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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12화)
5장 머리로 판단하기보다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할 때(3)
뚝.
세리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길을 돌려 창밖을 보자 그곳에는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남자 하나가 메이드복을 입은 시녀를 희롱하는 것이 보였다.
기사도를 운운하는 기사들이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양아치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세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때 마침 그레이 기사단의 단장인 알렌이 다가왔다. 알렌의 눈동자를 바라본 세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저 기사들보다도 더욱 타락한 자.’
그녀의 본능은 알렌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알렌이 사고치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다만, 이 일을 주도하는 것이 알렌이라고 짐작이 되었다. 그러니 자신의 부하들이 저런 짓을 해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를 만날까 합니다, 알렌 경.”
“후후. 그러십니까? 이거 어쩌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인 프로시안 남작의 숨이 헐떡거리는데 말입니다. 빨리 만나 보는 게 좋을 겁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세리아가 주먹을 움켜쥔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언성을 높였다.
“……알렌 경! 지금 당신은 귀족을 모욕하고 있어요!”
“제가 그러지 못할 위치입니까?”
“…….”
세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보통 기사들의 신분은 준남작이다. 귀족도 아니고, 평민도 아니다. 준남작들은 영지를 갖지 못하고, 세금도 철저하게 낸다. 다만 그들이 평민들과 다른 것은 평민들보다도 높은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중 신분상승을 많이 꾀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백작 휘하의 기사단장은 적어도 남작의 힘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었다.
“후후, 빨리 거래를 진행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저희도 이런 구질구질한 곳에서 더 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리아가 이를 갈며 낮은 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사흘 후로 하겠습니다.”
“아니요. 조금만 더 빨리 잡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내일은 어떻습니까?”
“좋아요.”
“플래임 플라워에 대한 거래 조건은 내일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닐 겁니다. 영지 사정으로 충분히 가능한 것일 테니…….”
알렌은 말을 하는 도중 묘한 웃음을 지었다. 세리아는 이 상종 못할 기사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듯 심한 모멸감을 느끼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침실에 들어서자 문 밖에서도 느껴지는 한기에 저절로 세리아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침실 한가운데 위치한 침대 위에는 허옇게 무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누워 있었다.
“……?”
“예, 아버지.”
그녀는 침대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는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앉아 있는 의자가 매섭게 차갑고, 맞잡은 아버지의 손은 한겨울의 눈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아버지를 보며 울분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최대한 눈물을 삼켰다.
“우느냐?”
아버지의 걱정스런 말투. 눈은 완전히 의지를 상실해서, 총명했던 눈빛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세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더 이상 아버지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요, 전…… 울지 않아요.”
“그럼 다행이구나.”
아버지는 하루 종일 천장만 바라보고 산다. 세리아가 고개를 돌린 것도 모를 것이다.
“부관이 그러더구나, 헤일론 백작이 보낸 그레이 기사단이 왔다고. 그들이 가져온 것이 플래임 플라워……라지?”
“걱정 마세요, 아버지. 반드시 거래를 성사시킬 테니까요.”
“심히 걱정이 되는 구나……. 헤일론 백작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아마도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거래를 하려고 들 테지. 나의 목숨 값이라면서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요. 그 어떤 것이라 해도 지불할 수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요.”
순간 남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거라.”
“예?”
순간 세리아는 자신의 귀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 조건이 충분히 감당 가능한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거래를 하지 말거라. 어차피 나 하나의 목숨은 그리 중요하지가 않아. 부관에게 들어 보니 영주 자리는 나보다는 너에게 어울리는 듯싶구나.”
장안의 숲을 끼고 있는 변방의 작은 영지지만, 프로시안 영주가 딴 마음을 품었더라면 벌써 사라지고 없어졌을 것이다. 남작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청춘을 불태웠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려고 어떻게 하고 있는 줄 진정 모르시나요? 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등을 돌렸다.
“무엇이라 해도 상관없어요! 아버지만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한 세리아가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갔다. 문 닫는 소리를 들은 남작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후후, 정말 제대로 자랐소. 여보…… 그렇지 않소?”
“으다앗!”
뚜둑!
관절이 비명을 내질렀다.
청령은 기지개를 쭉 켜며 하품을 했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청령이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놨다. 붓으로 쓰는 거라면 할 만하지만, 펜이라는 신기한 물체로 글씨를 쓰다 보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결국은 한 것이라곤 별로 없구나.”
하루 만에 무공이 만들어졌다면, 개나 소나 무공을 만든다고 설쳤을 것이다. 물론 기존의 무공을 새롭게 변형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힘들었다.
“에휴. 열양지기나 한음지기, 그 둘 중 하나의 기운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최대한 그것들을 고려해서 좋은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텐데. 진정 아쉽구나, 아쉬워.”
한숨을 내쉬던 청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내공을 되찾는 동안 꾸준히 훈련을 해서 체력을 보강할 생각이었다.
지난번 귀창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은 실력의 차이도 있지만 체력 문제가 제일 심각했다.
‘그러고 보니 귀창은 어떻게 됐을까?’
초절정을 넘어 화경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청령과 고작 한 단계 차이지만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청령이 지금껏 보아 온 인물들 중 제일 강한 자였다.
용아천의 물살은 제법 강했다. 계속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둑이 무너져 같이 쓸려 나갔을 것이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예의 노인장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노인장이 했던 말은 확연히 대륙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말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그는 노인장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또 이유도 모른 채 이계로 끌려왔다.
어느새 바깥으로 나온 청령의 눈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불똥을 튀었다. 처음 보는 이들이 지나가는 시녀들을 희롱하기 바빴다. 그런 광경은 한 곳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저들이 얼마 전에 왔다는 그 기사들인가?”
프로시안 영지의 기사들과 비슷한 기세를 갖춘 자들이었다.
레나에게 듣기로는 헤일론 백작령에서 온 그레이 기사단이라고 들었다. 그들이 왜 방문했는지에 대해서는 레나 역시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레이 기사단은 막강한 힘을 지녔어요. 괜히 건드리면 좋은 꼴을 못 보니 최대한 방 안에서 숨어 지내세요.’
프로시안 영지의 기사들보다도 더욱 거칠다고 들었다. 오히려 프로시안 영지의 기사들은 다른 기사들에 비해 얌전한 편이였다. 어디까지나 남작의 능력을 보고 지금껏 믿고 따라온 기사 중에 기사였기 때문이다. 기사도를 중시하며 뼛속까지 기사인 자들 말이다.
청령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한 곳에서 뚝 멈췄다. 그곳에는 청령의 전속시녀인 레나가 기사들 여럿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 내 내공은 고작 이류 수준도 못 되는 삼류다!’
프로시안 영지가 그레이 기사단을 막지 못하는 이유는, 헤일론 백작령의 힘이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귀족들의 계급을 이해하게 된 청령이었다.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 순으로 올라가는 귀족의 계급에 의하면 남작은 결코 백작의 일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중원이나 이곳이나 같은 이치였다. 힘없는 자는 항상 당할 뿐이었다.
청령의 다리가 자연스레 움직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레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세리아가 곤란에 처할 수도 있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시녀들을 구하는 것이 중요했다. 무엇보다 아는 사람인 레나가 당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는 문제였다.
‘머리로 판단하기보다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는 바로 가슴의 말을 따라라.’
천유한 장문인이 심심찮게 해 준 말이었다. 남자는 때론 머리로 판단하기보다는 가슴이 시키는 그대로 움직여야 하는 거라고.
휘익!
청령의 각(脚)이 날카롭게 허공을 내질렀다.
6장 한음지기를 되찾다(1)
레나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기사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시녀들을 보면서도 그녀는 무심코 지나쳤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자신과 같은 시기에 시녀가 된 로셀이 기사에게 거의 강간당할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레나 자신이 보기에도 로셀은 시녀들 사이에서도 제일 예뻤다. 자신이 보기에도 그러니, 남자인 기사들이 볼 땐 어떨까? 평소 로셀을 음흉하게 쳐다보는 기사들만 해도 최소 셋이나 되었다.
레나가 기사들 앞에 다가섰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고서 곧바로 후회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기사들을 건드리다니.’
레나는 항상 무언가를 행하고 곧바로 후회하는 타입이었다.
그때 기사 중 하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야야! 이쪽도 괜찮은데? 저년보다는 차라리 이년이 더 나은 것 같아.”
레나는 사실 열다섯 정도밖에 되지 않아 어려 보이는 얼굴 덕에 미녀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시녀들 사이에서 귀여운 막내로 통하고 있었다.
기사가 손목을 잡자, 레나는 곧바로 반항하며 손목을 뿌리쳤다.
“뭐, 뭐예요? 지금 어서 가지 않으면 치안대를 부르겠어요.”
당당한 말과 다르게 그녀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레나……!”
로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올해 18세가 된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바깥으로 튀어나왔고 옷은 단검으로 찢어져 하얀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후후. 이년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프로시안 영지는 시녀를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가 보군. 지금 너희는 기사를 모욕했다. 대륙기사법에 의거하여 너희 생존권은 내가 쥐고 있다.”
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등을 돌려 누군가에게든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주위에는 그녀를 도울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아! 울지 말라고. 반항하면 거친 맛이 있긴 하지만 꼭 그런 년들이 자살을 해서 말이지.”
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하라고? 내가 보내 주는 돈으로 간신히 사는데…….’
그녀는 결국 순순히 몸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월급으로 그나마 연명하는 가족들이다. 여기서 개죽음당한다면 결코 눈을 감지 못할 것이었다.
기사 하나가 단검을 꺼내더니 능숙하게 레나의 옷을 잘라냈다. 곧바로 그녀의 속옷이 드러나자, 기사는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남아 있는 옷을 모두 찢어 버렸다. 그녀는 속옷만 걸친 채 서 있었다.
가련히 떨리는 어깨를 잡은 기사가 레나를 땅으로 넘어뜨리고서는 자신의 플레이트 메일도 벗어 내렸다.
‘아, 제발…….’
이미 로셀도 체념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레나는 구렁이가 살을 헤집는 느낌이 들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 기사의 손이 그녀의 온몸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변한 것은 그녀만의 착각일까?
푸확!
“크어억!”
레나의 앞에 있던 기사 하나가 피를 토해 내며 그대로 3미터는 날아갔다.
“뭐, 뭐냐!”
“이런! 알로크!”
기사 둘이 대경실색하며 쓰러진 기사의 이름을 불렀다. 기사의 얼굴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둔기에 강하게 맞은 듯 복부가 움푹 파여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누구냐?”
알로크라는 기사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기사들은 곧,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한 청년을 볼 수 있었다.
“큭!”
챙챙―!
검을 뽑아 든 그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사내와 직면했다.