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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8화)
3장 용아천(5)


부웅!
귀창의 창이 청령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청령은 침을 꼴깍 삼켰다. 식은땀이 등골을 지나 흘러내렸다.
또다시 청령을 놓치자 귀창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 귀창은 창은 귀신같이 다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창과 함께 보냈기에 신법이나 보법에는 능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청령의 빙허임풍은 천하십대신법에 들 정도로 대단한 비급이었다. 청령은 그렇게 잠룡수라대를 하나하나 붕괴하고 있었다.

귀창이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잠룡수라대는 이미 자신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청령보다는 귀창이 나았다. 청령은 대부분의 내공을 손실했다.
“큭!”
청령이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상처가 터져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청령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느새 다가온 귀창이 그의 목을 향해 창을 휘두른 탓이었다.
“읍!”
청령은 입술을 깨물고 곧바로 검신으로 창대를 막았다. 그러자 곧바로 창이 다시 찔러 들어왔다. 공력을 머금은 공격이었다. 청령도 곧바로 내공을 운용했다.
하단전에 있던, 한 줌밖에 없던 내공이 검신을 타고 발현되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옅은 빛이었다.
채앵!
촤르륵!
청령의 신형이 뒤로 일 장이나 밀려 나갔다. 그의 발밑이 깊이 파여 있었다. 그만큼 귀창의 창술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흐흐흐. 네놈의 운명이 이제 다했다는 것을 하늘이 말해 주고 있구나.”
청령은 분했다. 청성파의 복수를 하지 못했다는 것에 하늘에 가서도 장문인을 뵐 낯이 없었다.
“흐아압!”
귀창이 그대로 창을 계속 밀었다. 청령의 발이 땅바닥을 깊게 패며 밀려 나갔다.
콰지직!
“으응?”
청령이 들고 있는 검신의 중앙부가 가뭄 난 땅처럼 쩍쩍 갈라졌다.
쨍그랑!
검신이 깨어지고, 그 파편이 허공을 비산했다. 그 순간 귀창과 청령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청령의 다문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푸욱―!
왼쪽 가슴이 불에 덴 듯 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청령의 가슴팍을 귀창의 창이 정확히 꿰뚫었다. 그곳은 심장이 있는 곳이었다.
청령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충혈 돼 있었다. 그 붉은 안광을 본 귀창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흐흐. 하지만 어차피 이대로 죽을 놈이거늘, 이토록 주눅 들 이유가 없다.’
순간, 청령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그의 내공이 순식간에 손을 타고 흘러왔다. 진원진기의 기운을 사용한 것이다.
그의 손이 심장을 꿰뚫은 창대를 붙잡았다.
“후후. 지, 지금 우, 우리의 발밑에 뭐가 있는지 아시오?”
귀창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은 용아천 상류에 위치한 둑 위였다. 귀창의 눈이 커졌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억지로 힘을 써서 창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무리였다. 만근이라도 되는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무게였다.
“그래도 같이 가야 쓸쓸하지 않을 것 아니오!”
“놔, 놔라! 이놈! 당장 놓지 못할까!”
청령의 왼손이 둑을 가리켰다.
“구하천풍장!”
그의 손에서 맹렬한 기운이 솟아났다. 그 기운이 둑을 때리자, 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얼마 전에 내린 엄청난 폭우로 인해 지금 둑 주위에는 엄청난 물이 차올라 있었다.
콰앙!
쏴아아아!
“아, 안 돼!”
귀창의 비명 같은 한 마디는 그대로 물에 파묻혀 버렸다. 엄청나게 불어났기에, 귀창 같은 고수라 해도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 이거면 돼. 이거면…… 먼저 간 청성파 사람들을 볼 낯은 있겠지.’
그때였다.
물에 쓸려 가는 그를 향해 한 노인이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 * *

전투의 흔적을 발견한 석윤서와 검하은의 낯빛이 대번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아무래도 전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자리를 옮긴 듯하군요.”
석윤서의 말에 검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윤서가 말을 이었다.
“추적술은 조금은 배웠습니다만, 어디로 옮겼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경공술이 대단한 고수들입니다.”
“석 공자! 공자께서는 지금 연이를 데리고 상단으로 돌아가 계셔 주시겠습니까?”
“아니, 검 소저께선 어쩌시려고……?”
“잠시 이 일대 좀 둘러보고 갈 생각이에요. 일각 안에 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연이를 데려가세요. 제가 꼭 찾으러 갈 테니까…….”
“언니! 난 가기 싫어.”
그 무렵이었을까.
콰콰콰쾅!
연이은 굉음에 검하은이 귀를 쫑긋 세웠다.
검하은은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신법을 전개했다. 임독양맥이 뚫린 그녀의 신법은 석윤서의 눈으로도 쫓기 힘들 정도였다. 검하은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 줘요.’
신법을 펼치는 그녀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다, 당신은……?”
청령의 입에서 간신히 그 말이 튀어나왔다. 수압이 워낙 세서 말하기조차 힘들었다.
“드래곤은 태자마마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처사입니다. 한때 라인하르트 제국의 추기경인 제가 어찌하여 마지막 남은 고귀한 핏줄을 죽게 내버려 두겠나이까.”
청령은 노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명 익숙한 듯은 한데,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중원의 언어가 아니었다.
노인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마르드 님! 제 간청을 들어주소서. 먼 이계의 구천에 떠도는 원귀가 된다 해도 드래곤과의 맹약을 잊은 저를 용서하시옵소서!”
노인은 물속에서도 거침없이 말을 했다. 그의 입속으로 물이 들어갔다. 헛구역질을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그때, 청령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노인의 몸이 어둡고 캄캄한 물속을 비출 정도로 빛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리바이브 리턴(Revive Return)!”
그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절대적인 디바인 포스를 바탕으로 한 마법. 그것은 신성사제들만, 그것도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득한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대마법이었다.
청령의 눈앞이 흐려졌다. 노인의 말에 정신을 조금 차리긴 했지만 애초에 심장이 뚫린 것이다. 진원진기로 간신히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긴 했지만 애당초 그 이상은 무리였다.
‘아…….’
청령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4장 프로시안 영지(1)


대대로부터 프로시안 남작령은 천대받는 영지였다. 영지의 동쪽에는 몬스터의 천국인 ‘장안의 숲’이 존재했다. 게다가 영지의 80퍼센트가 황무지인 데다, 몬스터들의 침입이 끊이지 않아 영지민의 숫자는 고작 십만에 불과했다.
그 장안의 숲에 두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 있던 중년의 여인이 두 손으로 치마를 들어 올린 채 앞서 가는 여인을 뒤쫓았다.
“헉헉! 아가씨! 그곳에 가면 위험하다니까요.”
“괜찮아, 유모. 칸 아저씨께 들었는데, 장안의 숲 초입에는 몬스터가 없다고 했어. 아버지의 생명이 위태위태한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야.”
앞서 가는 여인의 얼굴은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모습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어딜 가도 미인 소리를 들을 여인이었다. 그녀도 다소 힘들었는지 소매로 땀을 닦아 내고는 허리춤에 매달린 물통을 집었다.
“에이, 물이 없잖아! 유모! 어디 물을 마실 만한 곳이 없을까?”
그녀는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넣고는 물통을 다시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장안의 숲에서 유일한 수원(水源)이 있다면 룩커 강으로, 앞으로 10분 정도는 더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유모는 젊은 여인이 다칠까 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가씨, 그냥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이 이상 들어가면 몬스터들의 공격을 당할지도 몰라요.”
그녀의 걱정 어린 말투에 여인이 살짝 웃었다.
“걱정 말라니까. 내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 난 위대한 칸 아저씨에게 마법을 배운 사람이라니까. 흥!”
칸은 프로시안 영지에 단 하나밖에 없는 4클래스 유저 마법사였다. 여인은 지난 십오 년간이나 마법을 배웠다. 다행히 노력과 재능이 결실을 맺어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3클래스 마스터라는 경이로운 경지에 올라 있었다.
걱정 말라던 그녀도 장안의 숲의 위험을 잘 알고 있기에 뒤꿈치를 들어서 사뿐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모는 더 이상 그녀의 뜻을 꺾지 못했다. 현재 프로시안 남작령에는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프로시안 남작이 며칠 전부터 앓아누운 것이다.
큰돈을 들여 신관과 의사들을 불렀지만 그들 모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남작님의 병은 현재 저희들의 실력으로 고칠 수 없는, 대륙에 전례가 없을 정도로 드문 병입니다.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장안의 숲에 있는 ‘플래임 플라워’뿐일 겁니다.”
화염의 꽃이라 불리는 플래임 플라워는 온몸에 열을 올리는 만병통치약이었다. 그 약의 뿌리를 먹으면 무병장수할 수 있고, 잎을 달여 먹으면 손발이 차가운 사람들의 병이 씻은 듯이 낫는다는 것이다.
현재 프로시안 남작은 손발이 차갑고 온몸의 내장이 서서히 정지되고 있었다.
그 병을 고치기 위해, 프로시안 남작의 여식인 ‘세리아 폰 프로시안’이 발 벗고 나섰다. 인근 영지는 물론 왕궁에까지 기별을 넣어 그 약을 구하려 했으나 플래임 플라워는 영지를 팔아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약초였다.
유모는 어쩔 수 없이 세리아를 쫓아오긴 했으나, 막상 이곳까지 오자 강경하게 말리지 않은 것이 크게 후회되었다.
“아가씨, 한 시간만 둘러보고 약초가 없으면 빨리 영지로 돌아가는 겁니다. 알았죠?”
그녀가 재차 묻자 세리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약초를 찾으면 곧바로 돌아갈게. 유모 먼저 가.”
“아가씨! 정말…….”
“쉿!”
유모가 큰 소리를 내려 하자 세리아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들의 앞을, 4미터에 달하는 트롤이 침을 질질 흘리며 지나갔다.
트롤이 지나가자 세리아와 유모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트롤은 영지 기사들도 손쉽게 이길 수 없을 만큼 강한 몬스터였다.
트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더욱 발걸음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세리아가 룩커 강을 발견하고서 손바닥을 마주쳤다.
“유모는 여기서 상황을 봐 줘. 몬스터가 나타나면 재빨리 도망가. 알았지?”
“아, 아가씨는요?”
“난 일단 물통에 물을 채워야지. 목이 말라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구. 자, 그럼!”
“아, 아가씨……!”
유모는 말도 크게 못하고 답답할 지경이었다. 결국 세리아의 고집대로 그녀를 놓아주고 말았다.
세리아는 주위 동태를 살피며 재빠른 손놀림으로 물통에 물을 채웠다.
‘역시 플래임 플라워는 숲의 초입에서는 구하기가 힘든 걸까?’
하지만 아까 트롤을 본 이후로는 더 이상 들어가기가 겁이 났다. 세리아가 물통의 뚜껑을 닫고 일어서려고 할 때, 그녀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깜짝 놀란 유모가 세리아의 곁으로 황급히 달려왔다.
“아, 아가씨, 어디 안 다치셨어요? 무슨 일이에요? 헉!”
유모는 말하다 말고 손가락을 앞으로 뻗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앞에는, 통나무에 매달려 떠내려 온 젊은 사내가 있었다.
“사, 사람이에요, 아가씨!”
“나도 보면 알아. 유모, 일단 이 사람을 끌어내자.”
“끄, 끌어내자고요? 누구인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다가 변이라도 당한다면…….”
“우리 프로시안 남작가는 결코 위험에 빠진 사람을 내버려 둘 정도로 매정하지 않아!”
세리아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사내를 물가로 끌어올렸다. 다행히 그 몸무게가 그다지 무겁지 않은 듯했다.
가슴에 손을 대자 미약한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이대로 뒀다간 죽겠어! 빨리 영지로 데려가자.”
“지금 그 사람을 데리고 영지로 가시겠다고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아직 신변 확인도 못했는데…….”
“그럴 시간 없어! 이대로 뒀다간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나한테 맡겨.”
세리아가 무릎을 꿇고 마치 신에게 기도하듯 입으로 주문을 외웠다.
“주신 마르드 님이시여! 미천한 제가 자연의 힘을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스트랭스(Strength)!”
3클래스 마법인 스트랭스는 대상자의 근력을 서너 배로 상승시켜 주는 마법이었다. 세리아가 사내를 들쳐 업고 끙끙거리는 발걸음을 한발 한발 내디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세리아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등에 업힌 사내가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기 시작했다. 온몸이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유모, 나 좀 도와줘. 영지로 돌아가서 칸 아저씨를 데려와 줘, 빨리!”
“예, 아가씨!”
유모가 서둘러 영지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세리아가 풀밭에 사내를 뉘였다. 세리아가 그의 뺨을 살짝 때리며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이봐요! 괜찮아요? 제 말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사내의 눈빛이 희미해져 갔다. 세리아가 왼손으로 목걸이를 감싸 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힐링(Healing)!”
목걸이가 환하게 빛나며 뿌연 빛이 사내의 몸을 감쌌다. 힐링은 외상을 치료해 주는 2클래스 마법이었다. 그녀가 손에 쥔 목걸이는 힐링을 하루에 한 번 시전 가능케 해 주는 마법 아티팩트였다.
“좋아, 일단 응급치료는 했고……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 아! 인공호흡!”
순간 세리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졌다. 처음 본 남자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세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내의 흐려진 초점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