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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9화)
4장 프로시안 영지(2)
두근두근!
귀창의 창에 뚫린 심장이 어느새 다시 뛰기 시작했다.
물에 빠진 뒤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청령은 몸을 추스르기 위해 내공을 움직였다. 하지만 단전이 텅 비어 버린 것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진원진기의 반 이상이 날아가 내공을 쌓는 것이 상당히 힘들 듯했다.
‘으윽, 이 고통은 도대체…….’
청령은 고통을 무시하고 최대한 내공을 쌓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생사현관과 임독양맥이 모두 막혔고 십이경맥에 손상을 입어 소주천을 하는 데만도 일각이라는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그래도 다시는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 되지 않은 것만도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구나. 그건 그렇고, 여기는 영산인가? 주위에 분포된 기가 청성산보다도 훨씬 많구나.’
청령이 소주천을 한 번 더 펼친 뒤, 한 줌 정도 생긴 내공으로 혈을 뚫어 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현재 몸 상태로는 혈을 뚫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청령은 일단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에 자연스레 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렇게 잠시 후 흐린 초점에 한 여인이 잡혔다.
“헉! 벼, 벽안인!”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새파랗다. 머리 색깔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윤기 있는 금빛이었다. 책에서만 봤던 벽안인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청령이 놀라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드시나요?”
청령은 처음 들어 보는 벽안인의 언어에 자신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중원의 언어는 아니었지만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노인장은…….’
용아천에서 둑이 무너져 물에 쓸려 가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노인장. 노인의 모습만은 방금 전 본 것처럼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정신은…… 듭니다.”
머릿속이 더욱 혼란해졌다. 알아듣는 것은 고사하고, 그 언어까지 구사하게 될 줄은 몰랐던 일이다. 그것도 마치 제 언어 사용하듯 능숙하게 혀가 꼬이며 말이 튀어나왔다.
“일어나실 수는 있나요?”
청령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 정신이 깨어 있는 것만도 힘든 일이었다. 눈을 감는다면 다시 오랜 잠에 들 것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그대로 누워 계세요. 유모가 칸 아저씨를 데리러 갔으니까 곧 올 거예요.”
칸이 누군지는 모르나 청령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청령이 바닥에 누워 있은 지 10분 정도가 지나서야 멀리서 작게 쿵쾅거리며 땅이 울렸다. 발소리로 보아 대략 두 명 정도 되는 듯했다.
‘이 아가씨가 말한 칸이라는 사람과 유모 되는 분이겠군.’
청령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곧이어 도착한, 흰머리가 힐끗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숨을 고르며 들고 있던 지팡이로 몸을 의지해 입을 열었다.
“헉! 헉! 세리아 아가씨, 영주님의 일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그냥 영지에서 편안히 계시면 될 것을 뭐 하러 장안의 숲까지 오셨습니까? 장안의 숲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나 계신 겁니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장안의 숲의 위험에 대해 설명했건만, 기어코 사고를 터뜨리고 마는 세리아였다.
세리아가 입을 삐쭉 내밀며 딴청을 피웠다.
“그래도 내 아버지인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어쩌라구요? 어찌 됐건 칸 아저씨, 이분을 급히 영지로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칸이 청령의 미약한 숨소리를 듣고 서둘러 그를 업었다. 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내상이 상당히 깊은 것 같습니다. 영지에 도착하는 대로 신관보다는 의사를 데려와야겠는데요.”
신관이 하는 일은 돈을 받고 저주를 풀어 주거나 외상 입은 자를 치료하는 일이었다. 내상을 입은 경우는 의사에게 처방전을 받아 꾸준히 약을 먹는 것이 옳았다.
세리아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 달 동안은 푹 쉬라는 의사에 말에 청령은 침대에 누워 운기조식을 했다. 만상귀일신공이 팔성의 경지에 오르면 누워서도 운기가 가능했다.
일각이나 걸렸던 소주천이 이젠 반각도 걸리지 않는다. 그의 단전은 중원에 있을 때보다도 빨리 차올랐다.
청령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봤다. 처음에 봤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세상에, 달이 두 개 떠 있는 나라라니!
아무리 벽안인이 사는 나라라 해도, 달이 두 개 뜬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청령은 용아천에서의 일을 뚜렷이 기억해 냈다.
둑이 무너지고 쓸려 내려가던 청령에게 물살을 헤치며 다가온 노인장. 이상하게도 그 노인의 기억들(그의 지식들)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청령은 처음엔 이 상황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면 도대체 설명할 수가 없을 듯했다. 하지만 볼을 꼬집은 후에는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중원이라는 세계, 그리고 또 다른 세계인 유라시아 대륙.
유라시아 대륙은 프라스 제국과, 펠타온 제국이 휘어잡고 있으며 그 주위에 열 개의 왕국이 존재했다.
청령은 그중에서도 슈레이더 왕국이라는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에 있었다.
운기를 하는 도중에도 청령이 깜짝 놀란 일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중원을 압도하는 기(氣)가 사방에 가득 차 있었다. 삼재심법(三才心法)만 꾸준히 수련해도 십 년이면 절정에 들 정도였다. 중원에서는 상승절기를 수련한다 해도 십 년 안에 절정에 들기 힘들었다.
그것을 깨달은 청령은 한껏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만상귀일신공은 신공절학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상승경지다. 이곳에서 일 년 정도만 운기해도 충분히 초절정일 때의 내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만, 열양지기와 한음지기를 진원진기의 반과 함께 날려 버리는 바람에 기연이 있지 않은 이상은 다시 얻기가 힘들었다.
청령은 운기조식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세리아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몸은 좀 좋아지셨나요?”
“예, 생각보다 내상이 깊지는 않았으니까요.”
세리아는 청령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도 이따금씩 그가 머무는 방을 찾아오곤 했었다. 세리아가 방을 쭈욱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 하고 계셨나요? 아까부터 계속 방에만 계시던데.”
“명상을 좀 했습니다.”
청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리아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임은 틀림이 없지만, 그녀의 심장 바깥에 머무는 기를 보면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마법이라는 것이었나……?’
노인장의 기억 속에서 찾은 마법. 심장 바깥에 마나라는 기를 둘러 고리를 완성하여 단계를 높이는 무공(?)이다.
청령은 지난번 힐링이라는 낯선 기술에 자신의 외상이 치료되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란 적이 있었다. 마치 마교에서 사용하는 사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청령의 모습에 세리아는 도리어 웃음을 지었다.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그저 제가 사람을 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죠. 아! 그건 그렇고, 아직도 못 물어봤네요. 이름이 뭐예요?”
청령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중원에서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힌 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묻는 것이 정도(正道)였다. 하지만 청령은 그녀를 나무라진 않았다.
중원과는 전혀 다른 이계. 충분히 다를 수 있었다.
“청령이라 합니다.”
“처려요?”
세리아의 발음이 상당히 꼬였다. 청령이 헛기침을 하고는 정정해 주었다.
“청! 령!”
“청……령…… 어렵네요.”
하나하나 따라 하는 모습이,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 같았다. 청령은 그녀의 이름이 세리아인 것을 알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러자 세리아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내심 물어볼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다면 요 앞에 있는 시녀 레나에게 부탁하면 될 거예요. 아니면 칸을 찾아가도 돼요. 칸 아저씨가 어디 계시는 줄은 아시죠?”
모르면 물어보면 될 일이다. 청령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부탁할 일이 있었다.
“아, 소저. 이 성에 서고가 있습니까?”
“어디 보자. 서고, 서재라…… 아! 아버지가 쓰시던 서재라면 있긴 있어요. 뭐, 지금은 그 서재를 사용하시지 않으니까…….”
“그럼 한동안 그 서재를 이용하겠습니다.”
“서재를요?”
그녀는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이 세계의 문화와 현재 유라시아 대륙 간 정세에 대한 청령의 지식은 매우 빈약했다. 노인장의 기억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세리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프로시안 남작은 평소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해, 서재의 크기가 다른 영주들보다도 남달리 컸다. 평소 세리아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남작의 서재에 들어가 답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인 남작도 기꺼이 허락한 일이다. 누구든지 원하면 서재에 드나들 수 있고 사서까지 있어 서재라기보다는 거의 도서관 수준이 되어 있었다.
“후후. 좋아요. 내일 아침 일찍 시녀를 통해 출입증을 보내 드리도록 하죠. 또 뭐 필요하신 건 없죠?”
“그것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그녀가 살짝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가자 청령은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탓인지 그는 곧바로 운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청명심법을 사용해 절대로 내공수위를 내보이지 않았다.
청령의 방을 나온 세리아의 옆으로, 대기하고 있던 칸이 달라붙었다.
“아가씨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후우. 말도 마세요. 들어가기 전에 마나스캔을 펼쳐 봤는데, 평범한 사람과 별다를 바 없는 수준이에요.”
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 그럴 리가! 제가 그자를 업었을 때 그의 마나는 4서클에 버금갈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아가씨께선 느끼지 못하시겠지만, 가끔씩 저 방에서 마나의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세리아는 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봐도 동년배로 보이는 청년이 4서클에 버금가는 마나를 가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흥! 그만 포기하시라니까요. 그건 착각이에요. 스무 살의 나이에 4서클 정도의 마나를 가진 자는 지금껏 대륙십강밖에 없다구요.”
“하긴, 그렇겠군요. 에휴∼ 우리 영지에 도움이 될 인재라고 생각했는데…….”
대륙십강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이름난 초인들을 가리킨다. 두 개의 제국이 두 명씩 보유하고 있으며, 나머지 여섯 명은 다른 왕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대륙십강의 일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국에 크나큰 두려움을 줄 수 있었기에, 각 나라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럼 아가씨께서는 그자를 왜 도와주시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저 얼굴 반반한 평민에 불과한데 말이죠.”
“글쎄요? 뭐랄까…… 그자는 뭔가 사람의 힘을 끌어들이는 능력을 가진 것 같아요.”
그 말에 칸이 껄껄 웃었다.
“허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런 능력을 가진 자는 지금껏 라인하르트 황족뿐이었습니다. 라인하르트가 멸망한 지도 어언 이십 년이 지난 이때, 죽은 황족이 나타날 리는 없잖습니까?”
“그냥 그런 생각을 막연히 해 본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 우린 정말 엄청난 힘을 갖게 된 것일 텐데…….”
80퍼센트가 황무지인 프로시안 남작령은 대대로 서러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남작의 땅이 후작령만큼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장안의 숲의 몬스터들을 프로시안 남작령 혼자서 막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민들의 세금은 모두 영지를 보호하는 데 사용되곤 했다.
특산물 하나 없는 데다, 몬스터 때문에 매일같이 사람이 줄어드는 영지인 프로시안 남작령.
“호호호!”
세리아는 자신이 한 말에 크게 웃으며 본관으로 향했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라인하르트 황족들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침 일찍 배정받은 손님을 모시기로 한 레나는 방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진동하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이것이 대체…….”
악취의 근원을 찾기 위해 주변을 스윽 둘러본 레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사내의 몸 밑에서 검은 빛깔의 물이 침대를 물들였기 때문이다.
밤을 새 가며 운기행공을 한 청령은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눈을 번쩍 떴다. 손상된 십이경맥 때문에 밤새 힘겨운 사투를 벌이느라 심신이 피로했다.
내공으로 내상을 치료하고, 소주천으로 단전과 혈을 깨끗하게 닦아 냈다. 그 과정에서 불순물처럼 껴 있던 찌꺼기가 악취를 풍기며 모공을 통해 나갔다.
‘내공은 그리 많이 되찾지 못했지만, 내상은 7할 정도 치료가 된 것 같군.’
고작 이틀 만에 이룬 쾌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 전에 찾아온 의사가 보았다면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십이경맥이 치료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나?’
임독양맥을 뚫는 일은 내상이 치료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생사현관도 힘들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십이경맥이 손상되면 내공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치료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청령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무공이 십이경맥을 차례대로 순행하기 때문에 손상이 되면 무공의 사용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