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라인하르트 1권(10화)
4장 프로시안 영지(3)


“음…….”
청령은 방 안에 진동하는 악취에 뒤늦게 눈살을 찌푸리며 창문들을 죄다 열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레나를 향해, 청령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거 어쩌죠? 치워야 할 것 같은데.”
“아! 제, 제가 치우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낮추어 주십시오. 저같이 낮은 자에게 어찌 존대를…….”
중원에도 신분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신분은 무림인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귀족들이라는 자들도 무림인들과 엮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무림인들도 귀족들을 우대하지 않는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림인들은 신분의 차이를 따지지 않았다. 그들의 신분은 바로 무공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청령은 누구에게나 말을 낮추지 않았다.
“차차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직은 이게 편해서……. 게다가 저도 그리 높은 신분은 못 됩니다.”
“예, 정 그러시다면…… 사람들이 있을 때는 낮춰 주십시오. 만약 마님께서 보시면 호되게 혼이 납니다.”
레나는 이제 열다섯 살이 된 소녀였다. 그녀에게 시녀장(마님)은 엄한 사람이었다.
“그러도록 하지요.”
청령은 체념한 듯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그때 레나가 이마를 쳤다.
“아! 맞다. 아가씨께서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청령에게 내밀었다. 어젯밤 세리아에게 부탁했던 서재 출입증이었다.
간단명료한 내용이 쓰인 서재 출입증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본 청령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글을 읽지는 못했다.
참으로 웃긴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 세계의 글을 깨우치는 수밖에 없겠군. 서재에서 할 일이 많아졌어.’
레나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령에게 조심히 물었다.
“괜찮으세요?”
“예. 아, 이름이…… 레나 소저 맞으십니까? 실례지만, 씻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서재에 바로 갈 생각이라…….”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손님이 머무르는 동관에 있던 청령은 맨 아래층으로 내려가 커다란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귀족의 저택이라 해도 프로시안 남작령이 워낙 변방이다 보니 시설이 썩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청령은 이것저것 가리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잠자코 일각 반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레나가 씻겨 주겠다며 욕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청령은 당황하여 그녀를 내쫓았다.
“상당히 개방적인 곳이로군. 남녀가 유별한데 탕까지 들어올 줄은…….”
중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누군가를 씻겨 준다는 것은 황제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청령은 문화적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서재는 본관에 있었다. 동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데는 약 10분 정도의 시간이 소모된다. 본관으로 향하는 청령의 눈에, 연무장에서 두꺼운 갑옷을 입고 목검을 휘두르는 이들이 보였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청령이 묻자 레나가 곧바로 대답했다.
“이곳 프로시안 영지를 지키는 에이전트 기사단 분들이세요. 저분들과는 웬만해서는 부딪치지 않는 게 좋아요. 기사 분들 중에는 성격이 까칠하신 분들이 많거든요.”
레나는 슈레이더 왕국 기사법에 의거해 즉결처분 당한 시녀를 몇 보았기 때문에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청령도 그다지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기사들을 보고 상당히 실망한 것이다.
‘이곳에는 심법이 없는 건가? 어째서 죄다 삼재심법 같은 자잘한 것들뿐이냐. 중원에 비하면 환상적일 정도로 기가 꽉 차 있는데 내공이 저리도 적다니…….’
맨 앞에서 기사들을 가르치는 노기사의 내공도 고작 삼십 년 내공을 웃돌 뿐이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기사들만 해도 십오 년 내공 이상을 가진 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제일 나은 이가 고작 절정의 문턱에 들어선 노기사뿐이라니……. 이곳의 수준이 낮은 건가? 아니면 이 세계의 수준이 낮은 건가.’
청령은 무심히 고개를 홱 돌리고 레나의 뒤를 쫓았다. 상대가 강했다면 찾아가서 한 수 배워 볼 호기가 있었지만 저 기사들과 붙으면 실망만 할 것 같았다.



5장 머리로 판단하기보다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할 때(1)


프로시안 영주의 서재는 도서관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규모를 가진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곳에는 언제부터인가 도서관과 같은 담당 사서가 생겼고, 간단한 출입증만 있으면 들락날락할 수 있을 정도로 왕래가 잦아졌다.
출입증은 사서와 친분이 있으면 쉽게 발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평소 점심시간 때면 시녀와 시종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을 담당하는 사서인 베룬 준남작은 평소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해 사서가 되기를 자처한 자였다. 그는 서재 내에 안 읽어 본 책이 없을 만큼 독서량이 대단했다.
그는 책에서 눈을 떼었다.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을 고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자 만족한 웃음을 보였다. 책을 읽으며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 것이다.
베룬 준남작이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 순간 책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베룬이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자 한 청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룬은 살짝 기분이 나빠졌지만 방금 전의 그 좋은 기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이내 물었다.
“찾는 것이 있소?”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글이라고 하면…….”
대륙어를 포함하여, 유라시아 대륙에는 수십 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한다.
“대륙어를 찾고 있습니다. 혹, 책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대륙어라면 따라오시오.”
계속 책상에 앉아 있었던 탓인지 몸이 찌뿌드드했다. 좀이 쑤시던 때에 책을 찾는다는 사람이 있었으니 스트레칭 겸해서 잠시 몸을 일으켰다.
왼쪽 책장의 끝으로 다가선 베룬이 안경을 스윽 닦고는 제목 없는 책들을 이리저리 꺼내 보았다.
“어디 보자. 대륙어라. 사람들이 찾지 않는 책이라 구석에 넣어 뒀더니 잘 보이지가 않는군.”
대륙어 입문서 중에는 오백 년 전 프라스 제국에서 편찬된 책이 제일 인기가 있었다. 따라 하기가 쉽고 금방 배울 수 있는 책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오백 년 전 편찬된 책이라, 제목이 없다 보니 좀 오래 걸리오.”
오백 년 전 학자 말살정책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 프라스 제국의 5대 황제였던 베이로니아 반 프라스는 폭군이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를 없애고자 학자들을 제거하고, 대륙의 모든 책을 불태웠다. 그때 학자들은 목숨을 연명하고 책을 편찬하기 위해, 제목 없이 책을 내곤 했다.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베룬이 책을 휘리릭 넘겨 보더니 화색을 띠었다.
“아, 여기 찾은 것 같소. 이것이오. 웬만큼 아둔한 사람도 3개월이면 글을 뗄 수 있을 정도로 기본이 탄탄한 책이오.”
베룬이 아둔한 사람 운운한 것은, 자신의 앞에 있는 청년이 그렇게 멍청해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배우려는 의지도 있고 열정도 엿보이지만, 얼굴만 반반한 머릿속이 텅 빈 자 같았다. 그저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유식한 척하려는 시종같이 보인 것이다.
책을 받아 든 청년이 책을 한번 만져 보더니 표지에 묻은 먼지를 입김으로 불었다. 몇 년간 손도 안 댄 책이다 보니 엄청나게 쌓인 뿌연 먼지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책을 펼쳐 본 청년, 청령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니오. 그럼 난 이만.”
베룬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그는 사람이 없는 테이블로 가서 조용히 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 여기 오기 전에 레나가 챙겨 준 것들이었다.
‘중원의 문자에 비하면 턱도 없이 외우기 쉬운 글자야. 이 정도라면 며칠이면 문제없겠어.’
중원에 있을 때는 방 안에 틀어박혀 심법을 단련하거나 책을 읽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을 잡고 글공부를 하자 그 모습이 마치 서생처럼 먹향이 진하게 풍겼다.

* * *

프로시안 남작령 옆에는 헤일론 백작령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헤일론 백작은 슈레이더 왕국에서 다혈질적이고 색을 탐하는 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능력은 검술에 있었다. 나이는 사십 줄에 접어들어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에 도달해 있었다. 보통 오십이 되어야 가까스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는 것을 본다면 굉장히 빠른 발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프로시안 남작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아침에 찾아온 부관의 보고 때문이었다.
“현재 프로시안 남작의 병세가 위독하여 그의 여식인 세리아가 ‘플래임 플라워’를 찾는다는 정보입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 약초가 아니면 고칠 수가 없답니다.”
“플래임 플라워?”
백작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부관을 쳐다보았다.
“손발이 차가운 자들에게는 최고의 약초라는 찬사가 있습니다. 현재 프로시안 영지 재정상 십만 골드나 하는 플래임 플라워는 구할 수 없습니다.”
프로시안 영지의 일 년 세금은 오만 골드다. 평민들은 1골드만 있어도 며칠간은 먹고살기에, 오만 골드면 엄청난 액수였다. 하지만 프로시안 영지의 세금 대부분이 몬스터의 침입을 막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남는 게 없었다.
“다른 정보에 따르면 장안의 숲 곳곳에 금과 미스릴 광산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프로시안 남작은 쉬쉬하는 모양이지만, 이것은 기회입니다. 플래임 플라워와 맞바꿀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프로시안 영지에는 장안의 숲을 개척하고 그곳을 농토로 메운 뒤 광산을 개발할 돈과 인력이 없었다. 그들로서는 훗날을 도모하며 그 사실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헤일론 백작은 달랐다. 그의 재력은 왕국 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으며, 사병들과 기사들의 힘은 날로 강대해졌다.
“저희는 그저 플래임 플라워와 장안의 숲의 그 땅, 그리고 보급을 지원받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들이 쉽게 거래를 하겠느냐?”
“어차피 절박한 것은 그들이고, 저희는 하나도 아쉬운 게 없습니다.”
“음…… 좋아. 그럼 이번 일에 누구를 보내면 좋겠느냐?”
백작령에는 프로시안 영주의 목숨과 거래를 벌일 만한 능력이 있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백작은 부관을 보내고 싶었지만, 옆에서 보필하는 부관이 없으면 그 자신이 불편했다.
“백작각하! 이번에 새롭게 창단한 그레이 기사단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능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입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령에는 백오십 명의 기사들이 있고, 총 네 개의 기사단이 있었다. 이번에 창단된 그레이 기사단은 삼십 명으로 구성된 기사단이었다. 기사단 하나가 프로시안 영지의 기사들과 맞먹는 전력이었다.
“좋다. 내가 곧바로 친필 서한을 써 줄 터이니, 그들을 프로시안 영지로 보낼 채비를 하도록 하거라.”

* * *

청령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어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의 서재에서 먹고 자고 모든 것을 해결했다.
가끔씩 레나가 찾아와 안부를 물었지만, 청령은 괜찮다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레나가 찾아올 때마다 손수 만든 음식을 내밀었기 때문에 그다지 배고프지 않았다.
멀찍이서 책을 읽던 베룬이 청령을 힐끔 쳐다보며 기특하다는 듯 웃음 지었다.
“흠, 정말 처음에 봤을 때와는 다르군. 달라. 나보다도 일찍 오고, 늦게 나갈 줄이야…….”
그는 청령이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베룬은 청령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음을 자책했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봐선 몰라. 신기하다, 신기해.”
그때 마침 청령이 자리에서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섰다. 그가 보던 책은 덮여 있었다. 청령은 책을 들어 제자리에 꽂아 놓고는 베룬을 향해 다가왔다.
“오늘은 이만 갈 생각이오?”
“아닙니다. 이번에는 사전과 역사서를 보고 싶습니다.”
“아니, 글도 제대로 못 읽는 사람이 어떻게 역사서와 사전을 본단 말이오?”
베룬이 심드렁하니 말하자 청령은 웃음을 지었다.
“이틀 전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문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뭐, 뭣이오!”
글을 이틀 만에 뗐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머리 좋은 어린아이도 최소 1개월은 걸린다. 그만큼 대륙어는 심오하고 오묘한 언어였다. 게다가 역사서와 사전을 찾을 정도가 되려면 2개월은 지나야 한다.
그런데 고작 이틀이었다. 아이들보다 30배나 빠른 속도였다. 베룬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베룬의 눈에는 그런 청령이 오만하게까지 보였다. 베룬이 청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묻겠소. 그 대답 여하에 따라 역사책과 사전을 드리겠소이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문제없습니다.”
베룬은 처음에는 쉬운 문제를 냈다.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청령은 문제를 내자마자 곧바로 답을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그것보다 어려웠지만 이번에도 청령은 여유롭게 맞힐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어려워지는 문제 역시 청령은 척척 맞혔다.
‘세,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베룬은 기절초풍할 것만 같았다. 열 문제 중에 청령이 답을 말하는 시간이 채 2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다음 문제를 냈다.
방금 전에 낸 문제들이 몸 풀기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웬만한 대륙인들도 맞히기 힘든 것이었다. 바로 고대에 쓰던 대륙어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령은 쉽게 맞혔다.
“이쯤이면 됐습니까?”
청령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묻자 베룬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그렇소. 그럼 곧바로 역사서와 사전을 드리겠소이다. 어떤 역사서를 원하오?”
“유라시아 대륙에 있는 나라들의 건국기와 설화, 전설 모든 것들을 원합니다.”
“분량이 엄청날 텐데?”
“상관없습니다.”
“그럼 자리로 돌아가 있으시오. 내가 찾아서 가져다주겠소.”
“예, 그럼.”
베룬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청령이 원한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 주었다. 쌓아 놓은 책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많았다.
백여 권을 웃도는 책에, 독서를 하고 있던 다른 이들마저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청령은 중간에 놓인 책 한 권을 빠른 속도로 빼내었다. 놀랍게도 책을 쌓아 놓은 더미들이 무너지지 않았다. 이 책에는 고대국가들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고대국가들에 대한 설명에는 빠지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이종족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종족이라 하면 인간유사종족이라고도 불리는데 그들은 바로 장인의 손 드워프, 축복 받은 종족 엘프, 마나의 어머니라 불리는 드래곤 등이었다.
고대국가 시절 더불어 살던 그들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는데 드워프는 산으로, 엘프는 숲으로, 드래곤은 동굴로 사라졌다. 이에는 많은 설이 있는데 이종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고, 제일 유력한 설은 그들이 개체 수가 적어 은밀히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