으로 바위를 깨뜨렸다. 깨진 바위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청령은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피로 물들었다.
그때였다.
청령의 손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집으로 향했다.
“……그대들은 누구신데, 저를 훔쳐보고 계십니까?”
청령이 서 있는 작은 공터의 바깥 삼 장 뒤로, 수풀 사이에 은신하고 있는 자들의 기운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총 아홉인가? 실로 대단한 자들이 아닐 수 없구나. 이토록 가까이 와서야 느낄 수 있다니.’
“저에게 볼일이 있다면 다음에 와 주십시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작게 흔들렸다. 그것을 신호로 총 열 명의 그림자가 청령의 앞으로 뚝 떨어졌다. 그림자의 숫자를 세어 본 청령이 얼굴을 굳혔다.
‘이럴 수가! 열 명이었다니! 저 거대한 창을 든 자의 기운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내뻗는 살기에 청령이 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껏 청령의 무지막지한 공력을 담아내느라 검신 곳곳이 금이 가 있었다.
청령은 소매로 눈을 훔쳤다. 아직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창을 든 그림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네가 얼마 전 혈룡대의 살수들을 죽인 자가 맞느냐?”
순간 그의 몸에서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살기가 뻗쳐 나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살기에 미쳐 버렸을 것이다.
청령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살기를 내뿜었다.
“얼마 전 아미산에서 나에게 적의를 드러내며 공격했던 흑의인들이 맞다면, 그대들이 말한 혈룡대는 내가 죽인 게 맞을 것입니다.”
잠룡수라대의 대장 귀창이 청령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대단한 고수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먹향이 진하게 풍기는 서생 짓이나 하는 것이 어울릴 풍모였다. 하지만 귀창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아무리 풍모가 서생 같다 해도, 실체는 단 한 수에 혈룡대의 아홉을 몰살한 장본인이다. 방심했다가는 내가 당한다!’
귀창은 얼마 전 유경련과의 대결을 생각해 보았다. 진원진기를 사용해서 달려드는 유경련보다 현재 눈앞에 있는 청년이 훨씬 위협적으로 보였다.
“방심하지 마라! 놈은 청성파의 조무래기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놈이다.”
그렇게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무공을 익힌 청령이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청성파라는 이름이 나오자 오히려 그의 귀에는 천둥 번개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자, 잠깐!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청령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귀창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다시 말해 주었다.
“후후. 네 실력이 청성파 쓰레기들과 근본이 다르다고 말했다. 자, 됐느냐?”
“하, 하나만 묻겠습니다. 혹시 청성파를 멸문한 것이 바로 그대들입니까?”
청령의 표정이 돌변했다. 청령의 눈이 부릅떠지더니, 이내 폭발할 것 같은 공력이 그의 인도에 따라 검으로 전해졌다.
그의 공력이 검에 더해지자 이 척 정도의 검강이 솟아났다.
우웅우웅―!
검곡이 주위를 매섭게 울렸다.
청령의 그런 모습에 귀창이 입가에 호를 그리며 창을 꼬나 쥐고 말했다.
“그렇다. 그 장문인은 물론이거니와, 늙은이들의 피까지 모두 내 창을 적셨다.”
파앗―!
그 말과 함께 청령의 신형이 허공을 강하게 밟으며 그들을 향해 쇄도해 나갔다.
“이런 개자식들! 내 손으로 너희를 죽여 원귀가 된 청성파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겠다!”
청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빙허임풍의 신법을 펼친 그의 신형이 귀창의 코앞까지 닿은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청령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귀창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맞부딪쳤다.
채앵―!
파란색 검강과 붉은 창강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팽팽한 접전.
서로를 노려보던 둘 중에 청령이 먼저 검을 뗐다.
그 순간을 노린 잠룡수라대가 청령의 목을 향해 붉은 궤적을 그리며 암기를 날렸다.
타타타탕―!
호신강기에 부딪힌 암기들이 속절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청령은 그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공력을 끌어 모았다. 그의 손끝에 파란 강기가 맺혔다.
“칠십육로무형지!”
휘휘휘휙―!
아홉 개의 강기가 귀창을 제외한 잠룡수라대원들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싸움에서 껴들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허헉!”
“억!”
귀창을 제외한 잠룡수라대의 모든 이들이 기겁을 하며 방어초식을 펼쳤다.
타앙!
그들의 단검은 칠십육로무형지를 막아 내기에 손색이 없었다. 다만, 그 충격이 커서 싸움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손목에 충격이 가해졌다.
귀창의 눈썹이 심하게 떨렸다.
‘도대체 저 지법은 뭐란 말인가? 저런 지법이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청령은 칠십육로무형지가 한 명도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털어 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검에 공력을 더욱 강하게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삼초식 와룡연쇄참!”
구하천풍검법의 삼초식인 와룡연쇄참이었다. 청령의 검에서 검기가 흩뿌려졌다.
“내가 가만 놔둘쏘냐!”
귀창의 창이 한껏 공력을 머금고 허공에서 유린하는 검기들을 차례차례 막아 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로서도 쏟아지는 검기들을 모두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미처 막지 못한 검기들이 잠룡수라대를 공격했다. 와룡연쇄참은 고작 지법과는 다르다. 오직 대상을 죽이기 위해 날아가는 살초였다.
파악―!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다소 내공이 약한 잠룡수라대의 세 명의 머리가 그대로 터진 것이다. 목을 잃은 몸은 앞으로 주춤주춤 삼 보를 움직여서는 그대로 꼬꾸라졌다.
“이, 이놈이!”
귀창이 살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하를 잃은 상심이 컸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고작 약관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은 청년의 초식을 막지 못했다는 생각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순간, 귀창의 기세가 변했다.
푸확―!
지금껏 내보이던 살기가 아니다. 엄청난 살기가 삽시간에 주위를 뒤덮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숨이 턱 막힐 듯한 살기다.
“마공이로군.”
청령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공의 특징은 빠른 시간 내에 초절정의 경지를 밟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다만,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심마(心魔)라는 벽에 가로막혀 미쳐 죽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지금 청령의 눈앞에 있는 귀창은 그 심마의 경지를 뛰어넘어 어느덧 극마(極魔)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귀창이 마공을 펼친 순간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온몸에 혈관이 지렁이처럼 피부 위로 튀어나왔다.
“잘 아는군. 아수라혈심법이다. 크크큭. 지금까지 나의 이런 경지를 보고 살아남은 놈은 아무도 없지. 청성파의 수뇌부들도 이것을 보고 죽어 나갔다!”
극마의 경지는, 정파의 구분으로 따지면 초절정 다음인 화경이다. 하지만 화경은 상대가 안 된다. 마공의 장점은 무공이 너무나 패악하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무공으로는 마공을 절대 뛰어넘을 수 없었다.
청령은 만상귀일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상대가 아무리 마공을 익힌 잔혹한 자라 해도 사람이다. 심장을 파괴하면 살아남을 수 없고, 머리가 터져도 숨이 끊어진다.
그의 검강이 삼 척으로 늘어났다. 만약 무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봤다면 경악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 누가 약관의 나이에 검강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청령은 귀창의 뒤에 남은 다섯 명의 잠룡수라대를 보며 검을 가슴 쪽으로 모았다.
자신보다 고수를 상대할 때 제일 좋은 방법은 기습을 하는 것이다. 눈어림으로 볼 때 청령과 귀창의 거리는 고작 삼 장도 되지 않는다. 무림인들에게 이 거리는 발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불과했다.
청령의 오른발이 슬쩍 앞으로 움직였다.
“만상귀일검법 일초식 일섬검(一纖劍)!”
만상귀일신공을 펼쳤을 때만 제 위력을 발휘하는 만상귀일검법이었다. 청령의 발이 빠르게,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검이 귀창의 목을 향해 일선으로 찔러 들어갔다.
후앙―!
하지만 귀창은 절대 녹록하지 않았다.
‘빠르다. 마공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눈으로 쫓는 것만으론 늦었을 것이다!’
다음 순간, 귀창이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검을 흘리고 창대 부분으로 청령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허업!”
크게 틈이 벌어진 청령은 검을 회수하려 들었다. 공격하기보다는 옆구리로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퍼억―!
청령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옆으로 처박혔다.

* * *

“령 오빠가 너무 늦어.”
연이는 반 시진이나 지나도 청령이 나타나지 않자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검하은이 그런 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청 공자는 금방 올 거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고 싶으셨을 테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검하은의 표정이 침울해지자 석윤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출발할 채비를 했다.
“검 소저, 그럼 저와 함께 청 소협을 찾으러 가 보죠. 아직 소협께 고맙단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듯합니다.”
워낙 경황이 없었던지라 간단한 인사치레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검하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이도 그녀의 손을 꼬옥 잡으면서 외쳤다.
“나도 갈 거야!”
“그래, 같이 가자.”
별일 없을 거라 애써 생각하며, 세 사람은 가벼운 마음으로 청령이 사라진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헉! 헉! 헉!”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겼다. 청령의 몸 이곳저곳에는 생채기가 많이 나 있었다. 청령이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호신강기를 펼치지 않았다면 이번 공격에 순식간에 허리가 두 동강이 날 뻔했다.
“우웩!”
청령이 입에서 선혈을 뱉어 냈다. 분홍빛의 피였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청령은 소매로 입가를 쓰윽 닦아 내고는 두 발로 지면을 버티고 검을 들어 올렸다.
가볍기 그지없던 검이 지금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그 모습에 귀창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정말 대단한 놈이로다. 그 순간에 호신강기를 치다니! 자칫 살려 놨다간 이십 년, 아니 십 년만 있어도 천하를 위협할 놈이다!’
그만큼 청령의 재능은 뛰어났다. 귀창은 자신의 손으로 아직 펼치지도 못한 날개를 부러뜨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한편 청령은 주위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귀에 세 사람의 미세한 발소리가 들렸다. 청령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이런, 연이와 검 소저로구나. 다른 한 명은 석 형인가? 하필이면 이때!’
괜히 싸움에 휘말렸다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워낙 먼 거리라 눈치 챈 사람은 청령과 귀창뿐이었다.
청령이 검을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욕설을 내뱉으며 광기에 씌여 달려들던 청령의 말투가 어느새 변해 있었다. 만상귀일신공을 일으키자 심신이 편하게 가라앉은 것이다.
잠룡수라대는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고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암기를 매만졌다.
귀창이 청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는 석가장의 소가주인 석윤서가 있다. 만약 그가 무사들을 이끌고 온다면 최소 몇 명은 죽을 것을 각오해야겠지. 괜한 충돌은 피하는 게 좋다.’
귀창은 유능한 소대장이었다. 무공만 강했다면 결코 잠룡수라대의 수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안내해라.”
“좋습니다.”
청령이 빙허임풍을 펼치며 먼저 사라지자 잠룡수라대도 가볍게 경공술을 펼쳤다.

청령이 도착한 곳은 용아천의 상류 쪽이었다. 산세가 워낙 험해 다른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곳이었다.
옆구리에 난 상처가 워낙 심해 점혈을 해도 피가 멎지 않았다. 청령은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지만 눈앞에 서 있는 잠룡수라대의 귀창을 보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청령과 귀창의 경공을 따라오지 못했던 잠룡수라대들이 속속 도착했다.
청령의 시선이 검으로 향했다.
‘공력을 너무 많이 소비했다. 결국 검이 버티지 못하는구나.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는지…….’
귀창이 청령을 쏘아보았다.
“이곳을 너의 무덤으로 정했느냐?”
“…….”
무덤으로 정하기에는 초라한 곳이었다. 청령은 굳이 귀창의 말에 대꾸할 마음이 없었다. 그저 내공을 끌어올려 왼쪽 손바닥으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그의 손바닥이 초록색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장법을 사용하기 직전의 현상이었다.
“후후. 그래. 무인들은 말이 아닌 무공으로 대답을 하지.”
귀창은 정말로 청령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기쁜 마음으로 창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입가가 순간 말려 올라갔다.
휘리릭―!
청령은 발을 떼자마자 곧바로 최심장을 휘갈겼다.
“헉! 피해라!”
“최심장이다!”
쾅!
허공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커다란 폭격 소리! 지독한 독장에 잠룡수라대가 대경실색하며 급급히 자리를 피했다.
청령은 따로 떨어진 이들을 하나하나 쫓았다. 뒤에는 귀창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그의 신법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청령의 손아귀에 붉은 빛깔이 은은하게 빛났다.
파앗!
그의 팔이 갑자기 사라진 듯 보이고 잠시 후, 그 손에는 여지없이 잠룡수라대 중 한 명의 목이 대롱대롱 잡혀 있었다.
“케엑!”
하지만 그는 곧바로 청령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청령이 힘을 써서 그를 패대기친 것이다.
“크아아악!”
그의 목이 붉게 물들었다. 열양지기의 화기에 순식간에 당한 것이다. 귀창은 온 힘을 끌어올린 청령의 신법을 쫓을 수 있을 정도로 신법의 귀재가 아니었다. 결국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노옴! 쥐새끼처럼 피하지 말고 맞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